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일반(sw) 2003-10-06   528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원합니다”

‘삼중처벌’ 사회보호법에 맞선 한 감호소 출소자의 인권선언

청송감호소 재소자 400여 명이 사회보호법 폐지를 요구하며 지난 9월 29일부터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갔으며, 급기야 단식농성에 참가했던 재소자 한 명이 지난 4일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숨을 담보로 한 단식농성도 감수하겠다는 재소자들의 절박한 싸움이 다시금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중처벌과 인권유린으로 악명이 높은 사회보호법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반드시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사이버 참여연대’는 지난 9월 22일 청송감호소에서 풀려난 한 출소자를 만나 사회보호법이 왜 폐지되어야 하는 악법인지를 들어 보았다. 편집자 주

9월 30일 오전 11시쯤, 참여연대 안내데스크에서 손님이 찾아왔다는 전화가 왔다. 한달 전 쯤인가 ‘『참여사회』구독을 신청했는데 왜 책이 오지 않느냐’며 두 번이나 항의하던, ‘출소하면 청송감호소 얘기를 써 준 참여사회를 꼭 찾아가겠다’던, 그 목소리였다. 99년 1년6개월의 징역과 7년의 보호감호 선고를 받아 올해로 청송감호소에 3년째 복역하다 출소한 김영호(가명, 47세) 씨. 몸은 감호소에 두고 목소리만 전화선에 실어 보냈던 그가 이번엔 목소리를 몸에 실어 찾아온 것이다.

촐소 뒤에도 그를 따라붙는 감시의 눈길

9월 22일 출소 당일 김 씨가 같이 출소한 동료들과 처음 찾은 곳은 민주노동당사에서 열린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기자회견’장이었다. 다음날 23일에 김 씨는, 자신이 전날 기자회견에서 폐지하자고 주장했던 사회보호법 중 하나인 보호관찰법에 따라 양평구 신월동에 있는 보호관찰소에 출소신고를 했다.

“먼저 출소한 사람들 얘기를 들으니, 보호관찰소에서 출소자가 일하는 곳에 정기적으로 전화를 건다고 합니다. 그러면 불안한 사업주는 출소자를 해고하는 일이 많아요. 일자리를 얻는 일도 너무 힘들지만 어렵게 일자리를 얻었는데 나도 그 꼴이 될까봐 두려워요.”

보호관찰법과 관련하여 김 씨가 먼저 맞닥뜨린 고민은 사생활 침해라는 인권에 관계된 문제 이전에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였다. 범죄자가 출소하기 전에 일정기간 직업훈련을 시켜 적응력을 길러준다는 ‘고상한’ 취지로 5공 신군부가 도입한 보호감호제도는 김 씨의 사회적응력을 얼마나 길러 주었을까. 김 씨는 감호소에서 정보기기운용 2급 자격증을 땄다.

“미장, 보일러, 자동차 정비 등 7가지 자격증이 있는데 출소 후 취업을 위해 자격증 공부를 하는 재소자는 한 명도 없어요. 20년 전 교재와 교육방식을 통해 얻은 자격증이 나와서 취업에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다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공부합니다. 출소 후 취업이 아니라 지긋지긋한 감호소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오려면 먼저 자격증을 따야 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청송감호소 재소자 600명을 대상으로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5월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는 보호감호제의 도입 취지를 무색케 했다. 직업훈련을 통해 배운 내용이 직장을 구하거나 돈을 버는 데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응답한 467명 중 94%인 438명이 ‘아니오’에 답했다. 감호소 수감 경험을 묻는 질문에는 514명의 응답자 중 재감된 재소자가 235명으로 45.7%였고, 세 번째 감호소에 수감된 재소자도 37명 7.2%에 달했다. 재소사 대부분은 출소 이후 직업을 구하기 어려운 현실을 재범의 유혹에 빠지는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했다.

“3년 일하고 16만원 가지고 나왔다”

▲지난 6월 3일 안국동 느티나무 까페에서 열린 ‘청송보호감호소 단식농성에 대한 공대위 기자회견 및 출소자 증언대회’.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사회보호법 폐지만이 유일한 대안’ 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사진 : 사이버참여연대)

보호감호소는 사회 적응에 필수적인 건강도 보호하지 못했다.

