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우리 아이가 갈 곳은… ②] 안전망 없는 농어촌 아이들

“엄마는 도망갔고, 아침은 원래 굶어요”

최근 맞벌이 부부의 증가와 육아 개념의 변화에 따라 아동 육아는 사회적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공 보육시설은 턱없이 부족하고, 사설 보육 기관은 비싸고 믿음직스럽지 못합니다. 이에 참여연대를 포함해 전국 17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참여자치운동연대>와 <오마이뉴스>는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우리 아이가 갈 곳은…’이라는 제목의 공동기획을 진행합니다. 편집자주

“엄마 얼굴은 몰라요. 아침은 원래 안 먹어요.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때도 많아요”

혜영(가명, 초4)이와 혜진(가명, 초2)이 자매는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엄마가 없고 아침을 굶는 건 자매의 일상이다. 직업이 일정하지 않은 아버지는 가끔 바닷가로 나가 물고기를 잡는다. 그런 아버지는 자매에게 아침밥을 챙겨주지 못한다. 저녁도 아버지가 일찍 들어올 때만 먹을 수 있다. 혜영이와 혜진이가 하루 중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시간은 학교 급식시간 뿐이다.

▲ 공부방이 끝나면 혜영, 혜진 자매는 아무도 없는 집 대신 주문진 바닷가를 헤맨다. ⓒ2005 박상규

“혜진이네 엄마는 도망갔어요, 우리 엄마도 도망갔었는데 아버지랑 다시 화해했어요.” 옆에서 대화를 엿듣던 친구 수영(가명, 초2)이가 끼어들었다. 엄마 얼굴을 모르는 혜진이는 고개를 떨구고 딴청을 피웠다. “도망간 엄마”가 돌아온 수영이의 얼굴엔 자랑스러움이 역력했다.

혜영이와 혜진이는 사설 학원은 한번도 다녀보지 못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아무도 없는 집 대신 무료 공부방으로 향한다. 공부방에는 집에 없는 컴퓨터가 있어 즐겁다. 공부도 좋지만 자매는 선생님들이 만들어 주는 간식이 더 마음에 든다. 저녁을 굶을 때가 많은 자매에게 공부방에서 주는 오후 간식은 더 없이 소중하다.

어린이날을 하루 앞둔 5월 4일 자매의 표정은 밝았다. 공부방 선생님들이 탕수육과 김밥을 만들어 줬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갈 땐 과자와 초콜릿 등이 든 선물 꾸러미도 받았다. 공부방에 오래 머물고 싶지만 오후 6시면 돌아가야 한다. 이날도 자매는 아무도 없는 집 대신 해가 질 때까지 주문진 바닷가를 헤맸다.

“엄마 도망갔다”는 말이 자연스런 아이들

“나는 어른이 돼서도 결혼을 안 할거다. 여자는 돈을 갖고 도망가기 때문이다.”

혜영·혜진 자매와 같은 공부방에 다니는 아이가 글짓기 시간에 쓴 글이다. 강릉시 주문진읍에 위치한 ‘해나비 아동센터(해나비 공부방)’에서 일하는 윤문숙(42) 교사는 이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결손 가정의 상처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어린아이의 가슴에 박혀 있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 위치한 해나비 공부방은 강릉시 주문진읍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해 2004년 문을 연 무료 공부방이다. 이곳에 등록돼 있는 초등학생은 총 80여 명인데 꾸준히 나오는 아이는 30명 정도다. 놀라운 건 30명 중 20명이 넘는 아이들이 한부모 가정이나 조부모 가정에서 생활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입에서 “**네 엄마 도망갔다”, “**네는 이혼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건 이런 배경 탓이다.

윤 교사는 “공부방에 나오는 아이들의 80% 정도는 결손가정에서 자라 가정의 따뜻함을 받아보지 못한 채 방치돼 있다”며 “저소득층이 밀집돼 있는 주문진 같은 농어촌 지역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아동 인권 보호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도시와 농어촌이 혼합돼 있는 주문진에는 2만 4천여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이중 591가구 932명이 국민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자다. 이는 다른 강릉 지역보다 높은 수치다. 실업률도 전국 평균 3.5%보다 월등히 높은 10.0%에 이른다.(2004년 통계)

강릉지역 여러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주문진 지역의 알콜 중독과 가정 폭력은 위험한 수준에 이르렀다”며 “열악하고 취약한 상황이 아동학대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지역 초등학교의 한 교사도 “한부모 가정에서 부모 알콜 중독 등의 가장 폭력에 시달리는 아이가 대수롭지 않을 지경”이라며 “담임 교사 혼자 손을 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토로했다.

삶의 등대가 필요한 아이들

그러나 다른 농어촌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문진의 아동 복지시설은 매우 허술하다. 문화 시설은 전무한 실정이고 무료 공부방도 해나비 아동센터를 포함해 3곳뿐이다. 이곳을 이용하는 아동은 90명 정도이다. 전문가들은 주문진 전체 초등학생 800여 명 중 250명을 방과후 보호가 필요한 아동으로 보고 있다.

▲ 주문진 저소득층 가정 아동을 위한 무료 공부방인 '해나비 아동센터'. 30여명의 아동들이 이 공부방을 이용한다.ⓒ2005 박상규

올해 4월 출범한 ‘강릉지역 방과후 공부방 네트워크(공부방 네트워크)’는 주문진과 같은 취약 아동을 돌보기 위해 강릉지역 시민단체, 대학, 언론사 등이 머리를 맞대 만든 기구다. 현재 강릉지역 저소득층 가정 초등학생 430여 명이 공부방 네트워크가 운영하고 있는 15개 무료 공부방을 이용하고 있다.

박영주 공부방 네트워크 운영위원장은 “강릉지역 전체 초등학생의 5%인 900여 아동이 이용할 정도로 공부방을 늘릴 계획”이라며 “가장 취약한 주문진 지역에 많은 연구와 투자를 집중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박 위원장은 “어린 학생들 사이에서도 주문진 출신 학생들을 무시할 정도”라며 “빈곤한 농어촌 지역 아동들도 떳떳하게 행복을 추구하고 인권을 존중받을 수 있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익명을 요구한 강릉지역 시민단체의 한 관계자는 “가정 폭력을 견디다 못해 아버지를 살해한 여중생 사건이 주문진에서 발생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며 “장기적인 농어촌 지역 빈곤퇴치 계획과 아동 보호 장치가 없으면 ‘끔찍한 사건’은 또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폭력 아버지를 살해한 여중생 이양의 집에서는 동해의 푸른바다와 등대가 한눈에 보인다. 혜영·혜진이 자매의 집에서도 역시 바다와 등대가 보인다. 이들에게는 망망 대해의 등대와 같은 삶의 등대가 절실해 보인다.

오마이뉴스 박상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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