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10-02-12   1740

[기고] 민관 협치의 종언…YS 시절로 회귀

경실련과 건강세상네트워크는 왜 빠졌을까?

# 사례 하나

국민건강보험법 상 매년 국민에게 부담시킬 보험료율과 의료인들의 의료행위에 대한 단가라 할 수 있는 수가(酬價)를 결정하고 우리나라 건강보험 정책 전반에 대해 중요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라는 복지부 산하 위원회가 있다. 이 위원회의 위원은 모두 25명이며, 가입자를 대표하는 각종 단체에서 8명(민주노총, 한국노총, 한국경영자총연합회,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음식업중앙협의회, 경실련 등), 공급자를 대표하여 8명(의사협회, 병원협회, 한의사협회, 간호협회, 제약협회 등), 그리고 공익을 대표한다는 이들 8명(보건복지부, 기획재정부, 건강보험공단, 보건사회연구원 등), 모두 24명이 보건복지부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여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월 초 복지부는 임기를 다했다는 이유로 경실련이나 가입자단체에겐 어떤 상의나 의견을 구하는 절차 없이 경실련 대신 ‘바른사회시민회의’로 대체해버렸다. 건정심이 만들어진 2002년부터 가입자인 국민의 건강권 보장과 적절한 보험료부담을 위해 다른 시민사회노동단체와 연대하면서 활약해 온 경실련을 아주 간단히 배제해 버린 것이다. 이유는? “오래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음식업중앙협의회처럼 똑같이 오래되었으나 실제 건강보험제도의 의사결정에는 실질적 기여도가 없었던 곳에 대해서는 이러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바른사회시민회의란 단체는 보수단체이고 건강보험에 대한 전문적 활동도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 진정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 사례 둘

국민연금 기금은 지난 해 말로 270조원에 이르렀다. 이 엄청난 규모의 기금을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가입자들이 과반수를 점하는 일종의 사회적 합의기구에서 논의하라는 취지로 DJ정부 시기인 1999년 국민연금법이 개정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당시의 재경부장관이 거의 국가재정정책의 보완수단으로 국민연금기금을 쌈지돈처럼 주무르던 시절이었으니 엄청 획기적인 전환이었던 셈이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운용위)로 불리는 이 위원회는 개정법 이후 재정부 장관이 아니라 복지부 장관으로 위원장을 바꾸었다. 또한 전체 20명 가운데 근로자 대표 3인, 사용자 대표 3인, 지역가입자 대표 3인을 포함해 12명이나 가입자단체 자격으로 포진시킴으로써 가입자단체가 과반수를 넘기는 구성을 보여 가입자를 대표하는 각종 민간단체들과 복지부의 협력적 관계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2008년 8월 복지부는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제출하였다. 기금운용위의 상설화를 추진한다면서 사회적 합의라는 대전제를 무시하고 기금운용위 위원을 7명으로 축소하며 그들 전원을 민간금융전문가로 구성하는 내용이 개정안의 핵심 중 하나이다. 이 개정안은 국회 관련 상임위에서 논의되었으나 공전중이다.

금융전문가들에게 GDP의 50%까지 쌓여갈 기금의 운용을 맡겨 버리겠다는 발상은 정말 과감하기 그지없다.

# 사례 셋

국민건강보험공단 내에는 건강보험재정운영위원회(이하 재정운영위)가 존재한다. 애초 1999년 국민건강보험법 탄생 시에는 건강보험의 재정운영과 관련하여 가장 핵심인 보험료의 결정을 가입자가 2/3나 차지하고 있는 30명 규모의 이 위원회에서 행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2001년 건강보험 재정파탄을 계기로 수입의 핵심인 보험료와 지출의 핵심인 수가를 한 단위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를 내세워 건정심에 그 기능을 이관하였다. 따라서 지금은 공급자단체와 공단이 수가를 계약에 관여하거나 기타 보험재정에 관련된 사항을 포괄적으로 논의하는 위원회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건강보험 재정의 84%를 보험료로서 충당하고 있는 가입자들이 건강보험과 관련하여 적극적으로 건강보험제도와 건강보험공단에 대해 의견을 내고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주요 단위임은 사실이다.

재정운영위의 가입자단체로서 활약하던 건강세상네트워크가 2008년 8월 공식적인 임기만료가 되었다. 건강세상네트워크는 관례대로 연임이 예상되었으나 한국선진화재단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건강세상네트워크가 보건의료소비자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라면 한국선진화재단은? 궁색한 답을 찾으려면 찾겠지만 결국 이렇게 대체된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지 않겠나?

들어라 관료들아!

이러한 일련의 흐름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복지정책에 있어 가장 핵심인 민간과의 파트너십, 민과 관의 협치(協治)가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보건복지부 역시 1998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이다.

