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6 2006-03-10   1163

1970년대의 사회복지 – 2

최근 인구노령화와 함께 제도개혁이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국민연금제도는 1960년대 후반에 이미 초안이 마련된 바 있으며 그 후 1970년대 초에 제도도입이 다시 논의되어 1973년에는 「국민복지연금법」이라는 이름으로 공포까지 된 바 있다. 이 「국민복지연금법」은 시행되지는 못하였는데 그렇게 된 원인은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국민복지연금법」이 시행되지 못한 원인으로 대개 정부는 1970년대 초반의 석유위기를 거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석유위기는 직접적이고도 중요한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제도가 시행되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직접적인 원인 말고도 내적인 원인이라든가 보다 근본적인 원인 등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이는 이른 바 반(反)사실적 추론법에 따라 석유위기가 없었다면 국민복지연금법은 시행되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보고 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만일 석유위기가 없어서 시행될 것이었다면 당시의 국민복지연금법은 어떤 조건을 갖추었어야 하며 그에 비추어 그런 조건을 갖추었는지를 살펴보면 되고, 석유위기가 없었더라도 시행되기 어려운 것이었다면 왜 그런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여기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전부 제시하기는 어렵지만 이 질문을 염두에 두고 국민복지연금에 대해 살펴보자.

대통령의 1967년 노령연금 연구지시

손준규 교수가 쓴 「한국의 복지정책 결정과정에 대한 연구」라는 논문(1981년 서울대 박사학위논문)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연금제도에 관련된 법안이 최초로 마련된 것은 1969년 혹은 1970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계기는 1967년 대통령 선거과정이었다. 즉, 1967년 5월에 선거유세에 나섰던 박정희 대통령이 유세장에 많은 노인들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는 수행한 관계관에게 노령연금을 연구하여 노인복지를 강구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 지시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로 전달되었으며, 사회보장심의위원회에서는 홍창섭(洪昌燮) 당시 전문위원이 이 지시이행 책임을 맡아 법안마련작업에 착수하였다고 한다. 홍창섭 전문위원은 당시 노령연금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여 「노령연금법안」의 초안을 마련하고 이를 유인까지 해서 보고하였지만, 이후의 국민복지연금법안 마련작업에는 이것이 반영되지 못한 채 사장(死藏)되고 말았다 ¹.

하지만, 노령연금제도의 본래 취지를 생각해 볼 때 1967년 당시에 대통령이 노령연금제도의 도입에 관련된 지시를 하였다는 것은 다소 의외의 일이다. 노령연금은 노인인구의 비율과 중요하게 관련되는 법인데 1967년 당시 우리나라의 노인인구 비율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표 1> 1960년대와 1970년대 노인인구 추이 – 생략

자료: 통게청. KOSIS 자료.

오늘날 우리나라의 65세 이상 노인은 438만명으로 노인인구 비율은 9.1%에 이르지만 1960년대 당시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비율은 지금의 1/3 수준이었다. 절대 수로 보아도 65세 이상 노인인구가 100만명을 넘은 것은 1973년이 되어서였고 1960년부터 1970년까지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은 2.9% 내지 3.1%로 약간씩 증가하고는 있었지만 큰 차이는 없는 정도였다. 노인인구가 비교적 큰 폭으로 증가하기 시작한 해는 1975년부터인데, 이 해에 처음으로 3.5%에 달했던 노인인구는 1980년에 3.8%, 1982년에 4.0%에 달하게 된다. 물론, 총인구 증가율보다는 노인인구 증가율이 더 빠르므로 이것이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체감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체감도만으로 노령연금이라는 장기보험제도의 도입을 지시했다고 설명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굳이 기간을 1960년부터 1975년으로 한정하여 보자면 노령연금은 1967년 보다는 1975년 이후가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 등이 반영되어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위원들이 1960년대 초반에 활발하게 내놓은 여러 보고서 등 정책연구문건에도 건강보험과 산재보험, 실업보험 등 단기보험제도는 포함되어 있지만 노령연금과 같은 장기보험제도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회보장심의위원회 위원들 역시 대부분 그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낮은 노인인구 비율과 보험제도에 대한 깊은 불신감², 낮은 피용율 등)을 고려할 때 노령연금과 같은 장기보험보다는 단기보험이 수용성과 실현가능성 면에서 더 나은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³.

