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21 2021-04-01   807

[동향2] ILO기본협약 비준이 갖는 의미와 남은 과제

ILO기본협약 비준이 갖는 의미와 남은 과제

 

윤효원 아시아노사관계 컨설턴트

 

국회가 지난 2월 26일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 이하 ILO) 협약 29호, 87호, 98호의 비준 동의안을 의결했다. 1991년 12월 9일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한 지 이십 년만이다. 1차 대전과 러시아 볼셰비키혁명의 산물로 태어난 ILO는 “사회정의 없이는 항구적 평화 없다”는 구호 아래 국제적인 노동법, 즉 국제노동 기준을 만들어왔다. 평화의 전제는 사회정의의 실현이고, 사회정의는 국제사회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노동 기준의 실천을 통해 이룰 수 있다는 게 ILO의 정신이다.

 

이름에 들어간 ‘노동(Labour)’이란 단어때문에 ILO를 대단히 진보적인 국제기구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전쟁과 혁명의 산물인 ILO는 세계 전쟁을 예방하고 공산주의 혁명을 억제하려는 보수적인 목적을 갖고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같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만들어낸 합의인 파리강화회의의 베르사유협정에 따라 정부-사용자-노동자의 3자 기구로 등장했다. 1917년 11월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셰비키혁명이 없었다면 지금의 ILO는 없었을지 모른다. ILO는 공산주의 혁명에 대항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안전판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ILO 협약이란 무엇인가

 

1919년 가을 워싱턴에서 열린 창립대회에서 하루 8시간과 주 48시간을 규정한 ‘일의 시간(hour of work)’ 1호 협약을 채택한 이래, 지난 백 년 동안 ILO는 노사정 3자 합의를 통해 모두 190개의 협약을 만들었다. 이들 190개 협약은 세 가지 범주로 나눠지는데, 기본협약(Fundamental Conventions, 8개), 우선협약(Priority Conventions, 4개), 기술협약(Technical Conventions, 178개)이 그것이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법이고, ILO가 만든 협약들도 시대 변화에 영향을 받게 마련이다. 그 결과 ILO는 정기적으로 협약들의 상태를 평가하여 최신(up-to-date), 잠정(interim status), 개정 필요(to be revised), 구식(outdated), 폐지(abrogated), 철회(withdrawn) 등으로 협약의 지위를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거쳐 ILO는 187개 회원국 정부가 제도와 정책에 반영해야 할 협약으로 74개를 골라 놓았다(표 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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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협약’ 비준의 의미

 

ILO는 ◇결사의 자유와 단체교섭권의 실질적 인정(87호, 98호), ◇모든 형태의 강제노동 혹은 의무노동의 폐지(29호, 105호), ◇아동노동의 실질적 철폐(138호, 182호), ◇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 폐지(100호, 111호) 등의 4개 주제에 관련된 8개 협약을 “일터의 기본 원칙과 권리”를 뜻하는 기본협약으로 내세운다. 국제연합(UN)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는 ILO의 기본협약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노동기준”으로 평가하면서 해당 기구의 각종 정책에 반영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29호, 87호, 98호에 대한 비준 노력을 기울이기 전까지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기본협약은 아동노동 관련 138호와 182호, 차별금지 관련 100호와 111호 등 4개에 불과했다. 이들 4개 기본협약에 대한 비준은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때 이뤄졌다. 지난 2월말 국회가 기본협약 3개(29호, 87호, 98호)에 대한 비준동의안을 결의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기본협약 수는 4개에서 7개로 늘어나게 된다.

 

기본협약의 국무회의 통과와 국회의 비준동의안 결의를 두고 사용자단체들은 정부가 노동자 편을 든다고 호들갑을 떨지만, 기본협약 비준은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지지나 지원과는 상관이 없다. ‘강제노동’ 협약인 29호는 노예노동을 폐지하고 ‘자유로운 임금노동(free wage labour)’으로 대체하라는 내용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제 징용과 위안부가 바로 이 문제다. 1930년 6월 28일 열린 ILO 국제노동회의에서 채택돼 1932년 5월 1일 발효된 29호 협약을 일제는 1932년 11월 21일 비준했다. 90년 전 일본이 비준한 29호 협약을 2021년 한국 정부가 뒤늦게 비준한 데 불과하다.

 

‘결사의 자유’ 87호는 1948년 7월 9일 열린 ILO 국제노동회의에서 채택됐다. UN이 세계인권선언을 제정한 때가 1948년 12월 10일이고, 그 여섯 달 전에 만들어진 87호 협약은 당연히 유엔이 만든 세계인권선언의 기초가 됐다. 세계인권선언 20조는 “모든 사람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23조는 “모든 사람은 자기 이익의 보호를 위해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가입할 권리를 가진다”고 선언했다. 또한 대한민국헌법 21조는 “모든 국민은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밝혔다.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헌법에 보장된 결사의 자유를 되풀이한 국제 기준이 87호 협약이다. 87호의 비준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자본가만이 누려온 결사의 자유를 노동자에도 공평하게 보장하겠다는 정치적 약속에 다름 아니다. 결사의 자유는 자유와 민주의 출발점으로 노동권이 아니라 시민권에 속한다.

