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3 2013-02-17   1057

[동서남북] 십대가 마을 만들기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십대가 마을 만들기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유현희 l 품 청소년문화공동체 활동가

 

꼰대와 무서운 아이들

요즘 제일 무서운 게 중학교 2학년’이라는 말이 있다. 혹자는 십대 셋만 모여 있으면 말도 못 붙인다고 한다. 십대들의 변화무쌍한 성장기적 특성을 빗댄 농담이기도 하지만, ‘십대에게 잔소리했다가 칼부림을 당했다’는 식의 언론 기사들을 보면 우스갯소리만은 아닌 듯 하다. 십대들의 존재를 각인할만한 사건들이 대체로 이런 문제들이다 보니 십대들의 바라보는 기성세대들의 시선이 고울 리 없다. 실제로 십대들과 활동을 하다보면 근거 없는 오해와 질타를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

 

2010년 동네에 십대들과 공간 하나를 만들었다. 십대들과 함께 모금콘서트를 기획하여 기금을 마련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손 떼 묻혀 만든 매우 뜻 깊은 공간이었다. 공간이 활동 거점이 되고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하면서 불쑥 동네 주민이 찾아오는 일이 있었는데, 이유인 즉슨 ‘아이들이 동네서 담배를 피운다, 건물 앞에 쓰레기를 막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 아이들 십대들 중에도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있고, 간혹 쓰레기를 버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강력한 낙인이 되는지 잘 알기에 예절과 처신에 대해 매우 철저히 교육하는 편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찾아와서는 우리 아이들이 그랬단다. 혹시나 화를 당할까 직접적으로는 말을 못하다가 성 낼만한 곳이 생긴 것이다. 한번은 정말 우리 아이가 동네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이웃주민에게 발각된 일이 있다. 사회적으로 금지된 행위이고 주민에게 피해를 입혔기에 잘못인 건 맞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윽박지름과 반말, 욕설이 난무한 그 훈육(?) 방식을 보고 있자니 왜 칼부림이 나는지 이해가 될 정도이다. 일그러진 소통은 교육이 되기보다 반발을 낳고, 한번 찍힌 낙인은 쉽게 봉인해제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악순환은 계속된다. 공동체를 상실한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가정이나 학교에서의 훈육관계를 제외하고 십대와 기성세대가 편안하게 만나 소통하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 그들은 서로 너무나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지고 있을뿐더러, 만난 적도 이야기해 본 적도 없다. 서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만나면 갈등을 빚기 십상이고, 소통과 관계가 왜 필요한지, 그렇게 하면 뭐가 좋은지 모르니까 노력하기보다는 그저 안 부딪히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십대에게 기성세대는 꼰대, 기성세대에게 십대는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편견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과정을 만드느냐에 따라 십대와 기성세대는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도, 스승이 될 수도 있다.

 

마을공동체와 십대_ 십대는 늘 보호와 돌봄의 대상인가?

한국사회의 청소년사업은 매우 애매한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창의적 체험활동이니 문화예술교육이니 하면서 방과 후 활동이나 주말 프로그램을 장려하고 있으나 정작 아이들은 학교나 학원에 묶여서 다른 활동을 할 시간이 없다. 서울에서는 혁신학교나 지역사회 연계교육 같은 나름 고무적인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지만, 대다수의 십대들은 여전히 정책방향과는 거리가 먼 일상을 보내고 있으며 지방의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더군다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십대를 여전히 보호와 돌봄의 대상으로 치부하고 있거나 프로그램 대상자로만 보는 경향이 많은 것 같다.

 

마을공동체 사업도 마찬가지다. 우리 마을을 비롯해 많은 마을 만들기 사례들을 살펴보면 주체의 대부분이 3,4-대 주민들 – 주부, 활동가, 예술가 등 – 이다. 이들은 따로 또 같이 활동하며 함께 공감을 조성하기도 하고 다양한 마을 교육과 동아리 활동들을 만들어나간다. 그런데 여기에 십대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참여자들이 성인이거나 어린이이며, 있어도 단순 프로그램 참여자 이상을 넘지 못한다. 물리적 상황이나 역량 상으로 십대가 마을 활동의 전면적 주체로 나서기 어려운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십대가 잠재적 청년이자 마을의 주체로 성장할 씨앗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을 믿는다면, 그들에게도 마을활동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십대들을 키워내기 위한 긴 과정의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십대와 함께 배제되어 있는 대상이 바로 청년이다. 이들은 ‘청년실업, 청년창업’ 등의 용어와 묶여 다니며 사실 상 마을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 마을에 청년이 없는 이유는, 마을사업에 십대가 없는 이유와 동일하다. 마을 속 주체들의 성장은 어린이에서 십대, 청년, 성인으로 이어지고 순환될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마을에 십대와 청년이 설 자리를 주자. 품이 십대와 마을 만들기를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유쾌한 십대가 유쾌한 마을을 만든다.