현재 우리들은 왜 당시 대통령이 그 시기에 노령연금을 연구하라고 지시하였는지 그 자세한 배경은 알지 못하며 그것을 알 수 있는 자료도 없다. 다만, 노인인구 비율로 볼 때 노령연금제도의 필요성이 낮았다는 점을 생각하고 그 지시를 내린 시점이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이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노령연금 연구지시는 선거 승리를 위한 전략의 일환이었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1967년 선거는 여당이나 대통령으로서는 상당히 낙관적인 분위기에서 치를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연금연구지시를 선거전략으로만 보는 것도 반드시 타당하다고만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의 경우 노령연금제도의 연구 내지 도입에 관련된 초기 정책발의가 정책연구자들이나 정책실무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대통령에 의해서 처음 제기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이전에 사회보장심의위원회에서 발간한 각종 자료에 노령연금이 언급되고 소개되었으므로 노령연금 자체가 대통령에 의해 처음 논의된 것은 아니지만 제도화의 출발점은 대통령에 의해 제공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당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정책의 결정과정이 그만큼 후진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정책연구지나 실무자들의 합리적인 검토와 국민들의 의사표현을 바탕으로 한 민주적인 의견수렴과정을 거친 정책결정보다는 힘 있는 결정권자의 한 마디가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국민복지연금법 논의과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한 노령연금제도 도입 관련 연구가 한 차례 있은 후인 1973년 초 대통령의 연두순시 때 보건사회부와 경제기획원은 각기 노령연금제도에 관련된 계획을 수립하여 이 제도의 도입을 건의한 바 있다. 이 때 두 부처는 노령연금제도에 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거나 자료를 주고받은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건사회부와 경제기획원이 각기 연금제도의 계획을 수립한 것이 그 이전인 1967년에 있었던 대통령의 노령연금 연구지시로부터 어느 정도나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1967년의 노령연금 연구지시는 보건사회부 장관을 거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로 전달되었기 때문에 아마 대통령의 지시가 영향을 미쳤다면 그것은 보건사회부의 연금계획 수립에 더 많이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대통령의 1967년 지시에 따라 홍창섭 전문위원이 수립했던 「노령연금법안」은 그 이후의 연금계획 수립에 크게 반영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손준규 교수에 따르면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연금계획의 출발에 관련해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보건사회부에서는 노령연금은 오래 전부터 보건사회부에서 법제화를 추진해 오던 것이었다고 주장한 반면, 민재성(閔載成) 박사는 자신이 작성한 「우리나라 연금보험제도 수립을 위한 연구」라는 논문의 제목을 보건사회부가 따서 1973년도 신년 업무계획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보건사회부의 주장이 맞다면 이는 1967년의 대통령의 지시가 보건사회부의 연금계획 수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며, 민재성 박사의 주장이 맞다면 이는 당시 보건사회부가 수립했던 연금계획은 그 이전 홍창섭 전문위원이 작성했던 「노령연금법안」과는 다소 무관하게 수립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다.

보건사회부와는 별도로 연금계획을 보고한 경제기획원의 제도계획 착수과정은, 손준규 교수에 따르면, 한국개발원(KDI)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한국개발원의 박종기(朴宗淇) 연구위원은 원장과 함께 경제기획원의 새로운 사업으로 사회보장제도 수립을 건의키로 하고, 이를 위해 미국의 경제학자였던 피셔 폴(Fisher Paul) 박사를 초청, 사회보장제도에 관한 강의를 들었는데 이 때 폴 박사는 사회보장제도 중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제도는 연금보험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후 박종기 연구위원은 사회보장제도 중 연금보험제도의 도입을 경제기획원에 건의, 이것이 경제기획원의 1973년도 시책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두 부처는 별도의 과정을 거쳐 연금보험제도 도입방안을 작성케 되었는데, 이것이 1973년 1월 23일 보건사회부 장관에 의해 「국민복지연금법」이라는 이름으로 대통령에게 보고되었으며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보건사회부와 경제기획원, 한국개발원이 합동으로 작업하여 법안을 마련하고 1974년부터 시행하도록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국민복지연금은 본격적인 제도 수립작업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본격적인 제도수립작업은 실무소위원회의 법안마련작업으로부터 시작하였는데 당시 실무소위원회에서 법안작성의 책임은 민재성 박사가 맡았고, 민재성 박사는 이 작업을 사회보장심의위원회의 최천송(崔千松), 손창달(孫昌達), 안영수(安昶洙), 신선기(辛善基), 이광찬(李光粲), 이만구(李晩求) 위원들과 함께 하였다고 한다.

손준규 교수는 이처럼 연금보험 도입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게 된 배경으로 인구구조의 급속한 변화와 가족구조의 변화를 들고 있다. 즉, 인구구조가 피라밋 형에서 단지 형으로 급속히 변화하고 가족구조가 핵가족으로 변화하면서 중고령층의 고용문제 및 노령인구의 소득보장문제가 유발되었으며 핵가족화로 노인 부양문제가 사회문제화하였다는 것이다. 앞서 <표 1>에서 본 것처럼 노인인구의 절대수는 총인구보다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1973년에는 100만명을 넘어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1973년의 노인인구 비율은 3.2% 수준으로 이 정도의 노인인구 비율을 가지고 노인의 소득보장이나 부양문제가 ‘사회문제화’하였다고 진단하기는 부족하지 않나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는 오늘날보다 노인부양에 있어서 가족의 책임이 훨씬 더 강조되고 또 더 잘 이행되던 시기였으므로 1960년에 비해 눈에 띄게 늘어나지 않은 노인인구비율에 의해 그 때보다 경제적 형편이 더 좋아진 1970년대 초에 갑자기 노인부양문제가 사회문제화하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어렵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1973년에 국민복지연금법의 도입이 건의되고 또 법까지 제정된 배경은 무엇일까?

