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2 2022-02-01   676

[동향1] 빈곤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과 정치인의 태도를 향한 일갈

탁장한 ‘누가 빈곤의 도시를 만드는가’ 저자

투표를 거부한다

“나는 투표하지 않아.” 얼마 전 서울역 노숙인 친구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이유를 묻자 누가 뽑히든 자신의 삶이 나아지리라는 기대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의 삶의 무게는 버겁고, 투표는 삶을 바꾸지 못했다. 혹시 여기서 일말의 불편함이 느껴지는가? 노숙인이 핸드폰으로 연락을 한다는 점에? 혹은 드러내놓고 투표를 거부하는 행태에?

대중의 투표를 독려하고 민심을 얻고자 지난 8월, 당시 국민의 힘 대선주자들이 서울역 근처의 동자동 쪽방촌을 찾아 생수를 배달하고 삼계탕을 나누는 봉사활동을 진행했다. 그러나 정작 주요 후보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국민께 봉사한다는 의미의 봉사는 늘 그렇듯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했다. 공공재개발과 관련한 찬반의 논란이 있었음에도 주요 문제는 건드리지 않은 채, 그들은 오로지 전달하고자 했던 ‘따스함’만을 연출했던 것이다. 주민들의 진짜 목소리는 거기에 없다.

동자동 쪽방촌의 공공재개발은 부동산 문제에 직면한 정부가 지난 2월 집값의 안정을 위해 발표했던 사안이었다. 물론 공공재개발은 도시정비에 있어 세입자 주민의 주거복지에 관심을 기울인, 일종의 성찰에 따른 정책적 전환으로 평가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쪽방 건물주 집단의 끈질긴 저항이 이어졌다. 1년이 흐른 지금, 건물주들의 반대 시위는 계속되고 있고 여러 건물에 공공재개발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은 지 오래이며, 건물 대부분에 동일한 이유로 빨간 깃발이 지속적으로 걸려 있다. 그 사이 또 하나의 투표로 서울시장도 바뀌면서 쪽방촌의 공공재개발에 빨간불이 켜졌고 점차 민간재개발에 힘이 실리고 있는 상태로 흘러가고 있다. 어느덧 쪽방촌은 사유재산권과 사회적 약자 보호가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으로 치달았고, 역설적으로 대중은 무관심해졌으며 세입자들마저 체념한 분위기다. 늘 그래왔듯, 그들의 삶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역전이나 쪽방촌, 빈민가를 기억하고 찾아온다. 그런데 그들은 와서 건물이나 주민들 혹은 생필품을 나누고 있는 본인들의 사진 또는 영상을 찍고 간다.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마치 동물원을 방불케 하는 느낌이다. 연민, 취재, 전도 혹은 개종, 봉사와 같은 개인적, 사회적 목적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는 요금이다. 개중에는 최선을 다해 가난한 주민을 돌보는 사람들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당수는 주민들의 평가를 직접 들어보면 기함할 실체다.

빈곤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이 최고조로 이르는 지점은, 개인적으로 느끼기에 딱 연민과 아름다움까지다. 이제 나는 가난한 누군가를 수년, 수십 년에 걸쳐 도와주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전혀 감동이 오지 않는다. 내가 타인의 도움으로 오랜 기간 눈칫밥을 얻어먹었고 집답지 않은 집과 월세를 지원받아 무료로 거주해온 가난한 당사자로서 그 시간이 주는 처절한 굴욕감과 실존적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 이런 상황에서 계급 배반 투표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자신을 도와주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이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빈민의 정치적 무관심은 예견된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빈민에게는 진보나 보수나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데에는 별반 다르지 않을 정도로 소질이 없다.

탄식의 퍼포먼스

“넌 인생이 힘들다는 게 뭔지는 아냐?” 가난한 사람들에게 내가 종종 듣는 말이다. 나 또한 그 가난한 동네로 이주해 겪을 대로 겪었던 바지만 그래도 그분들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정말이지 숙연해진다. 혹자가 복지 전쟁이라고 부를 정도로 수도 없이 많은 도움이 오고 가도, 그들의 입에서 자주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탄식은 그 도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들의 마음에 닿고 있지 않은지를 그의 상처 입은 몸 자체로 보여주는 퍼포먼스다.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자유가 무엇인지, 왜 필요한지 모를까? 그들은 역전에 있다 보면 수많은 일반인, 직장인들이 지나가는 모습들을 본다. 대로변에 위치한, 사무용 건물들과 가까운 쪽방촌에서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하지 않는 인간 실격으로서의 정서를 짙게 간직하며, 바삐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보면 저 이의 인생은 얼마나 고달플까를 염려하며, 하늘을 우러러보면 부끄러움밖에 느껴지지 않는 자신의 삶의 비참함을 체화하며, 하루하루 빈곤이 만성화되어가는 인생은 정치인이든 다른 누군가든 쉽게 재단할 것이 아니다. 잡념을 없애려면 술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도움이 필요한데, 사회적 지원들은 술과 사람과 마찬가지로 빈민이 생존하기 위해 필수적임에도 그들에게 앞의 두 영역을 제한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자유가 뭔지 몰라서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는 지원체계에 편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곳에 자유는 없다.

