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05 2005-05-10   4668

주거권 보장과 인권

주거권 개념과 국제적 조약

현재 우리 국가는 살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거처를 제공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없다. 여러 가지 이유로 주거 위기에 처하게 된 개인이나 가족이 국가에 대해 긴급하게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주거권은 국민 개개인이 국가에 어떤 요구를 할 수 있는 청구권적인 권리라고 여겨지지는 않고 있다. 실질적으로 정부가 국민 누구에게나 집을 제공해줄 수는 없고, 따라서 주거권은 정부가 가난하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주택정책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주거권에 대한 우리나라의 이해는 국제법이나 국제사회에서 일반화된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주거권은 국제적인 인권 관련 조약 등에 규정되어 있다. 세계인권선언에서는 생존에 대한 권리의 내용으로 주거를 언급되어 있고, A규약을 비롯한 국제적 인권 관련 조약 중에는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 것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준한 A규약 등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 그리고 Habitat Agenda에서도 적절한 주거에 대한 권리를 확인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 세계는 심각한 홈리스와 적절한 주거 환경에서 생활하지 못하는 이들의 문제를 가지고 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주거권을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고 있다.

국제사회에서도 모든 국가가 즉각적으로 바람직한 수준의 주거권을 실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거권은 “점진적(progressive)”으로 실현되어야 할 권리라고 여겨진다. 이것은 A규약에서 다루고 있는 여러 가지 사회적 권리의 일반적인 성격이기도 하다(A규약 Article 2(1)). 점진적인 실현이라는 개념은 주거권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하다. 국가의 “점진적인 의무”는 일정한 경제 수준이 되어야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거권의 점진적이고 완전한 실현을 위해서 가능한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조취를 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국가의 의무는 주거권 실현을 위해 이용 가능한 자원을 확대하고, 필요한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을 실질적인 내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국가가 당장 준수해야 할 사항도 있다. 그것은 고의적으로 권리를 퇴보시키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과 강제 퇴거가 실시되도록 방치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사회가 합의한 최소 수준의 즉각 이행해야 할 의무이다. 물론 국가는 그 이상으로도 주거권을 존중하고, 보호하고, 완전히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볼 때, 국제사회에서 논의되고 있는 주거권 역시 국가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하고, 요청하는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 주택을 제공해야 하고, 주거권의 모든 측면을 즉각적으로 달성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주거권은, 적절한 주거를 제공하기 위해서 투입할 자원을 확대하고, 이러한 자원에 대한 모든 사람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고, 홈리스나 부적절한 거처에 사는 사람이나 기본적인 수준의 주거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문제가 되는 법이나 정책에 대해서 조사하고 이를 개선하는 것 등을 정책적 임무를 부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주거권과 국민 개개인이 주장할 수 있는 권리나 이에 대응해야 할 국가의 의무와 무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권리들은 국가의 시혜적인 배려가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권리와 이와 관련한 국가의 의무의 형태로 자리잡아야 마땅하고, 이것은 권리 신장의 중요한 단계임에 분명하다. 각 나라마다 홈리스, 강제 퇴거 등 주거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권리는 다르게 정의되어 있고, 주거권의 실질적인 내용은 법과 정책 행위 등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주거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국가에 보호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는 법으로 그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주거권이 청구권적 권리는 아니라고 엄격하게 제한하는 것은 우리 주택정책에서 권리의 문제를 지나치게 무시해왔던 것의 영향이라고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홈리스 문제와 주거권

우리나라의 경우 ‘홈리스’와 관련해서 주로 ‘노숙인’라는 개념이 사용되고 있다. 현재 노숙인으로 분류되는 사람은 대체로 길에서 잠을 자거나 노숙인 쉼터 등에서 생활하는 이들이다. 이러한 정의는 매우 협소하고, 문제의 규모를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그리고 노숙인 쉼터나 거리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집단인데, 이것은 비슷한 문제를 겪고 있지만 노숙인 개념에 포함되지 않는 집단이 존재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소년, 여성 등이 현재 관련 정책에서 제대로 고려되지 않는 것도 노숙인 현황 파악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홈리스는 직장과 주거의 안정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임시적인 거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개인과 가족을 포함하는 넓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고 있다. 그리고 홈리스와 관련된 정책은 이러한 홈리스가 될 위기에 처한 집단까지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주거권과 관련하여 홈리스 문제가 가장 먼저 다루어질 필요가 있는 것은, 홈리스가 기본적인 주거에 대한 필요를 충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극단적인 상황에 이른 경우이기 때문이다. 홈리스가 되면 언제 무엇을 먹고, 언제 어디서 씻을 것인가와 같은 일상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행동에 대한 자기 통제력을 잃게 되고, 이런 상태에서 다른 어떠한 인권도 제대로 실현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또 심각한 개인적인 실패의 느낌을 갖게 만든다. 이러한 실패의 느낌은 홈리스로 생활하는 기간이 아무리 짧다고 하더라도 심각한 심리적 상처를 주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든다.

