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5 2005-08-10   923

‘노숙인’은 우리의 이웃인가?

한국에서 홈리스의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 1997년부터 1998년의 시기이다. 다들 아는 것처럼 돈을 꾸어다가 국가의 경제를 지탱하게 되면서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이 그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사람들인 홈리스들은 사회적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초기의 동정의 시각이 이제는 비난하는 시각으로 바뀌어 가고, 그래서 뚜렷하고 근본적인 정책을 세우기는 더디고, 보수 언론의 시각과 이 시각을 진리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들이 ‘더럽고, 게으르고, 위험하고, 선량한 시민을 불편하게 하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 더구나 이제는 초등학생까지 더럽거나, 나쁜 사람을 지칭하는 용어로 ‘노숙자’라는 말을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약한 소수자인 홈리스는 보살피고 보듬어 안아야 할 사람들이기 보다는, 원인이야 어떻든 보이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사회복지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가난한 아동, 노인, 장애인 등의 정책대상에 대한 온갖 정책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홈리스에 대한 대책은 아직도 이런 시각 때문에 더디게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홈리스를 돕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당사자들에게 지속적인 절망을 안겨주고 있다. 불쌍해서 도와야 하는 사람들이기 보다는 ‘도와주면 안 된다’는 시각이 우리 사회 일반을 지배하고 있다.

국가복지체계 부실이 문제!

1997년 말의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1998년 초에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역을 비롯한 전국의 주요 역에 몰려들었고, 그들을 위한 민간의 응급 구호가 시작되었다.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들이 나서서 어찌 할 수 없는 그들에게 최소한의 밥을 제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 중앙정부의 요청과 이를 바탕으로 현재의 쉼터 체계가 만들어진다. 전국실직노숙인대책종교시민단체협의회는 자발적으로 이 일에 나선 종교ㆍ시민단체들이 생명을 살리려는 열정을 가지고 조직한 단체이다. 이어 중앙정부와 협력하여 전국의 쉼터를 설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1998년에 전국적으로 쉼터를 축으로 하는 홈리스 응급구호 체계가 만들어졌고, 이를 바탕으로 전국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후 민간의 네트워크를 통해 궁극적인 목표인 지역정착을 위하여 어렵지만 지역자원을 확보하는 일을 지속해왔고, 장ㆍ단기 정책 수립을 위해 지원기관의 의견을 수렴하면서 쪽방상담소, 드롭인센터(거리생활자 이용시설), 자활사업, 주거지원, 의료체계 개선, 크고 작은 제도들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우리의 힘만으로는 여전히 이들을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이 갈수록 어렵게 느껴진다. 다른 사회복지 영역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소수자의 영역은 사회적인 인식의 문제와 그들을 돕는 영역의 잘못을 침소봉대하는 언론의 시각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비추어지고, 따라서 절박하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생명의 위협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을 돕는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문제는 일차적으로 국가복지체계 부실의 문제이다.

노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는 것들

초기의 관심과 달리 홈리스(굳이 우리나라에서는 노숙자, 노숙인으로 부른다)는 이제 사회악으로 고정되어가고 있다. ‘홈리스’는 경제적인 원인에 의해 머물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거리에서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 명사이고, ‘노숙자, 노숙인’은 특별한 계층이 된다. 사회악을 만든 구조적인 원인이 있을진대 그 원인은 제쳐두고 원인의 결과인 그들을 악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들을 안쓰럽고, 불쌍한 사람들로 본다. 그러나 몇몇 사건과 이를 분석하는 언론의 시각을 보면, 검증되지 않은 사실을 마치 사실인 양 ‘노숙자가 어떻게 했다’는 식의 보도를 한다. 광명역 사건, 충무로역 사건, 멀리는 대구 중앙역 사건 등의 보도를 보면 ‘노숙자’의 범행으로 진단하고, 이후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져도 이미 국민들의 생각은 ‘노숙자의 범행’으로 굳어진 뒤다.

‘노숙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발전에 걸맞지 않는 사회체계의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항상 그들은 희생양이 되고, 사람들의 시각은 점점 더 나빠져 간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일은 이 일을 하는 사람들만의 몫이다. ‘노숙’은 일반적인 빈곤의 원인과 같이 출발한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지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노숙자’가 아니다. 단지 잠잘 곳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다. ‘노숙’을 하는 사람들은 장애인, 노인, 환자, 여성, 실직자이다. 사회적 신분으로 불려야 하는 ‘노숙자’가 아니다. 장애인, 노인, 환자, 여성, 아동, 실직자에 대한 대책은 적극적으로 고민하지만, ‘노숙자’에 대한 대책은 임시방편을 넘어가기가 어렵다. 위 대상에 포함되지만 ‘노숙’을 한다는 이유로…. 그들의 모든 사생활이 노출되어 있는 극단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한다.

