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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복지동향 200호 발행
  • 2021
  • 2021.05.01
  • 189

믿을 구석의 문제

정세정 한국보건사회연구원 포용복지연구단 부연구위원

 

믿을 구석의 부재

벨기에, 프랑스, 룩셈부르크 합작으로 만들어진 ‘이웃집에 신이 산다’(원제: 새로 쓴 신약성서 ‘The Brand New Testament’)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신이 등장한다. 그는 가족에게 무심할뿐더러 폭력을 휘두른다.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정당한 항의를 하는 딸을 들어 올려 바닥으로 던진 다음, 허리띠를 풀어 휘둘러 팬다. (인간적이라는 표현은 맥락 안에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영화가 시사하는 것? 글쎄, 일단 인간이 수시로 ‘요 모양 요 꼴’인 것에 대한 위로가 아닐까?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빚었으니 말이다. 하나 더 있다. 믿을 구석. 신의 딸 에아는 먼저 가출한 J.C 오빠를 따라, 집구석에는 없는, 믿을 구석이 되어줄 사도 6인을 찾기 위해 인간 세상으로의 탈출을 감행한다. 신은 딸을 찾아 나섰다가 세상을 관장하는 자신의 믿을 구석, 컴퓨터가 있는 집으 로 돌아갈 방법을 잃고 신이지만 더 이상 신이 아니게 되고 만다.

 

믿을 구석은 힘, 권력이다. 가족 내에서, 직장에서, 사회적 공간 곳곳에서 힘과 권력의 차이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고, 힘없는 자가 희생된다. 아이들, 청년들, 가족들을 우리는 그렇게 많이도 잃었다.

 

작년 진행했던 청년 불안정 노동자 연구에서, 플랫폼 노동을 하는 청년 312명 중 23.5%가 업무상 상해 경험이 있었으며, 31.7%가 인격적 무시와 감정적 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또한 26.0%는 혼자 일하는 괴로움과 무서움을 경험 했음을 보고했다. 40.7%는 근로시간 임의변경 경험이 있었으며, 18.3%는 임금 체불 또는 임금 비정상 지급 경험이 있었다(김기태ᆞ정세정ᆞ김현경ᆞ남재욱ᆞ조자영ᆞ김윤민, 2020).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의 삶은 오늘도 고되다. 오늘은 두드려 맞지 않기를, 오늘은 욕먹지 않기를, 오늘은 심장이 터질 것 같거나 숨이 꺽꺽 넘어갈 때까 지 울지 않아도 되길 바라는 사람들은 더 그렇다. 그런 사람은 어느 날 내가 될 수도, 어느 날 당신이 될 수도 있다. 믿을 구석 없이 노출된 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불안은 자기 폭력으로 재생산되기도 한다.

 

부모, 학교 내에서의 폭력 피해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한 청년은 청년기 이후 공황장애로 수년간 치료를 받아왔음을 이야기했다. “(6-7세 때 욕을 먹고 했을 때) 기분은 그게 엄청 역겨워요. 지금 돌이켜 생각해도 역겨움이었어요. 수치스러움 뭐 이런 거...아, 난 진짜 쓰레기인가 보다. 그래서 제가 그 이후로 친구들이랑 생활할 때나 학교생활했던 것도 생각해 보면 내 자아를 깎아내리고 시작했어요.”(정세정ᆞ김형용ᆞ송나경ᆞ최권호ᆞ최보라ᆞ강예은ᆞ최준영, 2019).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이고 지고 살고 있다. 이고 진 삶이 무거운 사람들,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보호되어야 하는가.

 

하루를 지켜내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 하루의 무탈함은 개인이 지킬 수 가 없다. 마음과 몸이 덜 고되고, 덜 아파야 하고, 사는 것이 덜 불안하고 덜 두려워야 한다. 도움을 청할 곳이 있어야 하고, 청한 요청에 답할 사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신뢰할 수 있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보호할 수 있는 실재가 있어야 하고, 작동해야 하며, 경험한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고 지고 사는 삶이 더 무거운 사람들에게는 일상을 지켜 줄 주체로서의 국가가 필요하다.

 

믿을 구석으로서의 국가

각종 정부 위원회, 학회, 사설 등, 정책과 제도 논의는 이렇게나 많은데, 정책의 변화 속도는, 체감은 왜 이리 더디며, 일어나서는 안 될 일들은 왜 이리 꾸준히 일어나는가. 정책이 문제인가. 정치가 문제인가.