홈리스로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다시 회복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홈리스가 되면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데, 고용이나 가족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권리조차 스스로 확보하지 못하게 된다(Steering Committee on Social Policy, 1993). 따라서 홈리스가 되지 않도록 하고 또 홈리스 상태에서 신속하게 벗어나도록 지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의무적인 과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민 개개인은 그러한 도움을 국가에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어야 한다.

첫째, 거처할 곳이 없는 이들이 임시 거처를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이미 국가나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종류의 쉼터나 임시 거처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 위기에 처한 개인과 가족이 정부와 관련 기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법률이나 관련 규정에 명시하고, 각 기관의 입소 규정 등에서 이러한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 일시적인 보호 기능을 하는 쉼터나 이러한 요구를 받은 정부기관은 위기에 처해 있고 다른 살 곳을 찾기 어렵기 때문에 찾아온 이들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위기에 처한 개인과 가족이 정부나 각종 관련 기관에 대해 임시적인 거처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와 국가가 이를 즉각적으로 실현해야 할 의무를 명시하는 것은 현재 우리 상황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둘째, 홈리스를 위한 장기적 혹은 영구적 주거 대책에 대한 권리를 고려해야 한다. 이것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무료로 주택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홈리스라고 주장하면서 집을 요구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주택을 줄 수는 없다. 하지만 사회가 거처를 제공해야 마땅한 이들이 있고, 이들에게 기본적인 수준의 주거를 제공받을 권리를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기본적인 거처에 대한 권리를 실현할 수 있는 범위를 정하고 확대하는 것은 주거권의 실질적인 발전 과정이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저소득층을 위한 주택정책에서 부담 능력의 문제가 고려되어야 한다. 지원이 필요한 개인이나 가족에게 그들이 부담할 수 있는 수준의 비용으로 적절한 주거가 제공되도록 주택정책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공임대주택이나 주거비 보조 정책이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스스로 주거를 확보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기본적인 수준의 주거를 보장하는 수단이 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홈리스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기능을 하고, 홈리스들에게도 기본적인 주거에 대한 권리를 실현하는 일반적인 대책이 될 것이다.

주택정책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필요에 대응해왔는가를 고려할 때, 자원 배분에서 심각한 계층적 역편향이 있었다. 주택정책에서 홈리스 문제를 고려하는 것은 이런 문제에 대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강제 퇴거

강제 퇴거는 국제 사회가 주목하는 주거권 침해 행위이고, 국가가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할 사안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 우리나라가 국제 사회에서 주거권 침해를 방치하고 있다고 비난을 받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정부는 이미 여러 차례 강제 퇴거와 관련하여 유엔 산하기구들로부터 권고를 받았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퇴거가 이루어지며 강제 퇴거와 관련하여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국제 사회와 우리 사회의 강제 퇴거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유엔기관 등은 우리 사회의 법적 기준이나 실제 퇴거가 이루어지는 절차가 국제사회에서 합의된 강제 퇴거와 관련하여 지켜야 할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강제 퇴거는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주택을 철거하는 경우에 주로 쟁점이 되어왔다. 강제 퇴거의 문제가 나타나는 대표적인 사업의 하나인 주택재개발사업은 주로 경제적, 행정적, 상업적 요구에 의해 진행되고, 사람들의 주거에 대한 필요를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다. 주택재개발사업에서 대도시 지역의 주택 부족에 대응하고 불량한 주거 환경을 개선한다는 것이 행정의 중요한 목적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주택재고를 확대하는 것만큼 불량한 주거 지역에서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거 상태가 실제로 개선되는가와 재개발 이후 그들의 주거비 부담이 커지는 문제는 고려되지 않았다.