십대가 바라보는 마을은 어떨까? 현실을 보자면 이 물음은 자체가 우문이다. 대답은 뭥미? 마을에 대한 관심이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어떻고 말고 할 것이 없다. 대부분의 십대들에게 마을은 그저 ‘내가 살고 있는 물리적인 동네’일 뿐, 마을에 대한 인식조차 없는 경우가 많다.

 

2008년 품에서 처음 ‘동네 말 걸기’를 시도할 때도 아이들의 반응은 ‘뭥미?’였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아이들은 대부분 동네에서 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간지가 생명이고 공연에 목메는 친구들에게 ‘동네에 나가서 놀자!’는 제안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고, 실제로 몇몇 아이들은 활동에 흥미가 떨어져 그만두기도 했다. 그나마 아이들과 쌓아 온 신뢰 관계가 없었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품은 특유의 꼬득임 능력을 발휘하여 아이들과 놀던 방식으로 동네 나들이를 시작했고, 그렇게 시작된 ‘동네 말 걸기’ 프로젝트는 거리 공연에서 동네 관공서와 재래시장 힘주기 프로젝트, 풀뿌리 단체 탐방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나자 십대와 마을, 문화를 연결한 ‘동네문화 프로젝트’를 직접 기획하기에 이르렀다. 아이들의 변화와 그 아이들을 통한 마을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2010년 십대와 마을을 위한 ‘청소년문화공간’이 탄생하였고 이 공간을 거점으로 아이들과의 일상적 만남이 시작되었다. 2011년에는 주말대안학교 ‘무늬만학교’가 문을 열었고 2012년 사람, 문화, 이야기가 있는 마을장터가 시작되었으며, 98년부터 15년을 이어온 ‘강북청소년문화축제 추락(秋樂)’은 십대와 마을이 함께 하는 마을축제로 성장하였다. 품의 십대들은 마을 문화 만들기의 주체이자 든든한 동반자로

 

스물한살 품, 십대와 청년을 키우며 마을 속에서 길을 찾다.

품은 1992년 ‘품 청소년놀이문화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개소하였다. 잃어버린 우리 문화, 우리 뿌리를 찾아 들로 산으로 노다니던 초창기 시절부터, 문화로 경쟁하지 말자며 비경쟁 축제 만들기에 집중하던 중반기까지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행복하게 성장할까?’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특별할 것 없었던 우리의 사명은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 비상식적 현실 속에서 고집스럽게 이어지며 활동영역을 넓혀왔다. 제도권 교육이 맘에 안 들었지만 아이들의 일상이 학교에 있었기에 학교도 만나고, 아이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했기에 현장과 사람을 흔들기 위한 교육사업도 시작했다. 청소년 축제에 청소년이 들러리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며 청소년축제기획단을 만들고, 좀처럼 변화하지 않는 아이들의 현실을 아프게 자성하며 아이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고무적인 시도들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청소년 거리 축제’를 계기로 지역과의 만남을 시작하여 ‘십대와 마을’을 이야기하기까지 20년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살아왔다.

 

현재 품은 한국과 네팔의 마을에서 십대와 청년을 키우며 행복한 삶의 길 찾기를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돌봄과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도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을 발견하고 발현 해 낼 동기나 기회를 얻지 못했을 분, 충분히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였다.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하고 주변을 자극하며 마을의 문화와 삶의 대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에너지 넘치는 동반자였다. 그리고 그들은 늘 우리의 존재이유이자 스승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의 삶과 연결된 모든 영역에서 활동한다.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필요하고 예술이 필요하고 마을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절된 삶 속에 있고, 우리 아이들은 대체로 한 가지 삶의 목표와 가치가 존재하는 ‘제도’의 영역 속에 살아가며 신음한다. 배제할 수도 눈감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유연하게 경계를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사회복지, 문화예술교육, 마을공동체 사업 등으로 아이들의 삶을 구분하며 분절된 영토를 확장하기보다는 비판과 통섭의 자세를 유지하며 아이들의 삶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 그러한 생각이 사회복지에서 문화예술, 교육, 국제활동, 마을과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영역을 확장시키고, ‘아이들과 삶’이라는 공통의 영토를 만들어냈다. 아이들의 삶이 그렇듯 품의 활동에는 제도와 일상의 경계가 없다. 제도와 일상, 영역과 영역의 경계를 넘나들며 아이들의 행복한 삶을 위한 품의 길 찾기는 계속되고 있다. www.pumgongi.net를 참고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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