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3-12-04   1009

<김창엽의 건강세상만들기> 에이즈, 차별, 그리고 인권

“에이즈, 또는 사람들에게서 자책감이나 수치스러움을 끌어내는 특정 질병에 관한 한, 해당 질병 자체에서 이런 의미와 은유를 떼어내려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에게 위안을 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은유의 사용을 절제한다고 해서 은유를 멀리 떼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은유를 폭로하고, 비판하고, 물고 늘어져, 완전히 쓸모 없게 만들어야 한다.”

–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에이즈와 은유들(AIDS and Its Metaphors) 중에서 –

지난 12월 1일은 유엔이 정한 세계 에이즈의 날이었다. 수전 손택의 유명한 저술이 아니더라도 에이즈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진 병이다. 꼭 우리나라만 아니라 어느 나라든 비슷하다. 특별하다는 것은 문제의 심각성에서, 그리고 사회가 이에 대처하는 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에이즈는 198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가장 심각한 보건문제의 하나가 되었다. 지난 20여년 동안 세계적으로 약 6000만명 이상이 감염되었고 2200만명 이상이 사망했다. 지리적으로도 현재는 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이남지역이 최대 유행지역이지만, 10년 후에는 아시아 지역의 감염인 수가 이를 앞지를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우리나라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1985년 처음으로 감염인이 발견된 이후 98년까지는 새로 발견된 감염인이 연간 100명 안팎에 머물렀다. 그러나 1999년 이후 신규 감염이 매년 200명 가량으로 늘어나며 증가폭이 확대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국립보건원의 발표에 따르면 2002년 한 해 동안 400명의 에이즈 감염자가 새로 확인되었고, 올해도 9월말까지 398명이 새로 감염됐다. 그 결과 지금까지 국내 에이즈 감염인 수의 누계는 총 2400여 명에 이른다.

그러나 감염인의 상당수가 자신이 감염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실제 감염인 수는 공식 통계수치의 2∼10배에 이를 것이라는 주장이 많다. 밝혀지지 않은 감염인 수가 매우 많다면 우리나라도 감염인 수가 적다고 낙관할 수 없으며, 향후 감염이 급속도로 확산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한 감염경로 조사 결과 최근에는 국내 이성간 성접촉을 통한 감염이 가장 높은 것으로 밝혀져 에이즈가 일반인들로 확산될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 이는 그만큼 일반 국민들이 에이즈 감염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졌음을 의미한다.

에이즈에 대한 터무니없는 낙관도 문제지만, 과학에 기초하지 않는 공포와 이로 인한 차별이나 인권침해도 결코 작지 않은 문제다. ‘국제 에이즈의 날’을 전후한 언론보도에서 에이즈에 대한 오해는 꽤 소개가 되었으므로 그만 두자. 그러나 인권침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인권보장 수준과 맞물려 심각한 수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전염성 질환에 대한 전통적인 공중보건 정책은 감염인을 따로 떼어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법률에 부합되고, 공익의 합법적인 목적에 부합하며, 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동시에, 민주적인 방법으로 정해지는 등의 정당한 목적과 절차를 지킬 때를 제외하고는 허용돼서는 안된다. 이것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체적으로 1995년 4월 중국에서 UNDP(유엔개발계획)가 개최한 에이즈 관련 법률과 법개정 세미나에서 인권으로 거론된 내용들을 살펴보면, 법 앞의 평등, 살 권리, 건강권, 사생활의 권리, 결혼하고 가정을 가질 권리, 일할 권리 등 매우 포괄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현재 우리나라의 에이즈 관리는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에이즈 감염인에 대해 실명으로 관리를 해야 한다는 ‘압박’이 사회적으로 보편화되어 있으나, 이는 인권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관리의 효과 면에서도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한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실명관리는 효과가 거의 없는 것으로 되어 있고 이런 관리 방법을 고집하는 나라도 거의 없다.

