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위원회 칼럼(sw) 2009-04-23   996

1천만이 ‘박탈의 트라이앵글’에 빠진 한국


[의제27 ‘시선’] ‘민생위기’ 속에 ‘민생혁명’을 고민할 때


10여년 전 IMF 경제위기를 맞은 ‘한국호’는 직격탄을 맞아 일거에 침몰한 선박이었다면, 오늘날의 경제위기에 처한 ‘한국호’는 강한 돌풍에 휘말려 방향타를 잃고 어디에선지 모르게 물이 새어 서서히 침몰하는 선박과 같은 꼴이다. 그러다 보니 오늘 우리 안에 위기를 체감하는 정도와 속도는 제각각이다. 이미 위기를 벗고 있다는 안이한 생각이 엿보인다. 아니 아직도 위기를 위기로 보지 않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미 거시경제지표가 살아나고 있어 선진국 중 경제회복 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말로 그 안이함을 드러내는 정부 인사들이 바로 그 표본이다. 진정 현재를 위기로 보고는 있는 것인가?


현재의 경제위기는 그간 한국경제가 구축해온 물적자본 위주의 성장이 가져온 한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결과이다. 특히 세계 경제위기 앞에서는 그 취약성이 노골화되는 특성도 여실하다. 국내 산업기반이 취약하고 금융민주화가 미진한 상태에서 지식기반사회에 필수적인 기술진보의 주체인 인적자본이 소진되어감으로써 더 이상 성장의 동력을 내생적으로는 찾을 수 없는 한계 말이다.


이 한계를 떨치기 위해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 완화, 내수기업과 수출기업 간의 분절 구조 극복, 금산분리 등 금융민주화 수립 등 거시경제차원의 구조적 접근도 중요하지만, 성장동력이자 주체인 인적자본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90년대 초반 경제위기를 맞아 초기에 우파정부가 사회복지를 축소하고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을 펼쳤으나, 그 실패를 직감하고 좌파와 우파의 합의를 거쳐 정책방향을 급선회하여 인적자본 육성에 올인한 ‘노키아랜드’의 핀란드. 그 예가 이렇게 절실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는 사람에 대한 투자가 있었던가? 무한 경쟁에 의해 정글 속에서 발버둥쳐온 우리를 옭매고 있는 것은 오히려 ‘박탈의 악순환’이다. 최근 한국사회의 저소득층이 겪고 있는 이 박탈의 악순환은 경제위기 하에서 그 힘을 더욱 배가 시키고 있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그 악순환의 구조란 저임 비정규직 노동자층과 저소득자영업자층, 그리고 실직자층으로 표현되는 트라이앵글을 벗어나지 못하고 맴도는 것을 말한다. 추정에 의하면 2008년도 현재 그 규모가 1천만명에 육박한다. 저임금 비정규직 383만명, 저소득 자영업자 207만세대 578만명, 실직자 78만명이 합해진 숫자이다.


<그림 1> 한국사회에 현존하는 ‘박탈의 악순환’구조와 그 규모


이처럼 악순환의 트라이앵글에 빠지면 현재로선 수직적 상승이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저소득자영업자에서 실직자로,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다시 자영업자로 반복되는 ‘늪 속의 인생’을 사는 길만이 열려있다. 그러다가 결국 질병 혹은 장애 등에 의해 노동능력이 상실되거나 아예 노동의지가 제거되면 비경제활동인구가 되어 정부의 공식실업자군에서조차 탈락되는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런데 현재의 경제위기에 전율감을 떨치지 못하는 이유는 이 위기 국면에 의해 그 늪에 빠지는 인구가 커지고 있다는 데에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추정에 의하면, 1997년과 같은 강도의 경제위기가 온다면 빈곤층은 전인구의 10.6%에서 20.9%로 증가함이 예상된다. 이 중 기초생활보장수급권자 또는 고용보험급여자를 제외한 사각지대의 인구가 7.8%에서 17.0%로 늘어나게 되어 절대인구수로는 833만명이다. 그 중 440만명 정도가 새로이 유입되는 사각지대인구인 셈이다. 박탈의 악순환으로 대변되는 우리 사회의 거대한 늪의 먹잇감이 그렇게 늘어난다는 이야기다.


과연 이런 인구집단을 방치하고 우리 사회가 존속될 수 있다는 말인가? 존속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린 그 해법을 찾아야 하고 현재의 경제위기야말로 그 해법을 찾기 위한 합의점에 달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이기도 하다. 이명박 정부조차 휴먼뉴딜을 이야기하고, 30조원의 슈퍼추경을 편성하고 있으며, 이미 50조원에 달하는 ‘삽질뉴딜’까지 내놓은 마당이기에 국민적 합의만 이루어진다면 옛날식으로 ‘재정이 안된다’는 궁색한 변명은 더 이상 듣지 않아도 되지 않는 유리한 조건까지 추가되었다.


