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복지동향 2019 2019-07-10   2943

[복지칼럼] “민영화”라 부르지 말고 “시장화”로 불러라

“민영화”라 부르지 말고 “시장화”로 불러라

 

윤찬영 전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필자가 한창 사회복지학의 초심자로 열정을 불태우던 시절은 오히려 복지가 위기에 처해 있었다. 대처리즘(Thacherism)이 지배하던 당시에는 ‘복지국가 위기론’이 득세하여, 그 이전에 성행했던 ‘복지국가발달론’을 밀어내며, 양측의 이론이 서로 불을 뿜던 시절이었다. 그 때 필자와 필자의 동학(同學)들은 복지국가 위기론 타도를 위해 모자라는 지력(知力)을 쥐어 짜가며 혼신의 힘을 다 했던 것 같다. 국가복지는 물론 사회복지 전반적으로 일천한 나라에서 공부하면서 마음과 정신으로는 복지국가를 사수하는 전사(戰士)였다.

 

그 때 신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로 불리웠던 대처 진영에서 들고 나온 신무기가 ‘Privatization’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공포가 전율하던 전두환의 제5공화국 치하였다. 대처의 검법이자 신무기인 이 단어를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사영화(私營化)와 민영화(民營化)가 경쟁하다가 쉽게 ‘민영화’로 정리되었다. 당시 우리는 오랜 군사독재체제에 저항하던 터였다. 모든 것을 관(官)이 주도하던 시대라 경제도 관치경제였다.

 

지긋지긋하던 관(官)의 지배체제에 대항하여 ‘민(民)’을 내세우는 것은 민주화(民主化)와 통하고 정서적으로도 위안이 되고 보상받는 느낌을 주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가 `90년대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민영화’라는 말이 별다른 저항 없이 정치권과 언론에서 난무할 정도로 쓰여 왔다. 얼떨결에 민주화와 민영화는 크게 보아 동질적인 부류에 속하는 것처럼 취급되어 왔다. 순전히 ‘민(民)’에 대해 모호하면서도 감성적으로 바친 순정의 결과이다. 민영화가 엄청나게 효율성을 찾고 돈을 밝히는 것이라는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눈치 채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민영화는 공공성을 생명으로 하는 공동체주의나 국가책임주의에 반(反)하는 지향이다. 민영화의 정체성을 반영한다면, ‘자본화’ 또는 ‘시장화’가 정확한 이름일 것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포용적 국가를 지향한다. 그래서 사회서비스의 공공성을 매우 강조하고 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국가 및 자치단체의 책임으로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공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민영화를 철저하게 배격해야 한다. ‘민(民)’은 두 가지 차원으로 분리해서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반관료적이거나 반권위적인 민간사회를 뜻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효율성을 추구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자본과 시장을 뜻하는 것이다. 전자(前者)의 ‘민’과는 소통과 협력을 추구하는 민·관 협력체계를 도모해야 하고, 후자(後者)의 ‘민’에 대하여는 철저히 경계하여 공공성의 가치를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모든 존재의 이름은 중요하다. 특히나 국가의 정책에서 명칭이 갖는 가치나 지위는 더욱 그러하다. 처음에 붙여진 이름이 오랫동안 지배하고 고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래서 모든 정책은 처음 나올 때 제대로 이름을 지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 ‘민영화’의 가면을 벗겨 내고 ‘공공성’과 ‘공익’의 이름으로 복지의 가치를 실현해야 할 것이다. 특히 민·관 협력의 파트너인 ‘민’과 민영화의 실체인 ‘민’을 정확하게 구분해야 할 것이다. 이제 민영화 대신에 ‘시장화’로 불러 의미의 혼란을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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