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1 2021-01-01   753

[기획1] 왜 시민인가?

최영준 연세대학교 행정학과 교수

 

들어가며

며칠 전에 배달노동자들과의 집단표적면접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40대 배달노동자들의 안타까운 분노와 토로 옆에 20대들은 ‘심각한 무언가를 말해야만 하는가’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고용보험 이런 거 잘 모르구요,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돈 벌고 제가 좋아하는 게임하고 음악도 배웁니다. 저는 배달이 좋아요. 20대는 말을 짧게 던지고 이 귀찮은 면접이 언제쯤 끝이 날까 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일까? 누군가는 어른스럽고, 누군가는 철이 없는 것일까? 결혼이나 아이 갖는 것을 거부하는 이들은 정상이 아니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어른들은 정상일까? 학자로서 연구를 하면서 답하기 어려운 것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것을 매년 더욱 깨닫고 있다. 그러면서 희미하게 깨닫는 것은 무엇이 정상인지를 누군가가 정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정부가 혹은 사장님께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중장년이 결정하고 청년들은 따라오는 것 역시 아니다.

유럽 사회정책계의 석학인 그레이엄 룸Graham Room 교수는 개인을 ‘agile actor 민첩한 행위자’라고 묘사하며, ‘울퉁불퉁’하고 어려운 시기를 기민하게 항해해가고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이 글에서 주장하고자 하는 논점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불확실성이 극대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지난 20년을 돌아볼 때 국가와 시장과 같은 ‘BIG players’들만이 쌓여가는 난제들을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제 국가는 개인에게 안정을 부여하고, 이들이 자유롭게 사고하면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지지해 주는 것이 불확실성 시대를 맞이하는 패러다임의 방향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이 패러다임이 과거로 돌아가는 회복이 아닌 미래로 가는 초회복이라고 주장하며, 파편화된 ‘small players’들이었던 시민들이 만들어갈 미래라고 주장하고자 한다.

 

앙상한 시민사회를 다시 거론하는 이유

저자도 그렇지만, 최근 유난히 1997년 경제 위기부터 현재까지를 다시 복기하는 학자들이 많다. 지난 약 20년 동안 어떠한 변화들이 일어났고, 우리가 그러한 문제들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대응했는가를 묻고 있다. 이미 공유가 되었듯이 비정규직, 노인빈곤율, 저출생, 영세자영업, 여성경력단절과 젠더임금격차, 기후변화 등 문제는 지속적으로 심각한 문제라고 제기되었지만, 난제로 화석화되어가고 있는 이슈들이 우리 사회에는 가득하다. 각각의 이슈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문제해결을 넘어 왜 이것이 문제인가라는 질문부터 다시 시작해야 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비정규직은 정규직화하면 될 문제였을까, 누가 저출생을 사회적 위험이라고 정의하는가 등만 논의를 해도 몇 십 페이지를 가득 채울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러한 문제를 정의해왔고 풀어가려고 했던 핵심 행위자였던 국가와 시장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지만, 점차 문제해결에 한계를 노출하고 있다. 여러 사회경제 지표들을 넘어 국가의 역할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 정도의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첫째 우리는 끊임없이 국가가 문제를 해결하기를 요구하며, 그 책임을 묻는다. 복지국가를 위해 더 큰 국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료적’ 국가가 커지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이다. 더 큰 국가인데 관료적이지 않은 국가? 여기에서 두 번째 딜레마가 발생한다. 더 투명하고 열려 있는 국가가 되면 좋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투명하고 열려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부패나 기업에 포획된 정부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멋진 이력서를 누가 가지고 있는가? 지난 정부에서 정부의 인사를 책임지는 부처의 수장에 삼성 인사전문가가 임명된 적이 있었다. 개방적이면서 공공성이 높은 정부는 어떻게 가능할까? 마지막은 숙의와 결단의 딜레마이다. 각 난제들에 대해서 더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더 들어주기를 원하는 동시에 시민들은 시급한 문제에 대해서 국가가 빨리 결단을 내려주기를 원한다. 숙의를 충분히 하면서 결단력 있게 시행하는 국가를 원하는 것이다.

