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1 2011-02-10   1186

[동향4] ‘여기, 사람이 있다’는 외침으로 남은 용산참사

박래군
용산참사진상규명 및 재개발제도개선 위원회 집행위원장


  2009년 1월 20일 어둠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서울 용산구 한강로에 위치한 남일당 건물 위에서는 학살이 일어났다. 대한의 추위 속에서도 강행된 철거민들의 망루 농성에 대한 강제진압…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물대포가 망루를 공격했고, 특공대는 계단을 통해 망루로 진입하고, 컨테이너 박스를 통해 공중에서 망루를 공격했다. 그 안에는 철거민들이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마지막 저항을 하고 있었지만, 워낙 드세게 공격하는 경찰 특공대에 밀려 망루 내 4층으로 올라가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던 중 불길이 치솟았고…결국 그곳에서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불에 새까맣게 타서 죽어 내려왔다.
  불길이 망루를 뒤덮을 때 현장을 중계하던 인터넷 방송 진행자는 외쳤다. “어, 어, 저기 사람이 있어요.” 그 안타까운 외침…2년이 지난 뒤에 들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는 그런 절규였다. 그 절규는 용산참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남일당 앞 농성장과 서울 시내 곳곳에서 열렸던 추모대회와 행사 시위에서 대표적인 구호로 자리 잡았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그 외침, 나는 용산참사를 그 외침으로 기억한다. 여전히 전율하게 하는 그 상황, 사람이 있음에도 오로지 조기 진압에만 혈안이 되었던 악귀 같던 경찰들, 그리고 그 후에 진행된 사건에 대한 축소 은폐와 무시와 방관, 그리고 355일 동안 냉동고 속에 얼음으로 있었던 5명 철거민들의 시신, 그리고 2010년 1월 9일 치러진 장례식까지 그 한 마디 외침으로 기억된다.
  “여기 사람이 있다.” 이 말만큼 용산참사의 본질에 대해, 그로부터 드러난 이 나라, 이 사회의 현실을 웅변해주는 말이 있을까.


용산참사 현장은 철거되고…

  지난해 12월 1일, 이른 아침 시간에 남일당이 철거되었다. 남일당은 용산참사가 일어났던 현장이기도 하고, 장례가 치러지기까지 355일 동안 유가족과 철거민들, 그리고 신부님들을 비롯한 종교인들과 시민들, 그리고 활동가들이 끝내 지켰던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생명이 죽어간 참혹한 비극의 현장이었지만, 그 현장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먼저 정부는 이 현장은 자신들의 범죄를 증언해주는 곳이었기에 한사코 이곳에 사람이 모이고, 이곳에서 종교행사를 비롯해 추모행사를 갖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곳에는 경찰이 경찰버스를 대놓고 교대로 상주하면서 지켰다. 관한 경찰서인 용산경찰서는 그곳에 열리는 추모문화제나 기자회견마다 사사건건 집시법 위반을 이유로 방해내지는 침탈을 자행했다. 유가족이나 용산범대위 관계자들은 그곳에서 천막도 치지 못한 채 거의 1년을 그곳에서 노숙농성을 해야 했다. 천막을 치려 할 때마다 경찰은 득달같이 달려들어서 천막을 강제로 빼앗아가고 연행해가고는 했기 때문이다. 그곳이 좀 평화로운 장소로 바뀐 것은 신부님들이 상주하면서 생명평화미사를 매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6월까지는 거의 매일같이 신부님들조차 경찰과 용역에 맞고 난 다음에 온 평화였다. 그만큼 경찰이나 정부로서는 매우 예민하게 대응을 했기 때문에 치열한 전쟁터와 같았다.
  반면, 용산참사를 기억하고,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남일당은 반드시 사수해야 하는 그런 장소였다. 경찰들에게 침탈 당하고 용역들에게 폭력을 당하면서도 신부님들과 용산범대위 관계자들과 문화예술인들은 참혹한 비극의 현장을 성지로 탈바꿈시켰다. 매일 생명평화미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하고, 살벌한 철거현장을 미디어센터와 문화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남일당 주변은 꽃길이 조성되었고, 늘 언제라고 문화행사가 열리는 곳이었다. 그러자 시민들은 점차 남일당을 찾았고, 그 발걸음이 계절이 바뀌어도 계속 이어졌다. 이미 TV 화면 등을 통해서 용산참사를 접한 사람들은 이곳을 찾아와서 당시의 상황과 철거현실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그곳은 경찰과 정부, 보수언론의 끈질긴 방해에도 불구하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어가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의 연대가 비극의 현장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그런 용산참사 현장이 철거된 것이다. 그런다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각인된 용산참사의 그 상황마저 잊을 수 있을까? 아마도 용산참사는 남일당이 철거된 뒤에도 계속 기억될 것이고, 법원의 판결 여하와는 상관없이 잘못된 국가폭력의 구체적인 증거로 거론될 것이다.


