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5-12-05   514

<안국동窓> 도태의 계절

겨울이 안 온다며 지구온난화를 우려하는 목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전국에 큰 눈이 내리고 추위가 몰려왔다. 확실히 지구온난화는 큰 문제다. 온실기체를 줄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머지 않아 끔찍한 재앙을 맞고 말 것이다. 그러나 ‘지구온난화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서울 시내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을 지나칠 때이다.

3년쯤 전부터 안국역에서 지내던 남성 노숙자가 있었다. 너무 마르고 때에 절어 있는 모습이어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아마도 40대 중반 정도였던 것 같다. 정신을 놓은 사람이었는데, 깨어 있는 동안은 늘 무언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렇게 일년 내내 안국역의 걸스카우트회관 쪽 계단을 오르내리며 지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 사람을 볼 수 없게 되었다.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문득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어디로 갔을까? 안국역 계단참에서 한 많은 삶을 마쳤을까?

겨울은 도태의 계절이다. 약자들에게 겨울은 혹독한 죽음의 계절이다. 흰눈의 낭만을 속삭이거나 스키와 같은 겨울 스포츠의 즐거움을 외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그런 낭만과 즐거움의 이면에는 참혹한 죽음이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고 자연이 순환한다. 영화 <안토니아 라인>에서 안토니아가 죽음에 대해 묻는 어린 손녀에게 대답하듯이 죽는 것이 없다면 태어나는 것도 없다. 잉태도 도태도 자연을 이루는 한 부분이다.

우리가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까닭,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서 살아가는 까닭은, 자연이 참으로 혹독하고 참혹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섭리를 어길 수야 없지만, 그래도 조금 더 따뜻하게 살아가기 위해 사회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자연적 도태의 위협은 크게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사회적 도태의 위협은 갈수록 더 확대되고 있지 않은가?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은 이 사회의 야만성을 생생하게 증거한다.

노숙자는 최하층 빈민이다. 어떤 사람들은 노숙자를 가리켜 게을러서 노숙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일 개인적 게으름이 노숙자의 원인이라면, 게으른 부자들이야말로 진작에 노숙자가 되었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오래 전에 마르크스의 사위였던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라는 소책자를 써서 게으름을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치로 제시했다. 또한 버틀란드 러쎌 경도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을 써서 노동만을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로 강요하는 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게으름은 악이 아니거니와 노숙자의 원인도 아니다.

노숙자는 사회의 해체를 보여주는 증거이다. 약자와 패자가 도태되고 강자와 승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는 사회로서의 가치와 체계를 잃어버리고 무너지는 사회이다. 유신의 한복판에서 김지하 시인은 유신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우리의 시인들은 풍요의 한복판에서 이 사회가 무너지는 소리를 듣고 있는가? 전국의 모든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노숙자들이 기아와 추위에 떨며 내뱉는 신음소리가, 고통을 이기기 위해 술을 마시고 읊조리는 고통과 회한의 신음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1%의 땅 부자가 50%가 넘는 땅을 차지하고 엄청난 불로소득을 챙기는 사회, 5%의 돈 부자가 50%가 넘는 돈을 차지하고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기는 사회, 극심한 양극화와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한 실효적 정책이 펼쳐지고 있지 않은 사회, ‘뉴타운’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공간을 대대적으로 파괴하는 사회, ‘국가균형발전’의 이름으로 대대적 토건국가 정책을 펼쳐서 양극화와 불평등을 더욱 악화하는 사회, 이런 식으로 이 사회는 노숙자의 대량생산을 촉진하고 있다.

겨울이면 밤마다 죽음의 고비를 넘나드는 노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 사회의 복지제도가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고용과 소득과 주거의 불평등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노숙자는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의 끔찍한 자화상이다. 이미 우리는 다른 자화상을 그릴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세계 109위의 조그만 나라가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되었다면, 이제 그것을 써서 최소한 세계 30위의 삶의 질은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끔찍한 자화상을 아름다운 자화상으로 바꾸는 즐거운 변화의 과정이 될 것이다.

일본의 원로 생활경제학자인 테루오카 이츠코 교수는 <풍요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현대 일본의 풍요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돈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은 분명히 부유한 나라이지만 삶의 질이라는 점에서 일본은 결코 풍요로운 나라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테루오카 교수는 복지의 확충을 통해 삶의 질을 기본적으로 보장해야 사회의 질적 성숙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상세히 논증한다. 한번의 실수로 웬만한 중산층은 누구라도 노숙자가 될 수 있는 무서운 사회에서는 경쟁의 강화는 물론이고 소비의 위축도 필연적이다. 테루오카 교수는 일본이 이런 야만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개혁의 필요를 역설한다.

물론 한국은 일본보다 더욱 열악한 상황에 있다. 오늘도 풍요의 불빛 아래서 노숙자가 굶어죽고 얼어죽고 있다. 왜 우리는 우리의 경제력에 걸맞는 삶의 질을 누리지 못하는가? 왜 우리는 우리의 경제력에 걸맞는 성숙한 사회를 만들지 못하고 있는가? 바라건대, 이 겨울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막는 한 줌의 썩은 정치인들과 경제인들과 언론인들에게 도태의 계절이 되기를.

홍성태 (상지대 교수,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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