또 다른 BIG player인 시장은 어떤가? 시장은 개인의 욕구와 결핍을 채워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를 가능하게 하며, 개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 사회문제를 해결해왔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시장에서 박수를 받는 혁신은 일자리를 줄이는 것, 임금을 낮추는 것, 더 많이 소비하게 하는 것이 되었다.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줄어들며, 생태위기는 지속적으로 확대시키는 방향이다. 플랫폼 노동자들은 21세기형 테일러주의에 노출되며, 노동소외의 높은 강도를 경험하고 있다. 탈산업 사회와 디지털 자본주의가 강화시키는 불평등은 이제 돌이킬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한다.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이 문제해결 능력을 상실해가고 있는 시기에 또다시 국가가 더 큰 권력을 부여해야 할지, 시장에게 더 자유를 허락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제 지난 20년 동안 질주하는 시장과 증가하는 GDP, 그리고 커져가는 국가 뒤에서 앙상하게 서 있는 시민권력과 시민사회를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카고대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라잔Rajan 교수(2020)가 이야기했듯이 이제 국가와 시장의 뒤로 밀려있었던 ‘제3영역’을 회복시켜야 할 때이다.

강한 공동체와 시민사회 영역은 국가와 시장으로 기울어졌던 사회의 균형을 회복시킨다. 유럽 복지국가의 경험을 통해 유추하면 관료적 국가를 문제 해결하는 공공(public)으로 변화시키고, 개방적인 정부임에도 기업의 이익으로부터 절연된 정부가 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지속적인 숙의 공간을 제공함으로 중요한 시기에 과감한 결단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기도 한다. 시민사회는 시장에 사회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끊임없이 이윤에 몰입하는 시장을 사회적 가치 창출의 협력자가 되도록 압력을 넣기도 한다. 그게 지역의 공동체, 노동조합일 수도 있고, 다양한 비영리 기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지난 20년은 어땠을까? 아시아 어느 국가보다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옹호자로서의 시민사회는 ‘시민 없는 시민사회’라는, 제공자로서의 시민사회는 (국가와 기업의) ‘종속적 대행자’라는 진부해져버린 비판이 여전히 유효한 것이 현실이다.

밑의 그림과 같이 사회적, 환경적, 공익적 목적의 활동을 최근 시작하고 있거나 현재 수행하고 있다고 응답한 비중이 1.8%로 다른 국가들에 비해서 월등히 낮다.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던 시민사회의 여러 아젠더들은 어느덧 정부의 아젠더가 되었고, 시민사회는 이를 실현하기 위한 인력과 자원 동원의 행위자가 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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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 시민과 역동적 시민사회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은 이렇게 약할까? 이 물음에는 많은 답이 가능하다.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던 가부장주의와 집단주의가 가장 먼저 지목될 수 있다. 여전히 개인의 실질적 자유보다는 실체가 때로는 불명확한 집단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여겨왔다. 이러한 유산을 최장집(2011:71)은 “보수/진보 모두 국가주의, 발전주의, 경제적 민족주의 등 민족주의적이고 집단(합)주의적인 반자유주의적 경향성을 공유하게 되었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유산과 함께 개인의 불안정성은 또 다른 중요한 원인이 된다. Lindqvist and Sepulchre(2016)은 건강한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적극적 시민성의 원천을 자율(autonomy), 안정(security), 영향(influence)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즉 기존에 적극적 시민을 정치적 참여나 사회적 영향의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것을 넘어 적극적 시민성은 자유와 안정성 위에서 구현이 됨을 지적한 것이다. 우리의 맥락에서 이를 풀어보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직장에서 장시간 근로와 일과 업무에 있어서 자율성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유와 안정을 구현하기는 쉽지 않다. 특히, 불안정성에 대한 전망이 커지는 상황에서 개인의 협상력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적극적 시민성을 기대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다. 스웨덴에서 20세기 중반 강한 사회(Strong Society)를 주창했던 타게 엘란데르Tage Erlander 총리는 안정은 개인의 힘으로 풀기에 너무 어려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복지국가가 강한사회의 필요조건임을 주장한 바 있다(Berman, 2011).

