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1 2021-05-01   1091

[기획1] 폭력, 섬세하고 보이지 않는 평범함

한동우 강남대학교 사회복지학부 교수

인지 프레임으로서 폭력

미안하지만, 폭력은 없어지지 않는다. 폭력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차별과 배제의 폭력구조를 만들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과정에 여러 방식으로 – 최소한 방관 하는 방식으로 – 가담하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을 비정상적인 충동의 분출로 파악하고 이에 즉각적인 대응을 촉구하는 모든 정치적 경향은 폭력이 양산되는 경로를 은폐함으로써 폭력을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이동재, 2018).

인간사회의 역사 전체는 폭력이라는 관점에서도 얼마든지 다시 기술 될 수있다. 폭력은 싸움이 아 니다. 폭력은 투쟁도 저항도 아니다. 폭력은 분명 한 목표를 갖고 대상을 향해 압도적이고 일방적으로 행사되는 사회적, 정치적 행위이며, 그러한 행위를 인식하게 하는 인지적 프레임이다.

인간관계로 이루어진 사회는 인간 그 자체만큼이나 깊고 오랜 역사를 갖고 있지만, 이상하게도 우 리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있어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사회 는 인간 개개인의 삶의 토대이자 그 결과이다. 우리가 폭력을 없애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행사되고 발휘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고, 동시에 우리의 행위는 그러한 구조를 계속 만들어내고 강화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은 혹시 일시적으로 예방되거나 억제될 수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폭력을 없앨 수는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해마다 평균 4만 건의 ‘가정폭력’ 과 2만 건 이상의 강간ᆞ강제추행 사건이 경찰에 접수되고 있지만, 이것이 한국 사회의 법에서 규정하는 행위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이 수치마저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사진 1-1> 4대 사회악 근절을 위한 경찰대학 국제학술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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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경찰대학

폭력은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가 아니라, 인간사회를 성찰하는 렌즈이다. 아동폭력은 여전히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며, 배우자 폭력은 타인이 판단할 수 없고, 판단해서도 안 되 는 ‘칼로 물 베기’ 사랑싸움으로 여겨진다. 스토킹은 흠모하는 사람에 대한 열렬한 구애로, 가스라이팅은 연인 간의 진심어린 충고가 된다. 우리는 친밀한 사람 사이에서의 폭력은 직접 당사자 간의 사과와 용서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을 짓을 한 사람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한다.

폭력은 단지 다른 사람을 괴롭게 할 목적으로 가해지지 않는다. 폭력을 통해 직접적으로 얻는 이익이 없는 경우에도, 더욱이 폭력을 행사한 결과가 가해자에게 전적으로 명백하게 불리한 경우에도 폭력이 발생한다. 폭력은 인간 사이의 권력 관계를 확인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이에 승복하도록 하는 정치적 속성을 갖는다.

폭력은 누군가는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지만,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빠지고 마는 수렁이다. 수렁 에서 헤어나오거나 수렁에 빠진 사람을 구해낼 수는 있지만, 수렁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이것 이 폭력이 갖는 사회적 속성이다.

이름을 가진 폭력

박근혜 정부는 출범 초기에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 불량식품’을 뿌리 뽑아야 할 4대 사회악으로 호명했다. 불량식품에 관한 논의를 제외하고라도 한국 사회에서 제거해야 할 가장 큰 악덕 중 세 가지가 폭력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을 성폭력, 학교폭력, 가정폭력으로 특정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박근혜 정부로부터 받았던 가장 이상한 첫인상이다.

<사진 1-2> 4대 사회악 근절 전담부대 발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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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경찰청

호명(interpellation)은 가장 원초적인 권력 행위이며 정치 행위이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정체를 부여하는 것이며, 발화자의 욕망을 대상에게 투사하는행위이다.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 하여 별도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프레임을 선점함으로써 언어체계를 지배하고, 사회 내의 지배적 형태의 취향을 주입하는 일종의 상징 폭력이다(부르디외, 2005). 폭력은 그 자체로도 정치적이지만, 폭력을 규정하는 방식도 정치적이다. 박근혜 정부의 4대 사회악 규정은 한국의 치안 정책은 물론 이와 관련한 학술연구조차 성폭력, 가정폭력, 학교 폭력에 집중하도록 만들었다.