결국 이 박탈의 악순환을 끊어내는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대안이 있느냐가 필요하다면 이제부터 그 대안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림 2>이 그 핵심인데, 먼저 이 악순환에 빠진 이들에겐 가장 기본적으로 고용보험과 기초생활보장제도가 1차적 방어막이 되어야 한다. 현재 고용보험의 적용 대상과 급여기간, 급여액을 실질화하여 적어도 근로자로서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근로중단상태가 오면 의미있는 기간동안 실업급여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최저생계비 이하의 가구로 전락되면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발동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재산이 조금 있다는 이유로, 생계용도임에도 자동차가 있어서, 아니면 부양의무자가 있고 그네들이 부양비를 주고 있을 것이라 ‘간주’하여서, 그것도 아니면 부양의무자가구와 소득을 합산해보니 최저생계비의 120%가 넘어서… 등등 별의별 이유로 기초생활보장제도 상의 일곱가지 급여 중 하나도 받지 못한 채 거대한 규모의 빈곤층이 방치되는 현실이 존속되어서는 안된다.


<그림 2> 민생위기의 극복 대안


다음으로 2차방어막이 만들어져야하는데, 이는 실업부조의 도입와 개인파산제의 개선, 사회서비스의 확대 등이 핵심이다. 고용보험상의 급여기간이 끝난 장기실직자, 아예 고용보험대상이 되지 않는 자영업자, 고용보험에 가입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청년실업자를 위해 적극적인 고용알선이 결부된 실업부조제도가 필요하다. 아직도 파산자를 구제하기에는 한계투성이의 개인파산제를 현실화하는 것 역시 중요한 대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진정 강조할 부분이 바로 사회서비스의 확대인데, 이는 한국의 복지국가 구축을 위해서는 핵심요소이기도 하다. 이는 단순히 빈곤, 실직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국민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득보전 효과가 있는 정책분야이다.


지역사회 안에 고용과 복지, 학습을 연계시켜주는 공공인력이 배치되어 활동하고, 초중고교에 절대 부족한 교사가 늘어나며, 학교 안에도 사회복지사, 상담전문가, 심리치료사들이 배치되어 학생에 대한 종합적인 지원체계가 갖추어진다. 지역방문간호사가 가가호호 방문하여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주기적으로 체크해주며, 가정에서 돌볼 여건이 되지 못할 경우 가정에 가정복지사가 파견되어 아이의 양육과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역할을 수행해 준다. 또한 노인과 장애인의 수발을 위해서 요양서비스 및 수발서비스가 제공된다… 등등의 우리 사회의 모습, 이것이 인간다울 수 있는 나라아닌가?


이를 위한 공공인력의 충원과 그로 인한 사회서비스의 충분한 실행이야말로 국민이 세금을 내고 향유해야할 당연한 혜택이 아닌가? 따라서 국민 누구나에게 보장되는 사회서비스의 확대과정에서 악순환의 수렁에 빠진 이들의 삶을 지지하는 기반도 만들어지게 되어있다. 서구의 사회지출비가 GDP 중 30%내외를 차지하는 내용에는 이런 사회서비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결국 건강한 일자리가 우리 사회 자체에서 생성되어 자립생활의 안정적 기반이 만들어지는 3차방어막이 중요하다. 그러나 시장의 힘으로 일자리는 만들어진다는 고루한 생각에 빠져 있는 이들이 문제이다. 이제 일자리는 시장만이 아니라 공공부문에서, 그리고 공익적 성격을 갖는 앞에서의 사회서비스부문에서 인위적으로 생성되어야 한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역시 이런 관점에서보아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네들이 그 기관이 담당하는 공적 성격을 충분히 달성하고 있는가가 관건이지 인력이 모자라고 남고는 그 다음의 문제이다. 그러나 현재는 공공기관마저 수익성을 추구함은 물론 박탈의 악순환이란 늪속으로 멀쩡한 사람들을 내모는 선봉역할을 하는 몰지각을 자행하고 있지 않는가? 정부와 사회가 사회적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일자리를 공유할 수 있도록 제도적 유인장치를 만드는 일은 현재 기형적으로 커진 자영업부문을 줄여가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이런 1차, 2차, 3차의 방어막을 치는 일이 전국을 삽질로 만신창이로 만드는 일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일까? 민생을 위한 혁명적 발상은 오히려 민생의 위기 앞에서 가능하다는 이 비극적 희망을 어떻게 현실로 만들어가야 하는가? 이제 우리의 고민은 여기에 집중되어야 한다.


/ 이태수 참여연대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학교 교수

※이 글은 4월 23일자 프레시안 칼럼으로 실렸습니다. 기사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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