 

논의를 위해 멀리 갈 것이 없다. 집권당은 지난 4월 보궐선거에서 패배했다. 누가 등을 돌렸는가와 무엇이 원인이었는가에 대한 분석이 연일 언론과 SNS를 채운다. 요즘에는 언론과 SNS의 경계도 모호하지만. 보궐선거의 결과는 집권 당에 대한 실망과 대안의 합당성을 견준 결과이기보다 너희를 믿고 뭘 해볼 수가 없다는 유권자의 의사 표현이었다. 집, 취업, 등등. 집권당은 힘없고 권력 없는 사람들의 믿을 구석이 되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본업보다 본업을 가능케 할 여건이라 믿는 민생과 동떨어지는 일들에 몰두했다. 힘없는 자들을 살피기 보다 권력을 뺏기지 않을 조건을 지키는 데 집중했고, 알 듯 말 듯 한 언어로 던져지는 정치와 정책의 말들은 공간을 떠돌다 사그라지거나 쪼그라들 위기에 처해지고 있다.

 

정부를 향한 쓴 소리들은 추진의 여지를 넓혀 줄 여론이 아닌, 비난을 위한 비판으로 여겨졌다. 책임질 수 있는 주체가 없으면 믿을 구석으로서의 국가는 요원할 수밖에.

 

문재인 정부 출범 4년. 얼마 남지 않은 이 정부의 임기를 앞두고 추진보다는 안정을 위한 조치들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주요 인사는 관료를 중심으로 배치 되고 있다. 시민단체가 제안하는 사회연대세 신설 요구에는 여야 할 것 없이 별 응답이 없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민생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주목받기 어려운 사회의제들은 목소리를 낼 자리조차 찾기 어려워질 것이다. 공공병원 확충, 돌봄의 문제, 복지 강화를 위한 분권 논의가 그렇다.

 

팬데믹은 믿을 구석이 있는 사람들과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의 삶을 구획했다. 코로나19가 관리를 기대할 수 있는 위험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을지언정, 안전과 건강을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도 쉴 수 없는 노동자, 방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고립, 양극화에 노출된 희망이 사라진 청년층, 믿을 구석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정책대응은 별 진전이 없어 보인다.

 

국가는 믿을 구석이 될 수 있을까?

뮤지컬 배우로 활동하다가 코로나19를 맞아 플랫폼 배달 노동을 하는 청년은 “저는 사실 언제쯤 다시 정상화돼서 언제쯤 돌아가겠다 이런 생각은 안 들어요. (중략) 사실 잘 모르겠어요. 제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라고 말했다(김기 태ᆞ정세정ᆞ김현경ᆞ남재욱ᆞ조자영ᆞ김윤민, 2020).

 

시민사회는?

팬데믹은 시민사회도 흔들어 놓았다. 무엇을 공유할 것인지, 어떤 전략이 필요 한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고민의 차원이 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세대로 보나 뭐로 보나 구성원들의 주축이 바뀌고 있으니 아마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팬데믹은 시민사회 전환 속도에 박차를 요구하는 촉매가 되었을 테다.

 

시민사회는 어떤 의식을 공유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권력이 제기하는 문제와 해결방안들이 일치하는지, 일치한다면 그 수단들이 구현될 정치, 경제, 사회의 조건은 무엇인지, 그들이 해당 조건들을 구현해 낼 능력이 있는지,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를 판단해야 한다. 사회와 경제 영역에서 벌어지는 별의 별 일들은 결국 권력, 정치의 영역에서 조정되고 결정된다. 시민 사회는 무엇을, 어떻게 나눌것인지를 논의하고, 결정하고, 권력이 그 논의와 결정을 존중하는지를 감시해야 한다.

 


 

참고문헌

김기태ᆞ정세정ᆞ김현경ᆞ강예은ᆞ최권호ᆞ최한수ᆞ남재욱ᆞ조자영ᆞ김윤민(2020). 사회배 제 대응을 위한 새로운 복지국가 체제개발-청년 불안정 노동자 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정세정ᆞ김형용ᆞ송나경ᆞ최권호ᆞ최보라ᆞ강예은ᆞ최준영(2019). 생애과정 관점의 수요자

중심 청년지원체계 구축을 위한 기초연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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