지난 1월 22일 서울역에서 사건이 있었다. 언론과 경찰은 ‘충돌 또는 난동’으로 묘사했다. 그 원인에 대한 심층적인 보도와 무엇이 문제인지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자세는 보이지 않았다. 그 결과 더욱 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갈 곳 없는 사람들은 힘들게 하고 있으며, 일부 시민들의 폭력도 벌어지며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일탈을 하는 노숙 생활자도 보인다. 그들이 ‘노숙자’이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이런저런 소문으로 일상의 대화 속에서 그들의 인권은 철저하게 무시되지만, 국민들의 삶이 힘들어서 관심 밖에 존재한다. 이런 상태로 계속 이들을 방치하면 일상의 일부분이 되는 것이고 자연스럽지 않은 삶의 형태가 당연한 것으로 고착되고, 그러면 그들은 우리 시대의 ‘백정’이 될 것이다.

거리에서 살아간다는 이유로, 정신질환에 알코올 의존에, 심각한 질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 사회적으로 가장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 방치되고 있는 현실을 야만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는가? 21세기는 복지 사회를 지향하는 성숙한 사회인가? 그렇다면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며 일하는 많은 시민운동 단체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들은 그 운동단체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빈곤의 문제를 이야기하지만, 그들은 이 논의에서조차 논외가 된다. 가장 열악하고 쉬운 비유의 대상으로만 존재한다.

‘노숙’을 하는 사람들과 그들을 돕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편견과 차별”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편견과 차별을 벗어나고 싶고, 그래서 일하고 싶어 하고, 일을 통해 ’노숙‘을 탈출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치료를 해 주어야 하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치료보다 비난이 우선된다. “게으르다, 일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렇게 되었지…”, 심지어는 “노숙 생활을 즐긴다”는 일부의 시각도 있다. 또 이쪽에서 일하는 실무자들은 “왜 그런 일을 하느냐”는 시각에 스트레스를 받고 일한다. 같은 가난한 사람들과 일하는 다른 사람들은 “고생한다. 좋은 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며, 힘들지만 힘을 얻고 일하고 있지만, 이쪽의 실무자들은 “힘들면서 더 힘든” 일을 한다. 그 다음의 결과는 전문성의 상실과 지원인력의 부족으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더욱 더 ’노숙‘을 하는 사람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게 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홈리스 문제의 ‘해결’은 가능한 일일까? 우리 사회는 ‘해결’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해결’을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며, 결과에만 치중한다. 현대 문명의 이기를 쫓아가는 ‘속도’ 경쟁을 자연스럽게, 별 비판 없이 삶의 형태로 받아들이고, ‘경쟁과 효율’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사회복지에서 ‘경쟁과 효율’이라는 논리의 적용은 가능한 일인가?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과연 그럴까? 이런저런 이유로 경쟁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한 권리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은 없는 것일까?

홈리스, 그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을 회복하고 건강한 인간으로 서게 하는 일의 첫 번째는 국민들이 ‘사람, 우리의 이웃’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들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이 결국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국민들의 올바른 시각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만큼, 사회운동 단체들의 각성과 관심이 요구되는 곳이 사회 소수자의 문제이다. 우리가 함께 꿈꾸는 세상은 평등과 평화의 가치이다.

‘연대와 공존’이 살아있는 사회를 위해 그들을 일의 대상이 아니라, 한 인간의 문제로 바라보는 자세부터 가져야 한다. 복지가 산업화되고 있다는 비판에서 각 단체들은 자유로울 수 없다. 복지는 발전하는데 왜 사람들은 갈수록 힘들어지는가?

홈리스를 돕는 사람들이나,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나 같은 인권을 이야기한다면, 선입견을 버리고, 그들을 이용하는 일들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우리 사회 빈곤의 문제를 이야기할 때 늘 빠지지 않는 대상이 ‘노숙인’인데 그 다음은 없다. 그들은 이 사회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해도 되는 사람들인가? 가장 비참한 그들을 이용하는 것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가장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우리가 우겨도 ‘국민이 주인인 민주국가’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홈리스는 ‘국민이 아니’다. ‘노숙하는 사람’도 ‘국민’이게 하려면 ‘연대와 공존’의 화두를 잡고 그들의 편을 들고, 그들의 곁에 서야하는 것이다. 그런 노력이 이 사회가 그들을 우리의 이웃으로 여기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정은일 / 전국실직노숙인대책종교시민단체협의회 사무국장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