1980년대 초반부터 합동재개발사업이 급격하게 진행되면서 철거를 위한 강제 퇴거를 둘러싸고 나타났던 갈등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재개발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업 자체를 반대하지 않는다. 기존 주택이나 주거지가 너무 낡았고, 붕괴나 화재의 위험이 있으며, 기반시설도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서 생활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역 차원의 사업이 필요하다는 것에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들이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어디로 어떻게 이주할 것인가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재개발사업에서 강제 퇴거 문제를 당하게 되는 것은 주로 세입자들인데, 1989년 이후 세입자들에게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는 등의 철거민 대책이 나타나면서 강제 퇴거로 인한 갈등은 양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아직도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세입자들은 재개발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지만 임대료 등이 부담스러워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일자리와 소득이 불안정한 이들에게 다달이 지불하는 관리비와 임대료가 큰 부담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방수나 평수가 획일적으로 공급되는 것 역시 많은 가구가 공공임대주택 입주를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임대주택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제공되는 주거대책비로는 주변 지역에서 다른 적절한 주택을 구하기 힘들다. 주거대책비를 받은 가구들은 경제 활동이 어려워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 등으로 인하여 대부분 주변 지역으로 이사를 하는데, 인근 지역의 주택 임대료는 이전의 재개발지역의 저렴한 임대료와 주거대책비를 합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래서 주민들이 이주한 주택은 기본적인 주거 수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주택재개발사업 이외의 도시환경정비사업 등 공공사업에서는 세입자에 대해 주거대책비만 지급되었으며, 강제 퇴거 문제는 여전히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곤 했다.

또 주목해야 할 문제는 철거 이전이나 행정대집행법에 의한 퇴거와 철거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철거용역회사는 공사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신속하게 철거를 하는 역할을 하청을 받는데,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하면서 가능한 빨리 주민들을 퇴거시키고 주택을 철거하곤 했다. 이들은 지역에 상주하면서 주민들을 폭력적으로 위협하거나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여 주민들에게 불안감을 준다. 강제 퇴거가 진행되는 과정에도 폭력은 흔히 나타난다. 재개발 등에서 세입자 대책과 관련된 자격을 갖추기 전에 퇴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도 있다.

강제 퇴거의 현황과 국제 사회의 권고를 고려할 때, 우리 정부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것이 관련된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다. 민간개발사업으로 인해 강제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의 문제에 대한 아무런 제도적인 대책이 없는 점, 공공개발사업의 경우 사업의 종류에 따라 주거 대책이 다르고 적절한 대체 거처를 마련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점, 사업계획이 결정되기 3개월 전부터 해당 지역에 거주한 경우에만 세입자 대책을 적용하여 미해당자 문제 등은 제도적으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다. 그리고 각종 개발사업으로 인하여 퇴거해야 하는 가구를 위한 주거 대책은 퇴거를 당하는 사람들의 이해와 필요를 반영하는 것이어야 하고, 적절한 주거 수준을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법적인 절차에 의하지 않은 어떠한 종류의 퇴거를 종용하는 방법들은 불법적인 것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한 제도적, 행정적 조치도 필요하다. 법적인 절차에 의하지 않고 주민을 퇴거시키기 위해 주민들이 생활하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가지 수단들은 분명히 금지되어야 할 불법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주거권 침해를 막기 위해서는 필요한 경우에는 법적인 금지 규정을 두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강제 퇴거에 대항할 수 있는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도 필요하다. 강제 퇴거 문제가 지속되는 것은 부당하게 퇴거당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부당한 행위로 인하여 발생한 피해에 대해서는 쉽게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고, 원래의 주거 상태 혹은 적정한 수준의 주거를 즉각 회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제 철거로 인한 주거권 침해와 관련해서 법적인 보호를 요청할 수 있는 이용하기 쉬운 절차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강제 퇴거의 집행 절차들과 함께 이에 저항할 수 있는 절차도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무허가주거지

