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일반(sw) 2003-06-05   770

“눈 대신 마음으로 시청자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국내최초로 텔레비전 MC 맡은 시각장애인 심준구 씨

“의자가 있네요. 앉으시구요. 자연스럽게 김혜영 씨랑 대화를 나누세요. 아니오. 아니오. 오른쪽으로. 네 오른쪽을 보시고 자연스럽게 웃으시면서 말씀하세요. 좋습니다. 좋습니다. 시작합니다. 액션!”

인천 경인방송국(i-TV) 앞 방송인 김혜영 씨와 심준구 씨가 카메라 앞에 앉아 있다. 여느 방송프로 녹화와 다름없이 카메라맨은 좋은 장면을 담기 위해 파인더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피디는 자연스러운 연출을 위해 출연자들의 동선과 자연스런 표정을 지시하느라 정신이 없다. 코디네이터는 양손에 옷핀을 들고 출연자들의 옷매무새와 화장을 살핀다. 조연출은 소품을 챙기느라 여기저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승용차가 지나가는 바람에 녹화가 중지되는 등 NG도 여러 번 났다.

다른 녹화와 조금 차이가 있다면 피디의 말이 매우 구체적이다. “이쪽 저쪽”이 아니라 “오른쪽 왼쪽”이고 손짓으로 사인을 주는 대신 반드시 “시작합니다. 액션”이라고 말을 한다. 손의 위치나 보폭을 설명할 때는 피디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직접 출연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끌어다 원하는 위치에 놓아준다.

눈치를 챘는가? 그렇다. 심준구 씨(35세)는 지난 4월 20일 보건복지부가 선정한 ‘올해의 장애극복상’을 수상한 시각장애인이다. 그는 6월 14일부터 개편에 들어가는 경인방송 <사랑릴레이 '함께하는 세상'>에서 방송인 김혜영 씨와 함께 사회를 맡았다.

그에게는 최초라는 말이 익숙하다. 라디오 방송에서 더러 시각장애인이 진행을 맡는 경우는 있었지만 공중파 TV에서 시각장애인이 사회를 맡게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중도에 시력을 잃은 많은 시각장애인들이 직업을 포기하거나 침술이나 안마를 선택하는 것과 다르게 그는 끝까지 컴퓨터에 매달렸다.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영역의 직업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1998년에 컴퓨터 속기 국가공인 시험에 합격 세계 최초로 장애인 컴퓨터 속기사가 됐다. 직업은 방송에서 청각장애인을 위해 자막방송을 만드는 일이다. 삶 자체가 ‘함께하는 세상’이다. 그의 또 다른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대본 읽는 거 걱정말라

“장애극복상을 수상한 후에 여러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어요. 경인방송도 그 중의 하나였습니다. <함께하는 세상>도 제가 주인공이 된 다큐가 나오면서 인연을 맺었어요. 그러다가 한달 전에 ‘개편을 하는 데 진행자를 맡아줄 수 있냐’는 연락이 왔어요. 흔쾌히 허락했죠. 저에게도 유익한 경험이 될 것 같았고 무엇보다 다른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으니까요. 대본을 못 읽는데 어떻게 방송을 하냐구요? 걱정없어요. 저는 외우는데 익숙하니까. 오히려 방송에서 진행자가 대본 훔쳐보는 게 보이면 시청자들이 싫어하지만 저는 점자로 컨닝 할 테니 들키지도 않고 더 좋은 거 아닌가요? 벌써 매니저도 구했어요. 제 아내죠.(웃음)”

▲ 녹화장에서 만난 심준구 씨와 김혜영 씨. 첫날부터 호흡이 척척 맞았다.

첫 녹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종일관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자신이 실수하면 능청스럽게 분위기를 웃음으로 유도한다. 녹화 때 필요한 의자를 가져다주니 슬쩍 만져보더니 “이건 단란주점 의자 아닌가요”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방송인 김혜영 씨는 장애관련 방송을 몇 년 째 진행한 베테랑답게 첫 만남이라는 심준구 씨와 자연스럽게 호흡을 맞췄다. 녹화장소를 여기저기 옮길 때도 팔을 자연스럽게 잡고 심준구 씨의 이동을 도왔다. 평지를 걷다가 갑자기 계단이 나올 때나 의자에 함께 앉을 때도 비장애인들이 흔히 실수하는 부분을 김혜영 씨는 놓치지 않고 배려하고 있었다. 주변에서 “유부녀가 그렇게 남자랑 팔짱끼고 다녀도 되는 거냐”고 농담을 던지자 “심준구 씨도 마찬가지 아닌가요”하고 받아친다. 이를 뒤에서 지켜보던 심준구 씨의 아내 박필자 씨도 미소를 던진다.

녹화를 지켜보며 이런 저런 질문을 던지는 기자에게 박필자 씨는 남편 자랑을 늘어놓는다. 물론 눈은 심씨에게서 떼지 못한 상태로.

“매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굉장히 바쁜 사람인데도 퇴근하고 나면 딸이랑 셋이서 산책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행복하게 지내요. 자신이 하는 일에 굉장히 적극적이고 모든 일에 여유가 있어요. 아마 방송도 잘 해날꺼라고 믿어요. 무엇이든 즐겁게 하자는 사고방식으로 살거든요. 각 방송사가 자막방송을 늘이면서 남편도 점점 바빠지고 있어요. 그래도 아마 방송도 똑부러지게 할 거예요. 지켜봐 주세요.”

방송에서는 진행자의 표정이나 시선, 옷차림 하나 하나가 시청자들에게 민감하게 다가온다. 시각장애인과의 눈맞춤이 처음에는 시청자들에게 낯설게 다가올 수 있다. 제작진들도 처음 하는 경험에 기대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

<함께하는 세상> 홍종훈 피디는 “함께하는 세상에는 장애인이나 자원활동가, 미아 등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모습을 담는 프로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이런 프로의 진행조차도 언제나 비장애인들이 중심이 되고 있다는 반성이 들었어요. 그러던 찰나에 심준구 씨 방송이 나가고 나서 정말 저 사람 시각장애인 맞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어요. 그 때 심준구 씨를 통해 시각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고 진행자로 적합하겠다는 생각을 했죠. 백번 설명하는 것보다 그렇게 보여주는 게 편견을 깨는 최고의 방법인 것 같아요”라고 심준구 씨를 진행자로 발탁한 이유를 설명했다.

심준구 씨의 대본에 나온 말처럼 “눈대신 마음으로” 시청자를 찾아가면 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제작진들은 갖고 있었다.

비장애인에 의해, 비장애인을 위한 방송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경인방송의 <사랑릴레이 '함께하는 세상'>은 참으로 소중한 시도가 될 것이다. 그래야 강원래가 진행하는 쇼프로, 청각장애인이 진행하는 뉴스, 시각장애인이 진행하는 토크쇼도 꿈꿀 수 있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심준구 씨가 존경하는 방송인은 ‘임성훈’씨란다. 임성훈 씨처럼 편하게 시청자들에게 다가가는 진행자가 되고 싶단다. 첫 방송은 6월 14일 오전 10시 10분. 경인방송을 TV로 볼 수 없다면 인터넷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http://www.itv.co.kr/web/main/index_life_world.html)

황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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