 

98호 협약은 단체교섭이 노동자에게는 권리이고 사용자에게는 의무임을 분명히 하면서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하는 데서 사용자가 해서는 안 될 ‘반노조 차별 행위(acts of anti-union discrimination)’, 즉 부당노동행위가 어떤 것인지를 규정하고 있다. 사실 부당노동행위를 저지른 사용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에 들어 있었다. 정부 관료와 법률가들이 주장하는 ‘선입법-후비준’ 입장에서 볼 때도 1991년 12월 대한민국 정부가 ILO에 가입할 당시 98호를 비준했더라도 국내법과의 충돌은 없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지적했듯이, 29호는 국가 권력에 의하 동원되는 강제노동을 폐지한다는 내용이므로 노동권이 아니라 기본적인 시민권에 관한 것이다. 87호는 결사의 자유와 노동자의 단체행동권을 보장한 헌법상의 기본권을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노동자의 단체교섭권을 보장한 98호의 내용은 이미 현행 법령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비준이 시기적으로 대단히 늦었다. 또한 기본협약의 또 다른 주제들인 아동노동의 폐지와 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 금지 역시 노동권이 아니라 초보적인 인권에서 다루는 문제들이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기본협약 비준은 대한민국과 국제 사회의 법과 제도 안에 이미 존재해 온 원칙들을 국회의 비준이라는 정치적 행위로 재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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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협약, 끝 아닌 시작

 

29호, 87호, 98호 협약에 대한 국회의 비준동의안이 의결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는 ILO의 8개 기본협약 중 7개를 비준하게 된다. 전체 190개 협약 중에서는 기존의 29개에서 세 개를 더해 모두 32개를 비준하게 되는 것이다. 국제노동기준, 즉 ILO협약 문제와 관련하여 국회의 비준동의안 의결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첫째, 언제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서를 ILO에 보내는지 살펴야 한다. 비준된 협약의 효력은 ILO가 해당 정부에게서 비준서를 받은 날로부터 일 년이 지나야 생긴다. 이 글을 쓰는 3월 22일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ILO에 비준서를 보내지 않고 있다. 이는 29호, 87호, 98호가 현재 국제법상으로 비준 상태에 있지 않으며, 2022년 3월 22일이 되어도 국제적으로 공인된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뜻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임기는 2022년 5월 9일 끝난다.

 

둘째, 기본협약의 하나로 ‘강제노동 금지’를 규제하는 105호의 비준 문제가 남아 있다. “현존하는 정치체제, 사회체제, 경제체제에 반대하는 정치적 견해 또는 사상적 견해를 표현하는 행위와 파업 참가를 처벌하는 수단”으로 강제노동을 악용하면 안 된다는 내용의 105호를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ILO 187개 회원국 중 11개에 불과하다. 브루나이, 중국, 일본, 라오스, 마샬 군도, 미얀마, 팔라우, 동티모르, 통가, 투발루, 대한민국이다.

 

중국은 공산주의 나라라서 비준을 안 한다 치고, 일본은 한국보다 민주주의가 덜 발달한 나라라서 비준을 안 한다 치자. 그런데 ‘촛불 혁명’,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 운운하는 대한민국은 왜 아직도 105호를 비준하지 않을까. 105호는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무회의에 안건으로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돼 있다. 헌법 22조는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미 우리 헌법에는 협약 105호의 정신이 반영돼 있다. 105호 협약에 대한 무관심은 홍콩의 국가보안법 문제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한국의 국가보안법 문제에는 둔감한 국내 분위기와도 연결되어 있다. 제 눈에 박힌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박힌 가시를 탓하는 격이다. 또한 105호 협약은 파업 참가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대한민국은 형법 314조의 업무방해죄를 악용해 파업 참가자를 처벌하는 나라다. 민주주의를 한다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파업 참가자에 대한 형사처벌은 19세기 말과 20세 초를 거치며 사라졌다.

 

셋째, 회원국 정부가 노동정책에서 우선해야 할 과제를 다루고 있는 우선협약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선협약 4개 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비준한 것은 노동(근로)감독 81호, 고용정책 122호, 삼자 협의 144호 등 3개에 불과하다. 우리 정부는 농업을 대상으로 한 노동감독을 규정한 129호 협약을 비준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는 농업을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고 있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근로기준법을 적용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비일비재한 현실은 5인 미만 사업장의 문제임과 동시에 농업과 어업 같은 업종의 문제이기도 하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없이는 버티기 힘든 한국의 농업 현실을 고려할 때 129호의 비준은 노동시장의 맨 밑바닥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주노동자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넷째, 아직 비준되지 않은 협약을 새로이 비준하는 노력과 동시에 이미 비준된 협약의 내용들이 법령에 제대로 반영되어 있는지, 또한 제도로 만들어져 효과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비준(ratification)은 법령과 정책과 관행을 해당 협약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을 말한다. 법과 제도에서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꼼꼼히 따져보아야 할 대표적인 협약들로는 19호(산재보상에서 외국인 균등 처우), 47호(주 40시간), 100호(동등 보수), 111호(고용과 직업에 따른 차별), 115호(방사선 보호), 139호(직업암), 155호(직업안전보건), 170호(화학물질), 182호(최악의 아동노동) 등을 꼽을 수 있다.

 

다섯째, ILO협약의 대다수를 이루는 기술협약을 비준하는 캠페인을 벌여야 한다. [표2-1]에서 보듯 노동자들이 생애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일의 세계(the world of work)’에서 일어나는 핵심적인 문제들인 근무시간, 고용, 직업훈련, 임금, 안전보건, 사회보장, 이주, 모성보호와 관련된 협약들은 모두 기술협약으로 분류된다. 사회보장과 사회정책에서 ILO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10개 협약 가운데 우리 정부가 비준한 협약은 단 하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복지가 엉망인 이유를 설명하는 하나의 지표다. 또한 간호인을 위한 근무 환경의 표준화를 강조하는 149호와 재택근무의 조건을 설명하고 있는 177호는 코로나19 전염병 상황에서 정부 정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잡아준다. 이런 점에서 기술협약들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겪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개선하는데 필요한 ‘핵심 협약(core conventio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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