빈곤 혐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빈곤 혐오는 빈민을 두려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들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혐오다. 돕는다는 것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다. 쪽방촌에서 오랫동안 무료배식을 하며 주민들을 섬기는 어느 교회에서는 야외에서 더위 또는 추위에 노출된 참석자들을 한결같은 설교를 통해 사정없이 죄인으로 몰아붙인 후,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선심 쓰듯이 밥을 준다. 그 밥 또한 헌신과 신앙심을 빙자한 가난한 사람들의 무료노동으로, 그러나 상당한 수준의 통제임에도 당사자들이 통제라고 느끼지 않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당사자가 자연스럽고 정당하게 통제를 받아들이는 상황을 일컬어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상징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가난이 죄가 되는 사회에서 그 가난의 짐을 자유롭게 하려고 모인 종교인들은, 빈민가의 비참 속에서 나눔의 아름다움을 역설하며 안 그래도 가진 것 없는 주민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더 나누라고 압박하기도 한다. 빈민은 소위 낮은 곳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로 포착되어 그곳에 자발적으로 내려가 돕는 누군가의 거룩하고 성스러운 구제행위를 정당화하면서도, 탐욕스럽고 욕망으로 가득하며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들로 끈질기게 규정된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사고가 인이 박일 정도로 내면화된 주민들 또한 적지 않다. 또 다른 교회의 목사는 언론에 스스로를 노숙자의 대부 내지는 노숙인의 천사라고 소개하지만, 정작 쪽방촌의 가난한 사람들과 욕지거리를 하며 싸우기 일쑤다. 주민들은 한목소리로 그를 목사 같지도 않은 목사라고 꾸짖으며 그가 주는 밥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그 단체를 동네에서 내보내려고 한다.

큰소리는 종교기관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이나 외부 후원이 들어와 쪽방에서 물품 나눔이 있을 때면 복지기관이 그 업무를 수행하는데, 줄이 너무 길어 주민들이 때로는 수십 분에서 여러 시간씩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주민들과 직원들 사이에 실랑이가 자주 벌어지곤 한다. 그리고 수혜자인 주민의 목소리는 후원 물품을 나누어주는 직원의 목소리에 언제든 눌릴 수밖에 없다. 받는 것을 확실히 하려면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조용히 질서를 지켜야만 하는 것, 그것이 어느새 주민들 사이에서 암묵적인 규칙이 되어 있다. 그 외에도 개인계좌로 후원을 받는 단체, 노숙인의 사생활을 얼굴이 드러나게 생중계해 자극적 제목으로 조회 수를 늘려 수익을 내는 단체, 가난을 끊게 해주겠다며 노동하고 싶은 사람들의 간절함을 이용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단체의 행사를 위해 강제 노동을 시키는 사례, 장애인 명의를 도용해 단체가 각종 세금 혜택과 후원금을 받아온 사례 등 빈민가에는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들이 많이 들려오나 이만 생략한다.

사람들은 모른다. TV에서 빈민가에서 목회하는 종교지도자들, 빈민을 대상으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을 보면 그저 안쓰럽고 존경스럽다. 그리고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는 사람들을 향한 참된 섬김과 사랑이 바로 그들에게 있다며 자선과 기부로 그들 단체에 마음을 전한다. 사람들의 인식은 여기까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기부를 하려면 해당 단체를 하나부터 열까지 제대로 알아보고 검증한 후 후원하기를 바란다. 그들이 혐오하는 가난으로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적지 않다.

국가의 부재

빈민가에서 이런 다양한 사건들이 빈민을 돕는 수많은 사람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곳에 단 한 번 와보거나 그마저 와보지도 않은 정치인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무엇보다 이 모든 안타까운 상황을 돕는 사람들의 탓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사실 그것은 국가가 그곳에 부재해서 발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즉 빈곤 문제의 가장 근본적 책임은 국가에 있다.

