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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21
  • 2021.02.01
  • 123

임신중지 비범죄화, 재생산정의를 위한 중요한 진전
- 낙태죄 폐지 운동의 의미와 향후 과제 

나영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2018년 9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지 권리를 위한 국제 캠페인 International Campaign for Women’s Rights to Safe Abortion’ 주최의 국제포럼에는 120여 개국 활동가들이 모였다. 3일 동안 열린 이 포럼의 핵심 주제는 임신중지 약물을 이용한 SMA(Self Managed Abortion: 의료진의 적절한 지원하에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관리하며 진행하는 임신중지),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 각국의 맥락에 따른 낙태죄 폐지 투쟁의 사례 공유였다. 이 중에서 둘째 날의 핵심 주제였던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는 이전까지 ‘합법화’를 중심으로 생각해 왔던 틀을 완전히 깰 수 있게 해준 자리였다. 지난 40여 년에 걸쳐 여러 국가에서 임신중지의 합법화가 이루어져 왔지만, 형법상의 처벌 조항을 유지한 채로 임신 주수나 임신중지 사유에 따른 제한적인 허용 조건을 만드는 방식이었고 이제는 그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을 이끌어냈고, 2020년 10월이 되어서야 각국의 합법 화 법률 조항 중 최악의 사례들만을 모아 조합한 정부의 졸속 개정안을 막아내고 끝내 비범죄화를 이뤄냈다. 1988년 이후 비범죄화를 유지하고 있 는 캐나다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형법상의 처벌 조항을 무력화시키고 비범죄화를 이뤄낸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 중요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 하는지, 이를 토대로 이제부터 새롭게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제대로 주목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합법화가 아닌 비범죄화, 무엇이 다른가

합법화라는 것은 사실상 ‘국가가 허락하는 임신중지’라고 할 수 있다. 법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임신중지를 한다는 것은 임신중지의 정당성을 입증 하고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신의 유지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상황, 차별적이고 불평등한 상황들을 국가와 사회 가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고 지원 체계를 만들어 나가는 대신에, ‘해도 되는 임신중지’와 ‘해서는 안 되는 임신중지’의 기준을 나누어 개인에게 그 책임 을 전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국가는 어떤 임신 중지를 ‘해도 되는’ 것으로 인정하는가. 가령, 태아 에게 장애나 유전적 질병이 있는 경우 혹은 한국의 모자보건법처럼 부모에게 ‘우생학적, 유전적’ 장애나 질병이 있는 경우 국가는 이를 ‘해도 되는 임신중지’로 규정한다. 장애와 질병에 따른 삶의 조건을 변화시키며 지원 체계를 마련하는 대신 국가의 규 정에 의해 ‘마땅히 임신중지를 할 만한 사유’로만 남는 것이다. 허용사유에 ‘사회경제적 사유’를 추가한다 해도 마찬가지이다. 국가가 해야 할 역할은 인정할만한 사회경제적 사유가 있으면 허용하 고, 그렇지 않으면 처벌하여 인정받을 만한 사정을 입증하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그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상황들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결국 ‘사회경제적 사유’의 허용은 국가가 베푸는 관용이 아니라 단지 차별적 상황의 유지일 뿐인 셈이다. 처벌과 허용의 방식이 유지되는 이상 여성들은 차별적 상황에서 언제나 스스로를 입증 해야 한다. 성폭력에 의한 임신인 경우에도 합법적 인 임신중지임을 승인받기 위해 이를 입증해야 하 고, 건강이나 생명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도 그 심각성에 대한 판단을 똑같이 처벌 위험을 안고 있는 의료진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이런 상 황에서 의료인은 자신이 처벌받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대신 여성을 고발하고, 시술 도중 심각한 문제가 생겨도 방치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심각한 후유증을 남기기도 한다. 

 

합법화의 조건하에서 접근성을 제약하는 방식도 가지가지다.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병원의 시설이나 의료진의 자격을 아주 제한적으로 설정하여 접근성을 제약하기도 하고, 배우자나 부모 등 제3자 동의 의무 조항을 두거나, 의무 적인 상담 확인, 의무 숙려기간을 두어 몇 차례나 다시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상황을 만들기도 한다. 모로코의 경우 임신중지를 허용하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성관계하는 것이 불법이기 때문에 비혼 여성의 임신과 임신중지가 그 자체로 처벌 대 상이 된다. 2018년 임신 12주까지 합법화를 이룬 아일랜드의 경우 주수 제한과 상담, 숙려기간 의무 조항으로 인해 한차례 병원을 찾았다가 3일의 숙려기간 이후 다시 병원을 방문했을 때 처음 만났던 의사와 달라 다시 처음부터 과정을 반복하다가 12주를 넘기게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제약들로 인해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시기만 늦어지는 것이다. 

