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9 2019-06-03   4637

[복지칼럼] 화해의 권유, 폭력

화해의 권유, 폭력

 

김진석 서울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언제부터였을까? 내게 봄은 견뎌 내야하는 계절이다. 딱히 아픈 데도 없이 몸과 마음이 힘든 계절이 되어버렸다. 말이 열린 공간이지 비슷한 사람들만 모여서일까? 소셜미디어 상의 내 ‘친구’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 보인다. 봄이 오면 여기저기서 아파하는 소리가 들린다. 혼자만 끙끙대는 것도 아니고 그 신음소리가 열병처럼 퍼지고, 그러다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일마저 생긴다. 취중 포스팅과 이불킥각인 포스팅이 깊은 밤 올려졌다가 아침 해와 함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이 빈번하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와주는 3월의 따스한 봄볕이 긴 겨울 꽁꽁 싸매고 다니던 이들에게 안반가울 리 없다. 봄 햇살 따스하게 쏟아지는 처마 밑에 자리 잡고 오후를 보내는 시골 마당의 게으른 고양이마냥, 봄볕 따스하게 내리는 봄날 광장으로, 들판으로, 밝고 환한 햇볕을 찾아다닐 만도 한데 그러지 못한다. 버릇처럼 밖에 나와 기지개 한 번 켜고나면, 누가 볼 새라 해지기도 전 어두운 골방으로 바쁜 걸음을 재촉한다. 창밖의 봄볕이 이리도 환한데, 일상화된 무력함은 종일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렇게 쫓기듯 집에 돌아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력함인지 감당 못할 긴장인지 아리송해진다. 아마 내 깊은 곳 감당 못할 그 무엇을 알아챈 내 몸이 무력함이라는 방어기제를 작동시킨 것인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다. 징징거리고 싶지 않은데….

 

“이거 왜 이래?”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이쯤해서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은데 쉽지 않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생기는 이 열병은 고질적인 계절성 알러지 탓도 있겠지만, 그 뿐만은 아닌듯하다. “이거 왜 이래?” 이런 외마디가 예상치 못한 자의 입을 통해 불화살처럼 날아오는 것을 보는 순간, 모든 게 다 어그러진다. ‘그냥 알러지 탓일 게야’라고 자위하며 겨우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는데, 이런… 다 틀렸음을 직감한다.

 

4월과 5월은 그냥 이런 식이다. 4월 3일 제주에서, 4월 16일 안산과 남녘의 작은 항구, 그 날의 그 바다에서 사람들이 많이 아프다. 5월 광주는 이미 아픔 속에서도 애써 눈물을 감추는 데 익숙해진 듯하다. 이 계절이 아팠던 것은 최근의 일만이 아닌 듯하다. 이 시기에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앞당겨 쓰고 산화해갔고, 지금 살아남은 자들의 추모 행렬이 마석으로, 망월동으로, 어느 납골당으로 이어진다.

 

끝을 헤아릴 길 없는 아픔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 앞에서 우리는 눈물마저 부끄러워 속으로만 아프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고 아픔을 나누며 아슬아슬하게 버텨가는 그 때, 가장 어두운 골방에서 숨조차 죽이고 있어야 할 학살자의 입에서 “이거 왜 이래?” 외마디 호통이 터져 나온다. 겨우겨우 가라앉히고 다스려오던 슬픔은 그 순간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되어 삐져나온다. 이 봄도 틀렸다. 싸우자.

 

용서와 화해의 조건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되겠습니까?’라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일흔 번씩 일곱 번’(인지 ‘일흔 일곱 번’인지 불명확하지만 여하튼 훨씬 더 많이) 용서하라는 가르침을 내놓았단다. 2000여 년 전의 그 유명한 제자와 스승이 어떻게 결론을 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오늘 대한민국에서 인간계를 살아내야 하는 내가 수용하기 쉽지 않다. 한 때 유대인 탄압에 의해 모국인 프랑스에서 교수직과 국적조차 박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는 용서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전제될 때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 처벌의 전제가 되는 사실관계에 대한 흐트러짐 없는 규명과 상호간의 인정, 이 과정이 전제되었을 때에조차 용서는 ‘가능’할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용서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가해자에 대한 처벌은 고사하고,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여전히 불명확하고, 그래서 모두가 수긍할 만한 그 무엇도 없는데, 그래서 위에 언급한 프랑스 철학자의 말을 따르자면 용서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마련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고, 화해를 하란 말인가? 심지어 이미 가해자로 밝혀진 이들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데, 오히려 그들이 ‘이거 왜 이래?’라며 호통치는 마당에 용서와 화해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필시 인간계를 사는 존재가 아님이 분명하다.

 

강제된 화해와 용서, 그리고 폭력

또 다른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물리적 강제뿐만 아니라, 대화와 설득을 통해서라 할지라도 다른 사람을 자신의 의지에 따르게 하는 것도 폭력이라고 정의한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반복해서 권유하는 행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주입하는 행위, 그 모양새가 어찌되었든 본질적으로 그러한 행위는 폭력적이라는 말이다. 나는 아닌데 그게 좋은 거라고, 그게 네 가족과 친구를 위하는 길이라고, 그게 네 이웃과 국가, 역사를 한 걸음 앞으로 나가게 할 거라고, 끊임없이 권유하는 것, 그것은 폭력이다. 하물며 내가 피해자인데 용서해야할 구실을, 이유를 찾지 못했는데, 이제 그만 잊으라는 말, 이제 그만 흘려보내라는 말, 이 모든 것은 단연코 폭력적이다. 그렇게까지 그 가족과 친구가 걱정이 되거든, 이웃과 국가의 미래와 역사가 걱정이 되거든,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낼 궁리와 노력을 하라.

 

 

일본 제국주의, 제주, 세월호, 광주…. 우리 역사가 품고 있는 생채기들 어느 것 하나, 아무리 시간이 지난들 용서와 화해는 전혀 당연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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