하지만 20세기 안정성을 지지했던 여러 제도적 장치들은 녹아내리고 있다. 가족과 친족, 일자리를 계속 생산했던 시장, 고용가능성을 높였던 교육제도, 탈상품화를 제공했던 복지국가, 그리고 약한 개인의 협상력을 대신했던 노동조합까지. 서구 복지국가도 그러하며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약해진 개인의 안정성은 개인의 실질적 자유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자유와 안정이 수레의 양 바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러한 상황에서 남은 영향은 공적 영향보다는 생존을 위한, 이익을 붙잡기 위한 영향력 발휘로 국한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 저자는 2018년과 2020년의 전 국민 조사를 통해 자율, 안정, 영향의 수준을 묻고 세 가지가 모두 있는 적극적 시민과 세 가지가 모두 결핍된 수동적 시민을 비중을 산출한 바 있다. 2018년에 적극적 시민은 30.8%였으며, 2020년도 크게 다르지 않게 32%였다. 즉, 나머지 70% 정도는 하나 이상의 결핍을 보이고 있었다. 이 중 세 가지가 모두 결핍된 상황이라고 응답한 수동적 시민은 2018년 13%에서 코로나 시기인 2020년 8월 조사에서는 24%로 거의 두 배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적극적 시민과 수동적 시민은 여러 측면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적극적 시민이 월등히 행복했고, 더 창의적이라고 응답했으며, 더 많이 일하고 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적게 일하고 덜 돈을 버는 것을 선호했다. 사회에 대한 신뢰가 높았고, 복지국가나 조세태도에 더 지지적이었다. 세 가지 조건이 주어지면 개인들은 돈을 쫓고 경쟁을 쫓으며 만족을 추구하는 헤도닉(hedonic) 삶보다 자아실현을 하고 공적인 사회에 눈을 돌리는 유다이모닉(Eudaimonic) 삶으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초회복의 패러다임은 이러한 시민들이 결정하고 만들어나가는 자발적 공동체에 기반한다. 국가나 시장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이제 무엇이 옳은 것인가를 결정하고 제시하고, 판단하며 포용과 배제를 결정하는 권위적 주체에서 벗어나기를 제안한다. 피라미드의 제일 높고 작은 삼각형에서 제일 밑의 든든한 사다리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더 많은 재분배를 통해서 모든 개인들에게 안정성을 확보해 주고, 그 위에서 개인과 시민사회가 스스로 방향성을 숙의하고 설정하며,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개인의 자율성과 영향력을 가로막는 차별과 특권의 장벽을 없애고, 이들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들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시장의 부정적 힘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며, 숙의할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주는 행정적이고 재정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시민사회를 식민지화하거나 대행자로 삼으며, 크레딧을 가져가려는 유혹을 떨쳐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시민들이 주도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본적 셋팅이 마련되게 될 것이다.

 

일단락하며

10대 후반부터 배달을 시작해서 배달이 자신의 커리어가 된 청년은 정상이다. 이 청년이 언젠가 버젓한 정규직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중년도 정상이다. 특정한 경험을 한 이를, 그 경험을 하지 못한 이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디지털 자본주의 하에서 우리 사회가 가져온 보수나 진보의 ‘정상성’은 그 어느 때보다 도전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것에 ‘정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보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존엄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 자율성을 발휘하면서 사회와 소통할 수 있는 일상적 통로와 공간에 익숙하게 하는 것, 그것이 국가도 우리 전문가들도 목표로 해야 할 타깃이 아닐까.

최근 동료들과 ‘코로나 0년 초회복의 시작’이라는 책을 펴내면서 네 가지 초회복의 비전을 제시한 바 있다. 첫째는 연대적 공존이었다. 더 적극적 공존을 의미한다. 개인과 개인이, 개인과 집단이, 집단과 집단이, 개인과 환경의 공존이다. 둘째는 자유안정성이다. 개인이 시민이 되는 가장 기본을 자유와 안정으로 보았다. 셋째는 디지컬라이제이션(Digicalization)이었다. 디지털화와 지역화를 혼합한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보았다. 디지털화가 진행될수록 지역이라는 공간이 더욱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자아실현적 동기화(Eudaimonic motivation)이다. 스크린 앞에서 공부하고 일하는 이들에게 동기화가 없다면 ‘척’하는 것을 벗어날 수 없다. 또한, 개인이 어떻게 헤도닉 삶에서 벗어나 자아실현적 삶으로 이행할 수 있을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교육도, 일도, 그리고 관계도 그렇다. 이 네 가지 원리는 서로가 서로를 강화시키는 구조라고 믿고 있다.

이 네 가지 원리를 제시하는 것은 그만큼 이들이 도전을 받는 시기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연대보다는 경쟁과 착취가, 자유안정보다는 권위와 불안정이, 지역이 사라지는 디지털화가, 유다이모니아보다는 헤도니아가 지배하는 사회로 갈 가능성이 그만큼 높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막 새로운 역사의 장(Chapter)를 시작하는 이 때 개인과 시민사회를 주체로 세우는 작업은 너무 소중하고, 늦출 수 없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아젠더는 급진적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최장집. (2011).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에서. 최태욱 편집, 자유주의는 진보적일 수 있는가 (66-107). 서울: 폴리테이아.

최영준 외. (2019). 포용국가와 혁신. 연세대학교 산학협력단.

Berman, S. (2011). Social Democracy and the creation of the public interest. Critical Review, 23(3), 237-256.

Lindqvist, R., & Sépulchre, M. (2016). Active citizenship for persons with psychosocial disabilities in Sweden. ALTER-European Journal of Disability Research/Revue Européenne de Recherche sur le Handicap, 10(2), 124-136.

Rajan, R. (2020) The Third Pillar: How markets and the state leave the community behind. Penguin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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