국가는 가장 강력한 권력의 주체이며, 합법적으로 폭력을 사용할 권한을 배타적으로 위임받은 기구이다. 국가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수립되는 정부에 의해 운영된다. 각기 다른 인식과 취향을 가진 시민들에 대해 정부는 지배적 문화를 강요함으로써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고자 한다. 습관은 ‘사회가 가진 규칙에 대한 규칙’으로, 법과 제도같은 공식적 규칙을 보충하는 암묵적, 문화적 규칙이자 제도적 무의식이다. 그것이 호명이 갖는 정치적 의도이며 목표이다.

<사진 1-3> We ARE the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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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s://www.berfrois.com/2011/11/we-are-the-99/

정부 수준에서 사회악(folk devils)을 규정하는 것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일찍이 1940년대 영국도 결핍, 질병, 무지, 더러움, 게으름을 영국 사회의 5대 사회악(five giants)으로 규정하고 이를 제거하기 위한 사회보장시스템을 구축한 바 있다. 국가가 폭력에 대응하여 정책을 수립하고, 효과적인 정책 집행을 위해 시민들을 대항으로 캠페인을 벌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폭력의 영역과 대상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특정하여 규정한 것은 이 규정에서 벗어난 다른 형태의 폭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희석할 우려와 더불어, 정부의 정책적 노력을 편중하도록 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이름을 가진 폭력이 많아질수록 폭력은 제거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떤 폭력에만 집중적으로 사회적 관심이 부여됨으로써 사회 내 폭력 분포 지형을 더욱 기형적으로 만들 뿐이다.

모방 욕망과 폭력의 순환

폭력은 대체로 소수자 문제다. ‘소수자’라는 표현은 단순히 숫자가 적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에는 많은 수의 소수자가 존재하기도 한다. 2011년 미국 뉴욕에서 시작하여 전 세계로 퍼 진 ‘월 스트리트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시위의 구호는 “우리가 99%이다(We are the 99%)”였다. 경제와 정치 공간에 확립된 시스템 속에서 자본과 권력을 갖지 못하거나, 이러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상대적 의미에서 소수자가 되며, 자본과 권력이 배분되는 시스템이 유지되는 한 소수자 그룹은 더 강력하게 재생산 된다.

경제 영역과 정치 영역에서 권력 자원이 배분되는 시스템의 주류에 속한 사람들은 그 시스템을 공고히 함으로써 시스템 밖의 사람들이 내부로 진입하는 것을 막는다. 시스템 내부에 속한 주류는 자신들의 욕망을 두고 안정적으로 경쟁하고자 하는데, 경쟁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을 회피하려하기 때문에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철저히 분절시키고자 한다. 이것이 시스템의 소수자를 생산ᆞ 재생산하는 방식이다. 시스템은 그 자체로서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시스템이든 소수자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오늘날 시장은 삶에 필요한 물건을 거래하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엄밀한 의미에서, 재화와 서비스가 거래되는 시장과 이것이 지칭하는 상징자본이 거래되는 시장은 여러 층위로 분절되어 있다. 르네 지라르(2001)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자본을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본을 소유한 사람을 지향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확인하고 표현할 수 있는 고유의 언어체계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매우 어려운 일이다.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언어체계를 갖지 못한 사람은 내재적 욕망을 확인하지 못한 채 외부로부터 내면화된 욕망에 의존한다.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욕망이 아닌 외부로부터 내면화된 욕망은 타율적이며 매개된 욕망이다.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을 향한 타인의 욕망을 모방적으로 욕망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고양시키려는 시도에 의해 구성 된다는 점에서 물질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다(이찬수, 2016).

대의민주주의 방식의 정치 시스템에서 모든 사람은 정치과정에 참여할 권리를 평등하게 인정받는 다. 경제 영역에서 배제되거나 차별받는 소수자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있는 권력 자원을 획득하는 방법은 이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 영역은 시장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 엘리트가 장악한 내부 공간과 주변부 공간으로 분절되어 있다.

슬라보예 지젝(2011)은 오늘날의 세계가 탈정치적 생명정치(post-political bio-politics)를 지향 한다고 말한다. 이는 이념적 대립을 벗어나 전문적인 운영과 효율적인 생활관리에 초점을 두는 정 치이다. 이 체제에서 사람들은 안전과 복지를 제도화 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는다. 탈정치적 상황에서 내부 정치 공간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분절된 정치 시스템이 제공하는 물질적 이익과 제도적 혜택을 두고 주변부에서 이합집산한다. 탈정치화한 소수자들은 시스템을 구성하거나 변화시키는데 참여하지 못하고 경제적 이익과 복지혜택에 몰두하게 된다. 시스템 밖 소수자의 권력 자원은 조직화되지 않는다.