국가는 쪽방이 세간에 발견된 지 25년이 흐른 지금도 쪽방의 개념조차 제대로 정의한 적이 없다. 수십 년 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던 쪽방은 주소가 중구난방으로 엉켜있고 이것은 지금까지 국가에 의해 관리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다. 국가의 추산은 늘 그보다 더 많은 인구가 존재함을 드러낼 정도로 국가는 노숙인의 실태조차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 주택보급률 104%가 무색할 정도로, 이곳의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했다.의도적으로 쪽방의 물리적 실태에 대해 쓰지 않았다. 그 자체가 자칫 또 다른 빈곤 포르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삶의 환경은 “넌 인생이 힘들다는 게 뭔지는 알아?”라는 앞선 한 마디에 녹아 있다. 난 그곳에 갈 때마다, 친구가 된 사람들을 만나러 들를 때마다 어두컴컴하고 비좁은 절벽 같은 계단과 전체적으로 곰팡이에 절어있는 복도를 지나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곤 했다. 실제로 너무 많은 이른 고독사를 옆에서 지켜보며 무기력을 느꼈다. 누구는 하루도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은 이 지옥 같은 삶을 매일 같이 살아낸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일이지만 그보다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헌법 제35조 제3항에 따르면 국가는 주택개발정책 등을 통하여 모든 국민이 쾌적한 주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러나 공공재개발은 잠잠하고 민간재개발 계획이 탄력을 받는 모양새에서는 극단적 빈곤에 뒤이어 세입자들의 추방이 가시화될 것이다. 역사가 증명하듯, 민간재개발로 건물주와 세입자가 상생한 경우는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자세

빈민을 존엄한 인간으로 대한다면, 지금과 같은 국가적 방치는 있을 수가 없다. 이곳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는 정치인은 일회성 봉사가 아닌 꾸준한 관심을 보여야 한다. 물론 꾸준한 관심은 국가의 부재로 빈민가에 들어와 있는 수많은 ‘돕는 기득권’과 같은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쪽방촌 그리고 노숙의 현장은 깊은 고민과 세심한 계획, 그리고 구체적인 행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곳이다. 쪽방의 경우에는 특히 사유재산권의 문제가 걸려 있어 건물주 집단을 설득할 수 있는 협상 논리의 치밀한 구성이 필요하다. 물론 공공주택을 부패구조 없이 많이 만드는 것과 주택으로서 기능하지 못하는 공간에 대한 강력한 패널티 적용을 통해 쪽방의 운영을 자연스럽게 차단하면서도 세입자 보호 대책을 함께 마련하는 것 또한 정말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그 모든 행위에 앞서 정치인들은 빈민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이 인구는 사실 그렇게 투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가 되지는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간 더욱 무관심의 대상으로 남아 있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긴 시간 누군가의 무대로 소비되고 희망 고문을 당해왔다. 죽음으로, 쪽방을 운영하지 않겠다는 건물주의 변심에 의한 세입자 추방으로 쪽방촌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빈곤의 문제를 해결해서 이곳을 나가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쪽방촌으로 알려지는 동자동 쪽방촌의 인구가 1,000명을 채 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인구 수준은 국가가 조금만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책임졌다면 충분히 빈곤선 위로 올라가게 할 수 있는 정도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라님은 가난을 구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지금이라도 정치는 이 사회경제적 소수자들에게 희망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삶이 달라질 수 있다는 움직임들을 몸소 보여주고 증명해야 한다. 작은 변화라도 체감할 수 있도록 여러 방법을 도출해낼 수 있어야 한다. 수많은 도움의 손길에 의해 온순해지고 무거운 죄책감을 내면화하며 불평등한 사회질서에 조용히 순응하는 가난한 사람들은, 그럼에도 자신의 삶이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예리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정치에는 참여할 의사를 보이지 않는 것은 역설이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닌, 참여해도 변화가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입증했던 정치인들의 잘못이다. 나는 빈민 정치참여의 필요성을 주장하지만, 그것이 자칫 그렇게 행동하고 있지 않은 빈민을 탓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한다. 그들이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람에도 선택은 여전히 그들의 몫으로 남아 있고 난 어떤 행위로 귀결되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가난한 사람을 움직이도록, 그가 다시 꿈꿀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 하는 사람은 빈민 본인이 아니다.

대선후보들이 미래의 삶에 대한 희망을 말하고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에 따라 구체적 행보에 나서기 전에,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직접 몇 번이고 찾아가 공개적으로 사죄하기를 촉구한다. 지난날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애써온 사람들을 쪽방에서, 역전에서 살도록 홀대한 잘못, 국가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그 자리를 메운 사람들이 어느새 선의의 이름으로 가난을 가지고 장난치도록 내버려 둔 잘못, 주거문제를 해결할 것처럼 공공연하게 정책을 발표해놓고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하는 무능에 대한 잘못,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를 불이행해 빈곤이 만성화될 때까지 빈민의 소중한 행복을 앗아간 잘못, 그들의 ‘힘든 인생’에 대해 무지한 잘못, 무엇보다 가난의 서러움을 서러운 대로 방치했던 가장 큰 잘못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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