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0 2000-05-10   509

호황 속의 복지탄압

뉴욕의 소외된 복지수급자

109개월째 지속되는 미국의 신경제 장기호황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백만장자 증후군'일 것이다. 이 말은 정보·통신, 벤처산업, 스톡 옵션 등으로 졸지에 백만장자 대열에 들어선 졸부들이 겪는 정신적 공황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연한 '나도 부자라는 착각', 그리고 백만장자 퀴즈쇼나 결혼쇼를 통해 '이참에 신세고치겠다'는 사행심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말이다. 특히 나도 덩달아 부자가 된 것 같다는 소위 '부의 효과'는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5년만에 최고치인 0.7% 상승시키는 등 갈수록 소비풍조를 확산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부의 효과'는 여전히 공존하는 빈곤 현실을 외면하고 있어, 장기호황으로 인해 '파이'는 커졌으나 이를 이전보다 제대로 나누지 못하는 아이러니를 낳고 있다. 지난 달 <뉴욕타임스 매거진>은 지리한 장기호황의 그림자에 빈곤의 현실이 가려지고 있다는 분석을 내 놓으며, 미국의 호황은 소수의 특혜층을 낳을 뿐, 빈민들은 지역, 직업, 사회적 장벽으로 인해 또 다른 미국 내에서 살고 있다고 전했다.

세계 최대의 도시이자 금융 중심지인 뉴욕 시의 경우, 중산층이 엷고 부자와 빈자의 구분이 뚜렷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어느 지역보다 신경제 장기호황 하에서 나타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잘 볼 수 있는 곳이다. 더군다나, 요즈음은 올 11월로 다가온 뉴욕 상원의원 선거를 앞두고, 현 뉴욕 시장인 줄리아니와 빌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인 힐러리 여사가 각축을 벌이고 있어, 모든 정책 하나 하나가 유권자의 촉각을 곤두세우는, 미국 정치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최근 뉴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복지 탄압 내지는 희화화(戱畵化) 사건은 최대의 호황기를 구가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암울해지는 복지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우선 작년 말과 올해 초에 벌어진 노숙자 탄압을 살펴보자. 작년 말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길거리는 안방이 아니다"며 노숙자들을 쉼터에 수용하되 이에 상응하는 노동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고, 이에 불복하여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경우 경찰을 동원하여 체포하기 시작했다. 노숙자들과 연대한 시민 및 학생들은 노숙권 확보를 위해 연일 길거리에서 대규모 시위를 열었고, 결국 법원에서는 이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자 올해 들어 경찰이 노숙자 쉼터에 대한 불심검문을 단행하여, 자고 있는 노숙자들 중 몇 명을 범죄 용의자로 검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뉴욕 시의 복수전인 셈이었다. 시 관계자는 노숙자들로 추정되는 용의자가 많아서 그랬다고 발뺌을 했지만, 잡힌 노숙자들은 거의가 잡범에 불과하여, 다시 한번 인권탄압이라는 운동단체들의 비난을 면하지 못했다. 선거전을 앞두고 이처럼 복지 탄압을 시도하는 뉴욕 시의 속셈은 무엇보다 납세자인 유권자 층에 대한 호소로 보여진다. 특히 줄리아니 시장은 자신의 워크페어 정책 이후 53만 8천명이 복지 수급자 명부에서 빠져나갔다는 '치적'을 누누이 강조해온 터이며, 이러한 노숙자 정책 역시 그의 뉴욕시장 선거 슬로건이었던 '깨끗한 뉴욕'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듯 하다.

노숙자 탄압에 이어서 이번에는 뉴욕 시가 워크페어 참가자를 세간의 웃음거리로 전락시켜 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2월 <뉴욕타임스>를 필두로 미국의 각 언론은 뉴욕 시가 워크페어 대상자들을 전화 상담 심령술사로 취업시켜왔음을 공개하였다. 영어만 능통하면 예지력 정도는 교육을 통해 갖출 수 있다고 선전한 후, 지원자를 심령술사로 취업시켜 이들을 복지 수급자 명단에서 줄여나가는 성과를 이루었던 것이다. 이 사실이 보도되자, 그 동안 협력 업체의 사업 성격에 대한 검토도 없이 복지 수급자들을 알선해주었던 시 당국의 복지 행정에 대해 거센 비판이 일어났다. 더구나 역설적이게도 뉴욕 시는 자체 홈페이지에 심령술사 핫라인 전화광고에 속아 사기를 당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을 버젓이 게재하고 있었다. 뉴욕 시는 보도가 나간 직후 "누구나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믿지만, 더 이상 심령술사를 고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밝혀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복지 수급자를 줄이기에 급급한 졸속적인 워크페어 정책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각 언론들은 이를 계기로 연일 워크페어의 허와 실을 다루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처럼 논란 많은 워크페어를 양적 성과에 치중하여 운영하지 않을 수 없는 뉴욕 시당국도 속사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일생동안 5년으로 수급기간이 한정되어있는 '빈곤가구 한시보조 프로그램'(TANF: Temporary Assistance to Needy Families)의 수급자 중 상당수가 프로그램을 실시한지 5년이 되는 2001년이 되면 프로그램 수급자격을 박탈당하게 되며, 이 경우 이들의 복지에 대한 책임은 고스란히 주정부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뉴욕 주의 한 관계자는 "복지 수급자를 줄이는 것은 철학적인 면과 동시에 재정적인 면이 큰 압력이 되고 있다"며 미증유의 장기호황 속에서도 복지 수급자를 줄여나갈 수밖에 없는 복지제도의 현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졸속적인 워크페어 운영이나 노숙자의 인권탄압 수준을 뛰어넘는, 가공할 탄압이 전개되었다. 바로 복지 수급자를 파업파괴자로 사용하여 노동권을 위협하겠다는 것이다. 이 달 초, 뉴욕 시의 인적 자원국(Human Resources Administration)에서 복지 수급자들에게 발부한 전단에는 20일로 예정되어 있는 빌딩 관리 노동자 파업에 대비하여, 유사시 건물 관리 노동자로 참가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시 관계자는 "그러한 내용은 규정에 어긋나는 것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모르겠다"며 얼버무렸지만, 어쨌건 이번 일로 인해 복지 수급자들은 고소득 납세자들뿐만 아니라 빈곤 노동자에게서도 소외되는 미운 오리새끼가 되어버렸다.

이처럼 신경제 호황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워크페어를 두고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경제논리와 이를 좇는 정치논리에 가려진 어두운 복지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복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지 못한 토양에서는 경제성장이라는 변수가 복지에 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는커녕 오히려 그 그늘이 빈곤층을 묻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많은 복지 수급자와 노동자들의 가슴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다음과 같은 노동 자체에 대한 비애감이다. "워크페어를 통해 실현하고자 했던 것이 기껏해야 강제노동 혹은 사이비 직업, 아니면 파업파괴자 수준이었던가?" 뉴욕의 워크페어를 보면서 처벌적 노동의 수준을 넘어 이제는 파괴적 노동으로 변해 가는 워크페어의 현실이 결코 우리의 것이 되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다.

조준용 /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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