 

임신 주수로 제한을 두는 방식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계속되어 왔다. 프랑스는 1975년 임신 10주까지 임신중지를 합법화했고, 2001년부터는 임신 12주로 확대했지만 최근 보고서에서 여전히 연간 5천여 명의 여성들이 주수 제한으로 인해 다른 나라로 가서 임신중지 시술을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림 1-1> 임신중지 비범죄화 운동을 하며 유산유도제를 공식 의료 체계에서 구할 수 없는 국가의 여성들에게 유산유도제를 보내주고 있는 단체 Women Help Women에서 한국의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축하하며 sns에 올린 이미지vF9Ays0lfJfUqZIkroCAzK9lODIR0FSUmjqBtfJa

 

주수에 제한이 없으면 후기 임신중지가 늘어날 것이라는 주장은 사실상 임신중지 상황에 대한 무지일 뿐만 아니라 여성의 삶과 판단 역량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1988년 이래 비범죄화를 유지하고 있는 캐나다의 사례는 임신중 지가 결국 보건의료 역량과 사회적 지원의 문제이 며, 처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임신중 지 접근성을 높여나가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고 좋은 방향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에 맨섬, 호주의 퀸즐랜드 주, 뉴질랜드 등 최근 임신중지 관련법을 개정한 나라들은 모두 처벌 조항을 없애고 비범죄화를 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만약 지난 10월 정부가 내놓은 개정안대로 법안이 통과되었다면 한국에서도 임신 14주라는 시기를 놓친 여성들은 임신중지를 하기 위해 상담기관을 찾았다가 확인서를 받고 24시간을 기다려 다시 병원을 방문한 후 의료진이 시술을 거부하면 다시 상담기관으로 가야 하는 상황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정부는 그 정도면 어느 정도 타협이 될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이미 세계는 합법화의 틀을 넘어서고 있으며, 오랫동안 ‘낙태죄’의 문제를 몸소 겪어 온 한국의 여성들 역시 합법화 수준의 인식을 뛰어 넘은 지 오래다. 합법화는 불평등과 차별을 공고히 하고, 권리가 취약한 이들을 오히려 더욱 권리 에서 멀어지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함께 공유하며 타협 없이 싸운 결과, 우리는 비범죄화를 이뤄냈다. 이제 다음 단계는 이 토대 위에서 실질적인 재생산정의를 이뤄나가는 일이다. 

 

누구도 뒤에 남겨지지 않도록, 재생산정의를 실현하기 

“부자는 낙태하고, 가난한 이들은 죽는다” 아르헨티나의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에서 외쳤던 구호이자, 많은 사람이 함께 부른 노랫말의 가사이다. 이 구호는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과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의 제약이 실질적으로 누 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명확하게 드러낸 다. 그래서 2005년부터 계속되어 온 아르헨티나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의 중요한 요구는 “안전하 고, 합법적인, 무상의” 임신중지를 보장하라는 것 이었다. 수많은 노동조합과 농민 조직, 다양한 사 회운동 조직들이 임신중지 합법화 운동을 사회정 의를 실현하기 위한 운동으로 인식하고 수백만의 사람들을 조직하며 이 운동에 함께했다. 

 

한국의 ‘낙태죄’ 폐지 집회에서는 “낙태가 죄라면 범인은 국가다”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 구호는 2016년 10월 보건복지부가 임신중지 시술을 비도 덕적 의료행위의 목록에 넣고 의료인에 대한 자격 정지를 강화하는 의료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한 후 진행된 첫 기자회견에서 장애여성공감 부설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숨]의 조미경 소장이 발언한 내용이 계기가 되어 외치게 된 구호이다. 조미경 소장은 저출산 해결을 위해 ‘낙태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겠다는 국가가 오히려 지금까지 인구관리 목적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통제하고 모자보건법을 통해 장애여성의 임신과 출산은 선별해 왔음을 규탄했다. 국가는 마치 대단한 생명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낙태죄’를 내세워 왔지만 처벌과 허용의 테두리에서 불평등과 차별의 현실을 전가하고 생명을 선별해 온 것은 국가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처벌이 강화되면서 건강과 생명을 잃은 것은 취약한 위치에 있는 여성들이었다. 2012년 8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합헌 결정 이후 그 해 11월 임신중지 시술 도중 사망한 19세 여성 의 경우가 그러했다. 드러나지 않고, 말할 수 없었던 사례들은 훨씬 더 많았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임신중지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모든 과정은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었다. 여전히 많은 이주 여성들은 거주 요건과 의사소통의 장벽에 가로막혀 본인의 의사가 아닌 남편이나 시부모의 의사에 따라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고, 한국인 남편이 아닌 경우 출생신고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알음알음 정보를 찾아 임신중지를 하거나 태어난 아이를 우여곡절 끝에 본국으로 보내고 있다. 

