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복지 – 영구임대주택에서 주거급여까지

주요 일지

O 1988년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

O 1989년 2월 25일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건설계획발표

O 1990년 10월 영구임대주택 본격 입주 ― 도봉구 번동

O 1991년 9월 영구임대주택 19만호로 축소종결

O 1996년 이스탄불 제2차 세계주거회의

(Habitat II)

O 1997년 주거기본법 제정운동 시작(주거연합, 도시연구소 등)

O 1999년 8월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 주거급여 도입

1990년 10월 도봉구 번동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본격입주가 시작되었다. 1989년 2월 25일에 도시영세민 주거안정 특별대책의 일환으로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공급계획이 발표된 지 1년 8개월 만에 본격 입주가 시작될 만큼 초고속으로 건설된 결과였다. 물론 1년 전인 1989년 11월에 중계동 시범단지가 완공되었지만, 이는 기왕에 건설중인 공공임대아파트를 전환한 것이었고, 영구임대로 계획된 것은 번동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입주자격이 거의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만 주어진 제한적인 프로그램이었지만, 이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공공임대주택이 탄생한 것이었다.

1980년대부터 주로 공급된 기존의 공공임대주택은 대개 5년 정도의 임대기간을 거친 후 분양되었기 때문에 사회복지적 의미를 갖는 공공임대주택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반면 영구임대주택은 건물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영세민을 위한 임대용으로만 사용되며, 이를 위해 건설비의 85%가 재정에서 지원되었다. 이러한 파격적인 지원 또한 우리나라 주택정책의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따라서 영구임대주택은 우리나라 주택정책에 주거복지의 개념이 도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영구임대단지의 사회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공급된 지역사회복지관들이 양적으로 확대되어 사회복지 실천의 중요한 현장으로 부상하면서 사회복지붐을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음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영구임대주택에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영구임대주택의 구상은 원칙적으로 당시 주택문제의 심각성을 반영한 것이었고, 나아가 이와 관련된 민중운동, 시민운동의 압력도 감안한 것이었지만, 정책결정과정 자체는 제6공화국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밀실에서 졸속으로 진행되었으며, 이에 따른 부작용이 상당하였다.

무엇보다도 저소득층이 대규모로 밀집되면서 슬럼화의 우려가 있었다. 더욱이 고층아파트에 빈곤층이 밀집되면서 종래 산동네에 존재하였던 공동체적 골목문화가 사라졌으며, 영세민들이 생계를 꾸려가던 비공식시장들도 파괴되었다.

또한 최저소득층의 상당 부분은 월세와 관리비 부담, 생계터전으로부터 격리 등의 사정으로 입주대열에서 탈락하였다. 나아가 빈집에 대신 입주한 차상위계층들과 생활보호대상자 가구, 그리고 인근 아파트 주민 사이에 위화감이 조성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제7차 5개년계획(1992∼1997)에서 25만호 건설이 19만호로 축소종결됨으로써 영구임대주택이 보편적인 서민주거로 확산되지 못한 점이 핵심적인 문제였다.

어쨌든 영구임대주택은 공공임대주택을 중심으로 저소득층의 주거문제를 풀어가는 선진국형의 주택정책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주택의 절대량이 부족한 현실에서 영구임대주택의 공급재개는 주거복지를 위한 이후의 민중적 투쟁에서 우선적인 요구사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차기정권들도 비록 영구임대는 아닐지라도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을 우선적인 정책과제로 제시하곤 하였다. 이에 따라 1992년부터는 공공임대주택(5년형과 50년형)이, 국민의 정부에서는 국민임대주택(10년형, 20년형)이 공급되었다.

영구임대주택 공급이 지속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재정문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부는 건설비 지원을 축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정기간 임대후 분양하여 원가를 회수하는 종래의 정책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 재고는 전체 주택의 5% 정도에 불과한 채로 남아 있다.

영구임대주택의 좌절을 한 축으로 하면서도 1990년대의 우리나라 주택문제는 전반적으로 개선의 양상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선 주택보급률이 점진적으로 개선되어 현재, 정부발표로는 92% 정도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개선은 민간시장의 활황과 특히 서민가구들의 다세대, 다가구 주택 건설붐에 힘입은 바가 크다. 물론 충분한 주택의 확보가 주택정책의 기본이라고 할 때 아직 갈 길이 먼 것은 분명하다. 1인당 주거면적의 확대(1995년 5.4평), 주거설비의 확충, 단칸방 가구 해소 등의 측면들도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문제들도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다. 복지정책적 고려를 결여한 그간의 주택정책의 결과 전세가구가 전체가구의 46.7 %에 달하고, 서울시민은 월소득의 47%를 임대료로 지출하고 있으며(선진국은 25∼30%), 또한 단칸방 거주가구도 아직 150여만 호에 이르고 있다. 재개발 지역의 고질적인 강제철거와 인권침해 문제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나아가 노숙자의 증가 등 IMF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증폭된 중하층 서민들의 고통은 우리나라의 주거복지정책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주거복지는 주거의 안정성 확보와 주거의 질 향상, 나아가 주거비 부담의 적정화라는 구체적 과제들이 적절히 달성될 경우에 확보된다. 따라서 이를 위해서는 제도적인 면에서 최저주거기준의 설정이나 주거비 보조제도의 도입 등이 이루어져야 하며, 무엇보다도 주거권을 기본적 인권으로 인식하고 보장해야 할 것인데, 우리의 경우는 아직 주거권이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다만 1996년 세계주거회의(Habitat II)의 선언과 결의를 승인하는 것과 같은 국제적 관계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거권을 승인하고 있는 상황이다.

주거권을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주거기본법(가칭)을 제정하고 이를 중심으로 관련 법체계를 정비하자는 운동이 최근 전개되고 있다. 주거연합과 도시연구소 등의 민간단체는 1997년에 주거기본법 제정운동을 주창하고, 1998년 11월 국제토론회를 거쳐 입법추진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20세기 마지막해 주거복지와 관련된 주요 변화로는 국민기초생활보장법(1999.8)이 제정되면서 주거급여가 신설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생활보호대상자들에게 임대료와 수선비 등을 보조하는 제도로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주거비 급여를 법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사례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저소득층의 주거욕구 충족을 위해서는 아직도 영구임대 또는 공공임대주택의 공급이 확대되는 것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겠지만, 상당한 정도의 최저소득층이 영구임대주택에서도 소외되고 있음을 감안할 때, 주거급여는 이들의 주거욕구를 최소한으로나마 충족시키는 소중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당장은 저소득층의 가처분소득을 보충하는 의미가 강하겠지만, 운용하기에 따라서 주거기준 향상을 위한 본격적인 임대료보조제도로 발전될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

이상에서 개괄한 바와 같이 1990년대의 주택정책은 사회주택정책의 단초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최저소득층을 주대상으로 하는 제한적인 프로그램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10년의 세월 동안 이런저런 정책수단들이 꽤 구색을 갖추게 되었음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새 천년이 시작되는 지금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사회주택정책을 구상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영환 / 성공회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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