무단 점유란 다른 사람의 토지를 허가를 받지 않고 사용하는 것이고, 기본적으로 불법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정부가 기본적인 거처를 마련할 수 있는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은 경우, 다른 살 곳을 찾을 수 없어서 주거를 목적으로 토지를 무단 점유하는 것을 단지 불법적인 행동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다(Randall, 2000). 생존에 대한 권리는 소유권을 보장하는 것에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비닐하우스촌’으로 불리고 있는 ‘신발생 무허가주거지’는 이런 쟁점을 안고 있는 지역이다. 신발생 무허가주거지와 이전의 무허가주거지에 대한 구분은, 1980년대 초에 기존 무허가주택에 대해서 점유권이나 소유권을 인정하고 그 후 발생한 무허가주택에 대해서는 일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정부의 조치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기존 무허가주택에 대해서 행정기관은 무허가건물관리대장을 통하여 무허가주택의 소유권 이전까지 관리했고, 재개발사업 등에서는 이런 주택에 대해서도 보상을 실시했으며, 점유자들에게 국공유지를 불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 발생한 무허가주택은 엄격하게 철거했고, 개발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보상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정부의 이런 조치는 무엇보다 더 이상 무단 점유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부는 무단 점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새로 발생한 무허가주택이나 그 주거지에 대해서 엄격한 태도를 취했으며, 기본적인 생활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는 것조차 주저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 거처를 모두 무작정 철거하지는 않았지만, 공공기관이 불법적인 무단 점유를 통해 형성된 주거지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어떤 조치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부의 방침이고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무단 점유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생존의 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정부가 기본적인 주거를 보장할 수 없는 (혹은 보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스스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를 불법이라고만 대응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이것이 과거와 같은 무단 점유에 대해 점유권이나 건물의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는 등의 양성화는 더욱 적절하지 않다. 과거 정부가 행한 권리 인정은 정부가 기본적인 주거를 보장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편법적으로 무단 점유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조장하기 위해 특별한 자산 이득을 제공한 것이다. 이제는 주거 위기에 처한 가구에게 기본적인 주거를 보장할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통하여 이 문제에 대응하는 것이 적절하다.

전기를 비롯하여 상하수도와 교육, 의료, 우편 등은 생활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서비스이고, 그것은 누구에게나 제공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비닐하우스촌에서는 무단 점유가 불법 행위라고 여겨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서비스를 정상적으로 이용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비닐하우스촌이 형성되던 초기에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우물을 파거나 지하수를 사용하였으며, 100가구가 넘는 비교적 큰 비닐하우스촌을 제외하면 아직도 약수를 떠오거나 생수를 구입해서 식수로 사용하는 곳이 많다.

상수도가 들어오는 곳의 경우, 상수도관은 마을 입구까지 들어오고 여기서 주민들이 부담해서 다시 관을 집집마다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다. 또 많은 지역이 위생 상태가 불량한 공동화장실을 사용하고 있으며, 하수시설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다.

무단 점유자들에게 어떤 권리가 있는지를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무단 점유 자체를 ‘불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주거를 마련하기 위한 자구적인 행동의 불가피성을 고려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거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서비스 제공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 무단 점유로 인하여 다른 권리의 실현이 가능한 장애를 받지 않도록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의 주거를 비롯한 여러 분야의 권리 실현을 위해서, 전기 공급이나 화재 예방, 주민등록 등재 등의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서비스에 대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사회권위원회는 우리 정부가 제출한 제2차 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비닐하우스와 같이 예외적으로 기준 이하의 조건에서 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원할 즉각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이러한 권고는 비닐하우스에 거주하는 이들이 심각한 주거 위기에 처해 있고, 정책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집단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은 화재 등의 재난 가능성, 위생, 기본적인 주거 서비스 미비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중첩적인 주거 위기에 처해 있으며, 가장 심각한 주거 위기에 처한 집단 가운데 하나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들은 주거 위기에 처한 개인과 가족을 위한 주거 대책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가 비닐하우스촌에서 기본적인 서비스나 주거 대책을 제공하는 것과 관련하여 우려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자산 이득 등을 노리고 무단 점유가 확산되는 것이다. 그런데 주거 위기에 처한 이들에게 제공되는 기본적인 대책이 마련되면 무단 점유를 통해서 이러한 대책에 빨리 접근하고자 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현재 무단 점유자를 퇴거시키면서 주로 비공식적인 보상을 통해서 타협하곤 하는데, 이러한 관행이야말로 무단 점유를 투기적인 수단으로 활용하도록 조장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무단 점유의 권리가 무단 점유자에게 토지에 대한 점유권이나 건물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고, 무단 점유자는 일반적인 임차인이나 건물의 소유자와 동일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없다. 이들은 다른 방법으로 거처를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따라서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행동이라는 차원에서 정당화되는 만큼, 퇴거와 관련해서도 기본적인 수준의 주거를 보장하는 대책이 필요하고, 일단 퇴거되고 건물이 철거된 상태에서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원 상태 회복을 주장할 수는 없다. 서울시가 비닐하우스촌의 화재로 인하여 거처를 잃은 가구들에게 공공임대주택 입주 및 전세금 융자 등의 지원을 통해 기본적인 주거를 확보할 수 있도록 한 남태령 전원마을의 사례는 이런 관점에서 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판단된다.