그곳에 사람이 있었음을 기억한다는 것

  <경향신문>은 지난 1월 20일, ‘용산참사 2년,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는 제목의 사설에서 “용산참사는 세 가지 차원에서 현재 진행형”임을 역설했다. “용산참사는 본질적으로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나게 된 철거민들의 항의시위를 경찰이 무모하게 진압하다 생긴 ‘권력에 의한 시민 살해’”인데 법원은 이를 외면하고 철거민들의 죄만을 문제 삼았기 때문에 진상규명 요구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는 “세입자의 주거권과 생존권을 홀대하는” 재개발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남일당의 화염은 시민을 태워 죽이는 비정한 권력의 맨얼굴을 드러냈다.”면서 용산참사는 “정부란 무엇인지, 이 땅의 민주주의가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 있다.”고 지적했다. <경향신문>의 문제의식은 정확하다.
  용산참사를 대하는 정부와 여당, 사법부의 태도는 한 통속으로 꿰어져 있다. 사회적 약자인 철거민들을 주권자로 대하지 않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세입자들에게 불리한 재개발 제도가 불러온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철거민들은 ‘도심테러범’으로 규정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경찰 1명이 죽은 것에 대해서만 철거민들의 죄를 물었다. 그렇다면 거기서 죽은 철거민들은 누구란 말인가? 정부와 여당은 그들의 죽음을 외면했고, 그들이 망루라는 극한적인 상황에까지 갈 수밖에 없었던 점에 대해서는 애써 무시했다. 인권과 민주주의가 존중되는 사회라면 사회적 약자인 철거민들이 망루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사정과 심경을 헤아려야 했다. 법원도 증거법칙이나 공판중심주의 등의 원칙을 외면한 채 정부 여당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옹호하기에 거침이 없었다.
  결국 용산참사는 망루에 오른 사람들을 주권자로 보지 않으려는 세력과 그들을 적극적으로 존엄한 인간으로 보려는 세력 간의 대결의 장이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은 힘을 국가적인 차원의 힘으로 진실을 억누를 수 있고, 매도할 수 있지만, 인권의 법정에서, 역사의 법정에서는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다. 마치 과거 1970년대, 1980년대의 조작간첩사건들이 오늘에 와서 재심을 거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행히 사람들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았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제안한 범국민추모위원회에 2천5백 명 넘는 사람들과 130개가 넘는 단체들이 참여했다.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은 17일 철거지역 순회방문과 18일 강제퇴거금지법 토론회, 19일 용산 영화 상영회, 그리고 20일의 추모문화제에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었다. 강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이 용산참사 추모행사에 이토록 많이 참여하였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지금의 현실과 맞물려 있을 것이다. 이런 시민들의 열기로부터 민주주의의 복원을 위한 노력은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여기 사람이 있다”고 외칠 때

  전세대란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지 오래되었다. 급기야는 정부가 나서서 전월세 안정화대책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별로 달라질 게 없다. 국민은행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3개월 동안 전세 가격이 꾸준히 올랐고, 이사철도 아닌 겨울철에조차 전월세가 전년보다 훨씬 상승하고 있으며, 이사철인 오는 3,4월에는 절정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다. “전세가격 급등세는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도심에서 외곽으로, 중소형에서 대형으로, 아파트에서 연립·다세대 주택으로 도미노처럼 확산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조차 부동산 투기를 잡지 못하고, 토건자본의 이익 위주의 재개발 정책을 시행했고, 새로 건설되는 아파트도 중대형 위주로 개발하도록 용인했던 데 원인이 있다. 더욱이 이명박 정권에서는 뉴타운 정책이 시행되어 서울과 수도권 등 전국이 재개발의 몸살을 극심하게 앓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용산참사가 터진 것이다.
  용산참사는 다시 우리에게 “집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이란 점을 일깨워준다. 부동산 투기로 한 몫 잡도록 투기를 조장하고, 그것을 제도적으로, 공권력으로 보호까지 해온 우리 사회의 야만성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며, 이로부터 우리는 사회경제적 민주주의 없는 허약한 민주주의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는 용산참사 2주기 행사의 하나로 ‘강제퇴거금지법’ 제정 운동을 제안하는 토론회를 개최했다. 강제퇴거금지법의 제정은 강제퇴거는 ‘최종적인 수단’으로 강구되어야 하고, 재정착의 권리를 보장할 것 등 그 동안 유엔이 권고한 인권의 원칙에 입각한 내용들을 법안으로 정리한 것이다. 주거기본법은 아니지만 주거권을 기본권으로 보고 이를 보장하기 위한 당연한 규정들을 항목들로 정리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법률이 제정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지금의 소유권을 절대시하는 헌법재판소의 해석과 민법의 원칙들과 충돌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권의 관점에서, 집에 사는 사람을 중심으로 사고할 때는 불가능할 수만은 없고,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법률이다.
  2년이 지난 뒤에 용산참사는 무엇을 남겼을까? 구속된 철거민들은 4-5년의 징역형을 확정받아 수감 중이고, 용산범대위 관계자들 수십 명이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고, 부상자들은 10여 회씩의 수술을 받고도 영구장애를 입었고, 철거민들은 겨울철에도 철거현장에서 천막생활을 하면서 눈물겨운 철거반대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이런 참상을 그대로 두고 정의를 말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지 않겠는가. 거기에 “사람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도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답해야 하는 의무를 우리는 지니고 있다. 그래서 2년이 지났음에도 용산은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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