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1 2001-05-10   2887

탈시설화의 현실적 대안, 공동생활가정 (group home)

1. 왜 공동생활가정인가?

우리나라 아동복지정책은 '거꾸로 서있다'? 그렇다. 우리나라 아동복지정책은 카두신(A. Kadushin)이 분류한 바에 따라 표현하자면, 지지적 서비스(supportive service)는 없고 대리적 서비스(substitute service) 위주이다. 즉 가정내 개입과 지지를 통한 예방적 서비스는 없고 해체된 가정의 아동에게 시설보호를 결정하는 사후적 '행정조치'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거꾸로 서있다는 것이다. 가정내의 보호보다는 가정밖의 보호를, 예방적 보호보다는 사후처리적 보호를, 문제해결적 보호보다는 문제처리적 보호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폐단이 아동복지정책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대리적 서비스영역에서라도 적절한 양식을 실현하고 있는가? 이도 그렇지 않다. '시설보호'라는 전형적인 그리고 고전적인 보호양식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이미 1950년대 보울비(J. Bowlby)의 모성박탈론(母性剝奪論) 이후 탈(脫)시설화(de-institutionalization)로 자리잡은 구미선진국의 아동보호에서의 대전환이 우리에게 있어서는 요원하다.

분명 아동보호의 제일 원리는 가정에서의 보호이다. 아동의 원래 가정에서 보호하는 것이무엇보다도 바람직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원가정과 가장 가까운 환경 하에서 아동을 양육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 시설당 평균 74명의 아동이 기거하며(2000.12.31 현재), 12명 아동 당 1명의 보육사가 배치되어있고 50명 이상의 아동이 있어야 생활지도원과 임상심리상담원이 있는 현실 아래에서 이들의 심리적 박탈감을 채워주는 가정적 보호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또한 비록 소숙사(cottage)라는 이름으로 10여명의 아동들을 한 단위로 하여 독립된 생활공간을 마련해 준다하여도 이미 현관문을 나서면 마주하는 같은 처지의 원생들과 자신들을 둘러싼 큰 울타리, 예의 일반주택과는 다른 유별난 건물과 시설을 통해 이미 자신들의 색다른 처지를 자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면 이는 더 이상 가정적 환경이라 말할 수없다.

'보호자가 없거나 보호자가 양육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아동들에게 최선의 사회적 보호장치를 가동하고자 한다면 이들 하나하나를 대상으로 원래 가정에 복귀시키는 서비스를 행하거나 아니면 원가정과 가장 가까운 대리가정을 찾아주는 입양 혹은 가정위탁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것이 탈시설화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나 매년 7,000명이상(1999년 7,693명) 발생하고 있는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아동'에게 입양과 가정위탁을 연결해 주는 것은 우리 사회의 여건이 허락되지 않을뿐더러 단기간 내에 그 해법을 찾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탈시설화는 포기되어져야 할 요원한 것이며, 따라서 현재의 시설보호양식에 안주해야된다는 것인가?

바로 여기에 공동생활가정, 소위 그룹홈의 존재의의가 있다.

공동생활가정은 본래 지역사회 내 소규모 주택에 설치되어 5-10명 정도의 아동들이 부모역할을 하는 1-2명의 보육사와 함께 가정적 분위기에서 양육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가정보호와 시설보호의 중간위치에 놓여있는 것으로서, 부부관계를 이루고 있는 성인이 반드시 전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정보호와는 다르고, 시설장 및 총무, 다양한 직무를 지니고 일정한 행정관리체계를 이루며 운영되는 통상의 시설은 아니라는 점에서 시설보호와 구분된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현재의 시설이 지닌 최대의 문제점인 시설병(施設病)을 극복하는 데에 있어서 명백한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아동들에게 낙인감과 분리감을 최소화시킬 수 있음은 물론이고 대리모 또는 대리부와 아동간의 물리적 거리감은 물론 심리적 거리감이 훨씬 짧다는 점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동들의 정서적 안정감과 사회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정도가 일반 시설에서 생활하는 아동들에 비하여 긍정적이다(이태수 외, 소규모아동시설연구, 1997). 물론 보육을 담당하는 이들에 의해 아동의 보호상태가 크게 좌우되며 다양한 전문인력의 접근이 어려울 수 있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지만, 이를 모(母)시설이나 외부자원과의 연계로 보완하며서 최대한 일반가정아동과 유사한 방식으로 보호함이 우수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우리사회가 단기간내에 급속한 속도로 탈시설화에 대한 전망을 현실로 하기 어렵다면 그룹홈이 그 현실적 대안이 되겠다는 판단은 그리 어렵게 도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 공동생활가정, 현재 어디까지 왔나?