비닐하우스촌 주민들에 특별히 공공임대주택을 제공하는 것이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국민임대주택 매년 10만호씩 공급하면서도 가장 주거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주거를 제공할 수 있는 수단이 확보되지 않는 것은 더 큰 정책적인 결함임에 분명하다. 이것은 자원의 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책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이다. 주거 위기에 처한 우선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을 갖춘 이후에는 무단 점유의 정치적인 정당성도 거의 사라질 것이다.

5. 맺음말

현재 주택법에는 최저주거기준을 설정ㆍ공고하도록 하고 있고, 이에 미달되는 가구에 대하여 국가나 지방정부가 우선적으로 주택을 공급하거나 국민주택기금을 지원하는 등 혜택을 부여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또 정부만이 아니라 민간도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가구를 줄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최저주거기준의 법제화는 주택정책의 방향을 보다 명확히 하고, 정책적 우선순위를 분명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00년 현재 전체 가구의 23.1%인 330만 가구가 최저주거기준 미달인 것으로 나타났다(박신영, 2003). 그리고 정부는 주택종합계획 등을 통해서 최저주거기준 이하의 가구를 해소하는 것을 정책의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최저주거기준 이하에 거주하는 가구의 비율은 앞으로 총량적인 주택 공급 확대와 공급되는 주택의 수준 향상 및 국민임대주택의 지속적인 공급 등을 통하여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런데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 가운데에는 미인가숙박소(쪽방), 지하주거, 비닐하우스 등 비정상적인 주거에 거주하는 심각한 주거 빈곤 상태에 있는 이들이 있고, 정책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고 있는 홈리스의 문제 등 보다 우선적인 고려가 필요한 문제들에 대해서 별다른 대책이 없는 상태이다. 지하방의 경우 서울 다세대 또는 다가구주택에만 22만여 가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조사가 이뤄지지 않은 단독주택, 연립주택을 감안하면 실제 훨씬 많은 지하방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한국도시연구소, 2003b).

미인가숙박소는 2003년 4월 현재 전국적으로 10,479개에 약 만 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발생 무허가주거지는 서울에만 28개 지역이 있고 여기에는 3,900세대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수도권까지 포함시킬 경우에는 1만여 세대 이상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5천 명 내외로 추산되고 있지만 실제 규모가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노숙인과, 이보다 넓은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할 홈리스 문제도 있다. 이들은 주거권이 심각하게 침해된 상태이며, 가장 우선적으로 대응해야 할 정책 대상임에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심각한 주거 위기의 문제가 지속되고 있는 것은 주택정책 특히 공공임대주택 정책과 주거비 보조 등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책 수단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심각한 주거 위기를 겪고 있는 이들의 문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면, 비록 충분한 자원 배분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정책의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우리 사회는 이제 가장 심각한 주거 위기에 대응하기에 아직 경제적인 발전 수준이 낮고 자원이 부족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단지 기본적인 주거에 대한 권리를 정책적으로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무엇보다 정부의 주거권에 대한 의식 변화와 제도와 정책 개선을 위한 노력이 요구된다. 이와 함께 주거권 침해의 사례로 언급되곤 하는 강제 퇴거의 문제에 대해서도 제도적인 정비를 더 이상 미루지 말아야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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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2003, 늘어나는 거리노숙인 대책은 없는가, 심포지움 자료집, 서울: 노숙인다시서기지원센터.

박신영, 2003, “주거빈곤가구의 특성”, 한국의 주택, 대전: 통계청.

서울시정개발연구원·한국도시연구소, 2003, 서울시 재개발지역 주민을 통해 본 재개발사업.

조성준, 2003,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Homeless, 전실노협, 11·12월호, pp.31-33.

한국도시연구소, 2003a, 무허가 주거지역에 대한 전기공급의 법적 근거 및 공급방법 개선검토에 관한 연구보고서, 서울: 한국도시연구소.

한국도시연구소, 2003b, 지하주거공간과 거주민의 실태에 관한 연구, 서울: 한국도시연구소.

Randall, Geoffrey, 2000, Housing Rights Guide, London: Shelter.

Steering Committee on Social Policy, 1993, Social Cooperation in Europe: Homelessness, Strasbourg: Council of Europe Press.

United Nations Human Settlements Programme(UN-HABITAT) & Office if the High Commissioner for Human Rights(OHCHR), 2002, Housing Right Legislation : Review of International and National Legal Instrument (United Nations Housing Rights Programme Report No. 1), Nairobi: UN-HABITAT & OHCHR.

서종균 / 한국도시연구소 전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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