폭력이 대체로 소수자 문제라고 한 것은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범죄 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소수자를 만들어내고 이를 재생산하는 체제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뜻이다. 외부로부터 내면화된 매개 욕망으로 경쟁하는 시스템의 주류는 갈등을 회피하고 안전한 내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희생양에게 폭력을 행사해왔으며, 이 과정에서 욕망과 폭력의 악순환이 일어난다. 시스템의 주류는 이러한 폭력을 은폐하거나 방관해 왔으며 이들이 은폐해 온 폭력의 사회구조가 소수자를 재생산한다. 소수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이미 시스템의 주변부에 방치되어 내부 공간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희생제의에 불과하다. 내부 공간에서 시스템이 주는 안전함을 누리는 주류는 주변부에서 일어나는 직접적 폭력을 도덕적으로 비난한다.

오늘날 악은 다른 사람을 때리거나 괴롭히는 직접적이고 주관적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아니다. 진정한 악은 배제와 착취의 폭력구조를 만드는 데 가담했으면서도, 자신은 그 구조로부터 얻은 권 력과 자본으로 공동체 빗장 뒤에서 개량한복 따위나 입고 유기농 식품을 즐기면서 비폭력대화 프 로그램에 참여하는 시스템의 주류들인 것이다.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

시스템은 은밀히 작동한다. 민주적 절차와 합리적 선택을 통해 만들어진 시스템은 제동 없이 작동한다. 그렇기에 현대 사회는 ‘투명사회’(한병철, 2014)가 되어 간다. 주체가 다른 주체에게 직접 가하는 폭력을 주관적 폭력이라고 한다면, 객관적 폭력1)은 ‘시스템이 아무런 마찰 없이 작동 함으로써 생기는 파국적 결과’(지젝, 2011)이다. 객관적 폭력은 시스템 자체에 구조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폭력을 말한다.

주관적 폭력은 비폭력을 배경으로 경험되기 때문에 정상적이고 평온한 상태를 혼란시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객관적 폭력은 이 정상적 상태에 내재한다. 그래서 객관적 폭력은 매우 섬세하며 비가시적이다. 객관적 폭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이유는 주관적 폭력을 지각할 때 그 기준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섬세하고 보이지 않는 객관적 폭력에 대한 이해 없이 주관적 폭력을 이해하려고 하면, 폭력은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폭발’로만 보인다.

시스템이 가하는 객관적 폭력은 일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직접적이고 주관적 폭력의 배경으로 기능 한다. 시스템에 포획된 생활 세계의 주체들은 시스템의 언어와 원리를 복제한다. 시스템의 보편성은 생활 세계의 특수성으로 체현되며, 이 둘은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되어 있다. 지젝에 따르면, 주관적 폭력을 한 걸음 물러나서 보면, 폭력과 싸우거나 관용을 장려하는 우리의 노력을 지탱하는 폭력을 식별할 수 있다.

폭력에 대한 대응과 저항은 직접적이고 주관적인 폭력을 비정상적 충동이 표출된 것으로 인식하여 즉각적으로 이를 억제하거나 예방해야 할 정책과제로 선정하는 것이 아니다. 폭력의 피해자를 보호하거나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과 폭력에 대응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시스템을 구성하는 원리로서의 습관, 다시 말해 법과 제도를 구성하 는 제도적 무의식의 원리와 언어를 성찰하는 것이 구조적 폭력의 수렁에서 헤어 나오는 길이다.


1) 지젝은 객관적 폭력을 상징폭력과 구조적 폭력으로 구분하여 논의하 였다.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되, 슬라보예 지젝 (2011)을 참고할 수 있다.

참고문헌

르네 지라르, 김치수 외 역(2001).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 실』. 한길사.

삐에르 부르디외, 최종철 역(2005).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 외 역(2011).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 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난장이.

이동재(2018). “지젝의 폭력론: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중심으

로”. 현대사상 19. pp. 171-194.

이찬수(2016). “모방 욕망, 소수자 재생산과 그 극복의 동력:

르네 지라르의 폭력 이론을 중심으로”. 통일과 평화 8집 2

호. pp. 212-248.

한병철, 김태환 역(2014). 『투명사회』.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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