이러한 아동 공동생활가정은 1997년 보건복지부에서 5개로 시범사업을 시작한 것에서 공식적인 의미가 부여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5년이 흐른 2001년 현재 32개의 공동생활가정이 공식적인 예산지원 아래 운영되고 있는 상황까지는 와있다.

그렇지만 아동들을 위한 공동생활가정의 시작은 공식적인 영역에서의 움직임과 상관없이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사회에 자리잡아 왔다. 1970년도에 서울의 예수 그리스도의 집이 시작되었는가 하면 천주교 살레시오회에서 나눔의 집을 시작한 것은 1986년이었다. 이렇게 민간영역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된 아동 공동생활가정은 1990년대 후반들어 무허가시설의 존폐 논란과 사회복지사업법 상의 시설신고제 도입과 맛물려 사회적인 관심사로 대두됨은 물론 사회복지계의 핵심논의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1996년 당시 연구조사(이태수외, 소규모아동시설연구, 1997)에서 45개 560여명으로 추산되던 공동생활가정의 전체 규모는 이후 급속도로 늘어난 것으로 보이며 2001년 4월 현재 <표>에서 보는 것처럼 전국적으로 118개소, 1,200여명의 아동이 존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이 표에서 제시하는 숫자는 공식적인 통계라기 보다는 민간종사자 또는 연구자들에 의하여 취합된 정보에 기초하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생활가정내에 20명이 넘는 아동이 생활하는 곳도 있고 주택가가 아닌 독립가옥 형태를 지닌 것도 있어 공동생활가정의 정의를 정확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규모는 축소될 여지도 있다.

<표> 공동생활가정의 지역적 분포(2001. 4. 현재 추정치)

지역 개소(%) 지역 개소(%)
서울 40 (33.9) 강원 6 (5.1)
부산 10 (8.5) 충북 3 (2.5)
대구 1 (0.9) 충남 – (-)
인천 4 (3.4) 전북 5 (4.2)
광주 7 (5.9) 전남 1 (0.9)
대전 2 (1.7) 경북 6 (5.1)
울산 1 (0.9) 경남 7 (5.9)
경기 25 (21.2) 118 (100)

그렇지만 현재로서 공식적인 육아시설보다는 모두 그 규모가 작고 나름대로 가정적인 보호양식을 추구함을 표방하며, 허락된다면 좀더 작은 규모의 시설을 지향하는 면모가 강하게 존재한다는 면에서 인위적인 기준으로 함부로 재단하기 어려운 면을 고려한다면 이 통계를 그대로 이용하는 것이 현실의 규모를 크게 왜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재 이들 118개의 그룹홈은 정부에 의해 운영비 지원을 받는 공식적인 곳과 비공식적인 곳으로 나뉠 수도 있으며, 운영자의 성격에 따라 법인이 운영하는 곳과 비법인, 즉 단체 및 개인이 운영하는 곳으로 나뉜다. 또한 한 단체나 법인이 여러개의 공동생활가정을 통합적으로 관리·운영하는 센터형과 그렇지 않은 단독형이 있으며, 받아들이는 아동들의 성격에 따라 장기적인 양육형과 단기적인 쉼터형, 그리고 학대아동을 보호하는 학대아동형, 시설의 분원형태로 이루어지는 분원형 등 다양하다.

사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공동생활가정이 대부분 정부의 관심과 행정적 지원·감독의 틀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로부터 아동의 인권에 대한 침해 사례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으며 종사자의 전문성에 대한 담보가 이루어지지 않을뿐더러 빈약한 재정속에 아동의 양육상태가 양호하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동복지시설의 단조로운 종류와 그 운영원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경직된 입소조치와 행정감독을 생각할 때 이러한 민간의 공동생활가정의 존재는 결코 일방적으로 무시되거나 부정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이는 그간 이러한 가정적 보호양식인 공동생활가정 양식을 허락하지 않은 채 중대규모 위주의 아동복지시설정책이 온존되어온 데 따른 필연적인 결과물이며, 이런 점에서 민간영역이 오히려 공공영역의 취약성을 보완하며 선도해온 전형적인 예라고 평가해야 한다. 즉, 이러한 비공식부문의 엄존은 그만큼 공식부문의 한계를 반영한 것이다.