 

이제 우리는 처벌과 허용의 틀을 넘어, 생명권과 결정권의 이분법을 넘어, 성적권리와 재생산권리를 둘러싼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을 바꿔나갈 재생산 정의 운동의 국면에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67년 동안 유지되어 온 형법상의 ‘낙태의 죄’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첫해인 2021년은 그동안 처벌로서 가려져 왔던 수많은 불평등을 드러내고 본격 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할 중요한 시작점이 될 것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 요구하고 있는 유산유 도제의 도입과 건강보험 적용 요구 또한 단지 임신중지를 쉽게 해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가장 취약한 조건에 있는 이들에게까지 안전한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과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이다. 

 

<그림 1-2> 각국의 임신중지 비용 지원 현황 표  ZbSmqOlFrLG6flHClIsrAMp0jpME_1axRAN_-E2s

※ 출처: 윤정원, ‘임신중단 접근성 강화를 위한 보건의료체계 구축 방안’, <낙태죄 폐지 이후, 정책ㆍ입법 과제>,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단과 재생산권 보장을 위한 긴급 토론회 자료집, 2020. 12. 30

 

유산유도제의 도입은 병원에 자주 찾아갈 수 없는 이들이나 시술 비용이 부담되는 경우 등 사회경제적 제약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며, 특히 지금과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는 각국에서 유산유도제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건강보험 역시 현재 병원마다 천차 만별인 의료비와 주수에 따라 심각하게 고액을 요구하는 상황 등을 바로잡고 병원비로 인해 좀 더 이른 시기에 보다 안전한 임신중지 시술을 못 받게 되는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이미 34개 국가에서는 정부나 공공기관, 건강보험 재원으로 임신중지 비용을 전액 지원하고 있고, 25개 국가에서는 상황에 따라 일부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의료인들의 인식을 바꾸고 다른 보건의료 서비스와 마찬가지로 1차 의료기관에서 3차 의료기관까지 체계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라는 것, 지역의 보건의료 인프라를 확대하라는 것도 앞으로 계속해서 요구해 나갈 과제이다. 또한 제3자가 아닌 임신 당사자가 직접 정보 와 설명을 듣고 동의할 수 있도록 관련 지원 체계를 마련해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 특정 연령이나 장애를 이유로 무조건 제3자의 동의를 요구하는 것은 명백한 자기결정권의 침해라는 사실을 인지 해야 한다. 당사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동의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은 의료인의 의무이다. 당사자의 동의 역량을 높여나가기 위해, 다국어, 그림, 점 자,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된 자료 등 다양한 정보 자료와 다국어, 수어 통역 등도 마련되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앞으로 해나갈 재생산정의 운동의 목표는 단지 임신중지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 것에만 있지 않다. 장애, 질병, 연령, 인종, 국적, 혼인 여부, 가족상태,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지역, 학력, 소득 등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으로 인 해 성관계, 성건강, 피임, 임신, 임신중지, 출산, 양 육에 통제나 제약을 받지 않을 사회를 만드는 것, 교육과 노동 현장에서의 권리 침해, 주거권이 보장 되지 않는 상황들에 함께 개입하여 삶의 권리를 지 켜내는 것, 환경 파괴와 개발로 인해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그 결과가 돌아오는 것을 막아내고 함께 싸우는 것 또한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우리 운동의 목표이다. 

 

그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위해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는 지난해 「성ㆍ재생산 권리 보장 기본법(안)」과 「상담자와 의료인을 위한 임신중지 가이드북 ‘곁에, 함께’」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들은 밑불에 불과하다. 이 제 사회 각 영역의 운동과 촘촘히 요구를 연결해 나가며 실질적인 재생산정의 운동을 만들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새로운 시작이다. 함께 이뤄낼 일들, 변화를 만들어낼 일들이 많기에,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의 투쟁으로 이루어 낸 비범죄화의 토대 위에서 펼쳐나갈 일들이기에 곧 다가올 봄처럼 설레는 시작이다.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이 설레는 변화에 함께 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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