“감호소에 있을 때 머리가 아파서 몇 번 쓰러졌어요. 처음에는 외부진료 요구를 계속 거부하다가 상태가 심각해지자 감호소 의무과장이 진단서를 써줬어요. 감호소에서 일한 돈을 모아서 안동성산병원에 찾아갔는데 처음에는 병명도 가르쳐 주질 않더라구요. 나중에 집으로 진단결과를 보냈는데, 허혈성 뇌중후증이라고 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재소자의 90% 가까이 환자입니다. 일단 먹는 게 너무 부실해요. 농협에서 납품하는 김치가 있는데, 물에 씻은 배추에 시커먼 고춧가루를 몇 숟갈 뿌려 놓은 김치입니다. 대부분 돈주고 다른 김치를 사먹을 수밖에 없어요. 고기는 1주일에 돼지고기 100g이 정량이고, 고기를 사먹고 싶어도 팔지를 않아요.”

감호소는 재소자의 노동력도 착취했다. 단 몇 푼이 아쉬운 재소자들은 봉투만들기 같은 일을 한다. 김 씨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7등급에 해당하는 해당 1100원부터 시작해요.. 출소할 날이 가까운 1등급이 5800원입니다. 그런데 종이봉투를 하루 200개 정해 놓고 그걸 채우지 못하면 일당의 반을 까는 식입니다. 등급에 따라 다르지만 한 달에 2∼3만 원 정도 떨어지죠. 감호소 3년 동안 일했는데 나올 때 16만 원 가지고 나왔습니다.”

감호소는 TV도 스포츠와 쇼 프로그램만 일주일 전에 녹화해서 보여줬다고 한다. “지하철 표 사려고 400원을 냈더니 직원이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봤다”는 김 씨는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감호소는 바뀐 세상에 대해 아무 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인간이다

오후에 인권운동사랑방을 방문하기로 했다는 김 씨는 『참여사회』를 앞으로도 받아보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일어섰다. 인터뷰 도중 마지막 남은 그의 담배 한 개피를 얻어 피운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만원 짜리 하나를 찔러주자, 김 씨는 처음에 완강히 거부하다가 ‘참여연대에 직접 찾아와 인터뷰를 했으니 교통비를 받을 수 있다’는 설명을 듣고 겨우 받아들였다.

2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 8∼9명의 재소자를 몰아넣고(지금은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 한다) 인간 이하를 강요했던 감호소 생활 3년의 노동으로 그는 16만 원을 가지고 세상에 나왔다. 그 3년의 감호소 생활이 권리가 아니라 동정으로 주어지는 1만 원을 거부할 수 있는 그의 자존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현재의 생활, 앞으로 계획 등 빼곡한 신상정보를 서류 형식으로 관찰소에 매달 신고해야 하는 김 씨에게 그의 자존은 때로 얼마나 거추장스러울까. 관찰소는 지난 3년 동안 감호소가 그의 몸에 행사한 야만을 이번에는 인간으로서 온전한 실존을 누리기 위해 마땅히 비밀에 가려져야 할 그의 사생활의 모든 영역에 풀어놓을 것이다.

병을 앓고 있는 그의 몸은 왜소했고, 얼굴의 노쇠는 나이를 성큼 앞지르고 있었다. 대부분의 다른 감호소 재소자들처럼 두 번의 절도죄를 범한 그는 결코 흉악범은 아니었다. 3년의 억울한 이중처벌을 견디고, 또 다른 3년의 삼중처벌의 길에 들어선 그는 가중처벌을 규정한 형법만으로도 한없이 나약한 존재일 뿐이다. 대체 사회보호법이 이 가엾은 존재의 고통을 통해 보호하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폐지되어야 할 사회일까, 약간 개선하면 되는 사회일까.

10월 6일. 사회보호법 폐지가 아니라 개선을 들고 나온 법무부에 맞서 청송감호소 재소자 400여 명이 무기한 단식농성에 들어간 지 8일째 되는 날이다. 단식 과정에서 재소자 강모씨(37세)가 사망했다. 최근 출소한 재소자들도 9월 23일부터 과천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사회보호법 폐지를 요구하는 1인시위를 벌여왔고, 6일부터는 국회 앞에서 1인시위를 준비하고 있다. 김영호 씨가 머무르는 동생집으로 전화를 걸어 심경을 물었다.

“내일 정도에 1인시위에 참여할 생각입니다. 개선은 20년 전에도 나온 얘기라고 들었어요. 이중처벌은 불법입니다. 내 동료들은 지금 단식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여기 나와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사회보호법의 개선이 아니라 폐지를 원한다는 것 뿐입니다.”

장흥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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