3. 공동생활가정, 어떻게 해야 하나?

공동생활가정이 현재 정책의 사각지대에 방치됨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몇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야 할 것이다.

먼저, 정부의 정책 기조의 변환이다. 현재 아동복지시설은 개정 발효된 법률에 의거 공동생활가정사업을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시설에 분원의 형태로 공동생활가정을 설치할 수 있도록 됨으로써 이 점을 적극 활용 기존시설의 아동들을 분원형태의 공동생활가정으로 보호공간 및 보호양식을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때 기존 양육시설의 공동화(空洞化)는 두가지로 해소할 수 있다. 첫째는 보육사 1인당 보호아동수를 줄여나감으로써 기존 소숙사의 폐쇄 내지 유휴화가 아닌 오히려 바람직한 적정 보육양식에 접근해 갈 수 있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다. 둘째, 복합시설화하여 일시보호나 방과후 지도, 상담사업 등을 전개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여 지역사회에의 개방은 물론 이용시설로의 탈바꿈을 하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이러한 기존시설이 공동생활가정을 적극 도입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 것에 그칠 수는 없다. 기존의 비공식영역에 있는 공동생활가정의 공식화를 위한 제반조치를 강구하여야 한다. 현재 아동복지법에서 이를 부대사업으로만 규정하여 시설로서 인정받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포기할 수 있지만, 동법 시행규칙에 있는 시설기준에 관한 규정을 적절히 개정하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즉, 현재 시행규칙 11조 [별표 2] '아동복지시설의 설치기준'에서 시설의 규모를 상시 10인으로 한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5인이상부터 10인정도의 규모를 공동생활가정로 가름한다는 단서를 단다면 공식화의 법령상 근거는 마련된다고 하겠다.

이와 함께 공동생활가정에 대한 별도의 설치기준을 규정하고 지침에서 이를 좀더 자세히 다룰 수있다. 아니면 근본적으로 아동복지법에서 공동생활가정시설을 명문화하는 방법을 모색할 수도 있다. 이미 장애인복지법에서는 이러한 공동생활가정시설을 시설의 한 유형으로 명시함은 물론 이에 걸맞는 차별적인 설치·운영규정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좋은 전거라고 할 수 있다.

결국은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입안자의 식견과 의지의 문제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재정상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장애인분야에서 이를 시설의 범주에 포함하여 시행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다면 중앙행정부처내의 장애인담당부서와 아동담당부서 담당자들의 자질이 문제라는 말인가?

그렇지만 한편으로 보면 행정부서의 결정과 의지보다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실제 아동복지의 현장에 활동하고 있는 인력들의 자세와 의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현재처럼 신고시설운영자들이 공동생활가정의 도입에 소극적이며 나아가 일부 운영자들처럼 비공식부문의 공동생활가정 운영자들을 영역을 침범한 비전문가 정도로 인식하고 공동생활가정의 확산에 부정적인 자세를 보인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미신고 공동생활가정에서 역시 본인들의 운영원리와 방식에 대해 폐쇄적인 합리화를고집하는 한편 이를 공식적인 기반위에서 투명하고 공적(公的) 위상을 지닌 상태에서 운영하려는 움직임에 둔감한 채 비공식적이고 고립적이며 자족적인 운영에 머문다면 이들이 지금까지 가꾸어 온 공동생활가정의 경험적 지식은 확산되기는커녕 매장되고 말 것이다. 현재 한국아동·청소년그룹홈협의회를 통해 시도되고 있는 공동생활가정들 간의 교류와 정책적 자리매김을 위한 노력이 주목받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행스러운 일은 일부 사회복지지원법인에서 공동생활가정의 의미를 확산시키고 이에 대한 적절한 모형을 모색하면서 정부의 정책의지를 끌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 이 시점은 해방 이후 근대적인 아동복지사업이 이루어진 지 50년이 지나서도 아직 중대규모 아동시설보호양식을 벗지 못하고 있는 이땅에, 이제 탈시설화를 지향점으로 선언하면서 입양과 가정위탁의 활성화를 도모해나가는 한편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아동공동생활가정사업을 적극 제도화하는 구체적인 노력들을 민과 관 모두에게서 혁신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하는 때이다. 그래야 적어도 이땅의 아동에게 최후의 보루로서 제공되는 사회적 장치가 그들의 미래를 잠식해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태수 /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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