군사독재시절과 그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소위 문민정부 시절까지 정부는 대단히 권위적이었고 정책의사결정에 있어서도 독점적 지위를 고집하고 있었다. 국민은 정책 집행의 대상자이자 순응해야 할 존재이며 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관료와 위정자들만이 있었을 뿐이다. 국민의 욕구나 정책 수요에 대한 확인작업은 번거로운 일이었고, 국민과 정책집행 방식을 논의하고 의사결정권을 공유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복지부문에서는 DJ정부 들어서부터 이러한 관료독점의 구도가 상당정도 수정되기 시작하였다. 특히나 재원의 대다수를 국민들이 가입자가 되어 조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관료독점 하에서 일방적으로 집행당해왔던 사회보험의 영역, 그중에서 국민연금제도와 건강보험제도에 있어서 새로운 의사결정구조(governance)를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정부와 관료의 행정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그로부터 초래되는 정부와 관료의 실패가 가져오는 폐해가 너무 큰 것이 이유이겠지만, 근본적으로 의사결정 자체가 정부의 배타적 권한이 아니라 국민과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공공재에 해당한다는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발상에 근거하여 시민사회노동단체의 존재감이 중시되고 정부와 국민사이의 가교 역할이 부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협치의 의사결정구조는 때론 시민사회노동단체의 전문성 부족이나 역량의 한계, 단체의 문제점으로 그 취지를 달성하지 못하고 국민의 옹호자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정부 역시 여전히 수많은 협치의 위원회를 진정성 있게 수용하고 겸허한 자세를 취하기는커녕 여전히 통과의례의 장으로 생각하거나 형식적 합의구도로 위상을 절하하려는 경향으로 인해 많은 갈등이 끊임없이 야기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에 있어서는 수가 및 약가의 결정과정에서 앞에서 말한 건정심의 인적 구성에 있어 과도하게 의료공급자의 비중을 높이고 무늬만 공익인 정부와 그 산하기관의 전문가 등이 결정력을 갖는 한계로 인해 수많은 파행적 결과를 낳았다. 반면 건강보험의 보장성 수준을 현재의 60%를 갓 넘기는 수준에서 획기적으로 강화하는 과제나 수가지불체계를 현재의 행위별 수가제에서 포괄적 수가제로 넘기는 문제, 건강보험 재정의 1/4을 점하는 약제비의 거품을 제거하는 일 등은 여전히 진전을 못 보는 한계를 노정하였다.

국민연금에 있어서도 여전히 기금운용의 주도권을 기획재정부 장관이 행사하는 듯, 주식시장의 침체기마다 연금·기금의 투입설을 그가 앞서서 이야기하고, 시민사회노동단체의 장들이 가진 비전문성을 들먹이며 간단한 조찬 회의를 열어 이미 짜인 각본대로 안건을 통과시킴으로써 비상설기구에 의한 연금기금운용의 불안정성을 그대로 노정시키고 있다.

또한 2007년에는 국민들의 비판이 거셌고, 시민사회노동단체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연금급여율을 20년에 걸쳐 20%포인트나 감소시키는 개악을 과감히 감행하기도 했다. 당연히 기금운용위의 상설화에 대한 바람직한 방안 도출이나 기초연금제의 도입, 과도한 연금기금의 적절한 투자처 모색 등의 과제 또한 적절한 해법에 대한 모색 없이 표류하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여년 간 실험적으로 구사되었던 새로운 협치의 구도는 분명 시대적 흐름을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복지정책의 의사결정체계에 중요한 변화를 야기하는 것이었다. 사실 국민연금제도나 건강보험제도는 다른 어떤 제도보다도 국민의 불신이 강하고 제도의 왜곡에 대한 후유증이 심각한 제도여서 가입자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최근 10년동안 제도의 파탄이 방지되고 이만큼의 제도의 성숙을 가져온 것이 크게 보면 이러한 협치구도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복지부 관료들이 이 점을 생각한다면 종전의 협치구도가 번거롭고 그들이 보기엔 상전을 모시듯 성가신 존재들과 서로 다른 관점과 전망을 갖고 입씨름을 한 것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를 인정해야 한다. 의사결정권을 독점적으로 향유하고 이러한 과정을 생략했다면 신속하고 거침없이 결론은 도출했겠지만, 그 후폭풍을 스스로 감당하는 일로 엄청난 행정비용을 감수해야 했고 심지어는 제도에 대한 거부투쟁에 바람 잘 날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최근 앞에서 사례로 들었다시피 사회적 합의구조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전문성이나 기여도에 상관없이 정권의 풍향계가 가리키는 대로 가입자의 대표자를 일방적으로 갈아치우고, 아예 시민사회의 존재를 부정해버리는 행위를 서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신중하게 자성해 보아야 한다.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는 비아냥 소리에 모르쇠로 일관할 수는 있겠지만, 향후 기존의 최소한의 협치구도 하에서 얻어진 사회적 합의를 위한 최소한의 신뢰마저도 걷어치워 버린다면 결국 홀로이 향유하고 행사한 관료의 행정독점권이 몰고 올 후폭풍마저 모르쇠로 일관하기 어렵게 될 것이 뻔하다.

목동이 선하면 양들도 선하다고 한다. 목자가 포악하면 양들마저도 거칠게 마련이란다. 포악한 목자 밑에서 선한 양을 기대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일지는 몰라도, 공무원은 양이 아니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갖는 것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이태수 /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 2월 12일자 기사 <의제2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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