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4 2004-12-10   1148

[내가 만난 사람] 바람에 부치는 향기

짐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 곳 하월곡 산동네에 가득한 초겨울 정취가 마음을 더 애틋하게 합니다. 한여름밤, 매혹적인 아카시아향을 뿜어내던 산자락에선 스산한 단풍잎들이 흩날리며 내려 앉습니다.

철거때까진 머무르게 될 줄 알았는데 갑작스레 임대아파트 입주통보가 날아들어, 마음이 바빠지고 있습니다. 기껏 이 곳에 산지 일년밖에 안된 뜨내기주민인데 우리가족에게만 살 궁리가 생긴 것 같아 남겨진 이웃들에게 마음이 무겁습니다. 지난 일년은 제게있어 십년을 지낸듯 각별했습니다. 달동네에서의 삶은 제 인생에 있어서도 부활의 삶을 살게한 마음의 고향같은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벼랑에 선 심정으로 이 마을에 들어와 외줄타는 마음으로 아슬아슬 겨울을 나고, 착한 이웃들을 만나 에너지를 얻고, 갖은 희노애락을 함께하였습니다. 이 곳 이웃들과 가난한 삶을 함께하면서 삶의 버거움이 고통만이 아님을 몸으로 체험한 일 년이었습니다.

얼마전 저 자신도 잊을뻔한 저의 생일엔 이웃들이 맛있는 점심을 준비해주어 풍성한 잔칫상도 받았습니다. 가난한 덕에 얻은 따뜻한 이웃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가난과 아이들은, 삶에 있어서 어디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하게했고,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품앗이형 공동체는 내 자식을 나 혼자 키운다는 상식을 넘어, 공동체가 같이 키워낸다는 연대감을 갖게 했습니다. 피시방을 다니느라 밤이 늦은 아이들에겐 동네 어른들의 잔소리가 이어지고, 생활고로 어려운 이웃들에겐 여러 음식들이 십시일반으로 나누어 집니다. 이 마을에서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문명이 덜 발달되었던 고시대인들이 반드시 저급한 삶을 영위했던 것은 아니라는 도올 선생의 일갈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공감하게 합니다.

산동네 놀이방의 바쁜 일손때문에, 청소를 돕는다거나 아픈 아이들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일, 후원들어오는 빵배달을 하게 되면서 공동체에 보탬이 되는 제 존재의 가치에 대해서도 뿌듯한 보람을 느끼게 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국민 네명당 한명은 평균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한다는 통계를 들으며 이 어려운 시대에 한국인들도 한가구에 한사람씩 봉사하며 살아간다면 경제강국 한국에 앞서 선진 복지국가 한국이 성큼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갖습니다. 안타깝지만 지역 공동체가 미처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손길이 절실히 필요한 것도 사실입니다.

밤 12시가 되어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엄마를 위해 늦은밤 아이들을 돌봐줄 수 있는 손길 , 심리치료나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일하는 엄마를 대신해 동행해 줄 수 있는 손길, 몽둥이로 구타당하는 아이들을 구할 손길, 알콜 의존자를 도울 손길, 가정폭력에 피멍든 엄마들을 도울 손길등등, 모른 척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닌 여러 어려움들을 보면서 이런 어려움들이 해소되는 그런 날을 꿈꾸어 봅니다. 다행스럽게도 가난한 이들과 삶을 함께하고 계시는 이 마을 수녀님들과 수사님들이 이웃들의 영혼을 어루만져주고그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생산 공동체를 꾸려가시며 바느질 보조로 일하시는 루시아 수녀님, 동네어르신들을 위한 점심나눔일을 말없이 억척스레 꾸려가시는 벨라뎃다 수녀님, 아수라장을 만들어버리는 아이들의 놀이방을 도맡으신 아녜스 수녀님, 어르신들의 안부를 챙기고 마을을 위해 기도하시는 수사님들의 노고에, 더불어 산다는 것을 가슴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최저생계비 체험일정 이후로 그간 몇몇 체험단 가족이 다녀갔습니다. 충청도에서 진희씨가 놀이방아이들과 놀다갔고, 찬바람불던 며칠전엔 춘천에서 정섭씨와 민상씨가 다녀갔습니다. 다들 시험공부도 해야하고 할일도 많아, 결코 쉽지않은 그 귀한 시간에 이웃들을 위해 잊지않고 다시 찿아와 준 것에 다시금 고마움을 전합니다. 어르신들을 위한 불고기감과 과일상자들, 한겨울을 나게할 양말꾸러미들은 분명 그들에겐 무리한 지출이었을텐데도 불구하고 나는 이 젊은친구들의 마음씀에서 참으로 감동받았습니다. 오랜만에 산동네에선 불고기냄새가 요란했고 과일과 함께 어르신들에게 나뉘어졌습니다. 공부방아이들까지 챙긴 그들이 총총걸음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나는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떠날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전히 잊지않고 그리워해주는 이들이 있어, 마을사람들에게 이 겨울이 춥지만은 않을 것임을 믿고 싶습니다.

지금도 낙엽향내 가득한 이 곳 하월곡 산동네에는 가난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과 삶을 함께하는 우리의 이웃이 오롯이 마음을 나누며, 염화칼슘을 뿌리고 맞이할 긴겨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계영 /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 체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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