그 배경은 당시 마련된 국민복지연금법안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실무소위원회의 작업 후에 1973년 2월에는 보건사회부와 한국개발원이 각기 작성한 연금법안이 실무위원회에 제출되었는데 연두업무순시 때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은 기본적인 골격만 제시한 것이었지만 실무위원회에 제출된 두 법안은 적용대상과 보험료율 및 기금운용방향을 보다 구체화한 것이었다.

<표 2> 국민복지연금법안의 주요 내용 – 생략

대통령에게 보고된 내용은 개괄적인 것이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연금제도의 초기형태로서 크게 놀랄만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기본요강안은 조금 사정이 다르다. 우선 보건사회부가 마련한 안에서 보험료를 차등보험료로 제안한 점이 다소 특이하다. 오늘날 국민연금의 보험료는 비례제방식으로 보험료율은 모든 계층에 동일하지만 당시 보건사회부가 제안한 단계보험료는 차등보험료 방식으로서 계층에 따라 보험료율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기본요강안 중 더욱 놀랄만한 것은 경제기획원이 제시한 안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경제기획원은 복지제도의 적용범위를 되도록 좁히려고 노력하고 복지제도를 위해 재정을 염출하려 할 때에도 그 비용을 최소화하려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국민복지연금법안에 있어서만큼은 예외인 것 같다. 주무부처인 보건사회부조차 적용대상을 5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출발하여 단계적으로 확대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경제기획원은 야심차게도 전국민에게 그것도 단번에 적용하는 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보험료율은 보건사회부도 2% 정도를 예정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기획원은 무려 10%나 정해놓고 있다. 당시의 여러 정황을 놓고 볼 때, 경제기획원이 이렇게 한 이유는 재정방식에서 엿볼 수 있다. 재정방식은 적립방식이며 이에 의해 적립될 기금은 연금을 위한 기금이 아니라 중화학공업자금 기금에 적립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경제기획원이 국민복지연금을 도입하려고 시도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경제기획원이나 한국개발원은 노후소득보장을 위해 국민복지연금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중화학공업화를 위한 자금동원의 수단으로 국민복지연금제도를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경제기획원이 적용대상을 전국민으로 정하고 보험료율도 10%로 정한 것은 아마 당시로서는 내자동원을 위한 방편으로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었을 것이다(내자동원의 목적에서 보면 보건사회부의 안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이와 같이 내자동원의 목적이 뚜렷한 당시의 국민복지연금법안은 언론을 비롯한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였다. 제도도입계획이 발표된 후부터 자금동원의 수단으로 제도를 도입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으며 결국 국민복지연금법은 이 의문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당시 한국노총 등에서는 연금보험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저소득근로자의 임의가입을 수정하여 정부나 기업의 부담으로 저소득근로자들에게도 연금혜택을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점 등을 고려하면 모든 계층이 국민복지연금에 반대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민복지연금이 연금제도의 본래 취지에 맞는 요소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고 있었다면 국민복지연금은 당시로서도 시행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물론, 당시 정부가 노총이 요구한 대로 연금법을 개정할 의지가 있었는가는 별론이다). 하지만, 제도도입의 목적이 완전히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국민복지연금은 결국 시행되지 못하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국민복지연금은 석유위기가 없었더라도 시행되기 어려운 제도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설사 시행되었다 하더라도 커다란 반발과 불만에 부딪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주석

1)홍창섭 전문위원은 이 당시 「노령연금법안」 외에 「의료보험법 개정안」도 작성하였다. 「의료보험법 개정안」은 강제적용 방식으로의 개정을 골자로 한 것이었다. 홍창섭 전문위원은 이 두 가지 법안의 초안을 작성한 후 1970년에 사회보장심의위원회를 그만 두고 민간기업으로 직장을 옮겼다고 한다.

2)보험이나 금융제도에 대한 불신은 식민지 경험과 전쟁으로 인한 것이다. 해방 이후 개인저축은 사실상 사라져버렸고 한국전쟁과 그 이후의 전쟁복구과정의 혼란 등 으로 장기간의 가입을 요하는 보험제도는 보편화하지 못하였다.

3)초기 사회보장제도 연구에 참여했던 엄장현(嚴章鉉)의 「의료보험제도 도입에 관련된 제문제에 관한 견해 및 예비권고」(1960)이나 손창달(孫昌達)의 「사회보장제도 창시에 관한 건의」(1961)에는 사회보험을 단기보험과 장기보험으로 나누고 우리나라의 여건에는 단기보험이 알맞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또한, 손준규 교수에 의하면 사회보장심의위원회가 1962년에 「사회보장 5개년계획」을 작성한 바 있었는데 여기에도 노령연금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남찬섭 / 고려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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