현행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 의하면 감염인에 대해 의사 등이 신고 및 보고해야 할 의무가 있고(제5조), 시·도지사가 감염자 명부를 작성·비치하도록 되어 있다(제6조). 이는 검사에 의해 감염인의 실명이 공개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사생활 보호에 치명적인 장애가 될 수 있다.

감염된 경우에도 질병이 발병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리며, 특히 최근 복합요법의 발전으로 환자가 감염상태에서 장기간 별다른 증상 없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인권 차원이나 감염자 관리 측면에서도 계속적인 사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비밀을 철저히 보장해야 한다. 현행법에도 기밀유지의 의무가 있기는 하나 개인관리체계에서는 이를 완벽하게 지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많은 잠재적 감염인이 드러나기를 꺼려하고, 헌혈 등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감염 여부를 확인하려는 동기를 갖게 된다. 따라서 감염자의 신고나 실명관리보다는 상담을 통해 관리하는 것이 효과적이라 할 것이다.

강제 검진도 인권침해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후천성면역결핍증예방법에서는 위험집단에 대해 강제적 검진을 규정하고 있다(제8조 2항). 특정집단에 대한 에이즈 검사가 필요한 경우가 있겠으나, 특정집단의 범위를 어디까지 한정하느냐에 따라 그 범위가 남용될 가능성이 있다.

원칙적으로 에이즈 검사도 다른 의료적 진단처럼 의학적 적응증에 해당되고, 피검자가 동의(informed consent)한 경우에 한정하여야 한다. 현행법에서도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듯이 강제 검진에서 가장 중요하고 문제가 되고 있는 대상이 매매춘 종사자이다. 그러나 외국에서의 연구결과는 매매춘 종사자(sex worker)에 대한 검진의 의무화는 실제로 별 효과가 없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UNAIDS의 권고에 의하면 수혈 혹은 장기 기증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강제 검진은 국제인권법의 차별금지 조항을 위배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근 선진국에서 취해지고 있는 조치와 마찬가지로 고위험군, 특히 매매춘에 종사자에 대한 강제 검진 조항은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법률로 규정되어 있는 취업제한에 관한 사항도 한정된 범위라고는 하나 남용될 소지가 많은 조항이다. 특수업태부, 유흥접객원, 휴게음식점 영업 중 다방형태의 영업에 종사하는 여자종업원, 안마시술소 여자종업원 등이 취업제한 직종에 속한다. 그러나 에이즈 감염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대상자를 포괄하지 못하고 있고(비등록업체, 음성적 취업자 등), 남성 감염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여성을 주로 제한하는 것이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다. 인권 측면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강제 검진의 경우와 같은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무엇보다 에이즈 감염자에 대한 차별이나 사회적 배제는 제도적인 요인과 함께 사회·문화적 요인이 크게 작용한다. 특히 에이즈 감염은 주로 성행동(sexual behavior)과 관련된 질환이므로 사회적 의미 부여가 다른 질환과 크게 다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안전하지 않은 성접촉으로 인해 감염된 경우라 하더라도, 이들을 일방적으로 단죄하고 사회적으로 배제할 아무런 근거를 찾기 어렵다. 오히려 우리 사회의 이중적 도덕률과 허위의식, 왜곡된 성행동에 비추어 보면, 사회적 오명과 낙인은 에이즈 감염인에 대한 부당한 “희생양 찾기” 식의 사회적 반응이라는 혐의가 짙다.

우리의 에이즈 관리정책은 현재로서는 과학적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사회적 반응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식을 에이즈 감염인과 같은 학교에 보내겠느냐는 질문에 부정적인 답이 절반 이상이라는 사실, 그리고 모기가 에이즈를 감염시킬 수 있다는 어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에 이르면 우리 사회의 에이즈 인식이 ‘주술’의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경우에는 공중의 이익을 위해 일부 대상자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으나, 우리는 그렇지도 못한 형편인 것이다.

가능한 모든 과학적 근거를 종합해 볼 때, 드러난 에이즈 감염인만 철저하게 사회적 통제 속에 둔다고 해서 에이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이제부터라도 인권과 효용성이 동시에 보장될 수 있는 에이즈 대책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창엽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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