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공익활동가학교 26기] 산 자와 죽은 이의 경계

안녕하세요? 청년참여연대입니다. 

지난 눈내리는 수요일, 청년공익활동가학교는 수요집회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로인해 한동안 집회가 열리지 않았는데, 아주 오랜만에 가는 수요집회였답니다. 폭설이 내리는 추운 겨울, 수요집회에 참여하면서 참가자들은 무엇을 느꼈을까요? 

수요집회에 갔다가 전쟁기념박물관, 여성과전쟁인권박물관에도 다녀왔는데요, 국가폭력과 그것을 기억하는 형태가 어떻게 변화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후기는 공활 26기 신유진님께서 작성해주셨습니다. 


산 자와 죽은 이의 경계

신유진

전쟁 기념관과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보고 들은 것을 최대한 담은 초고를 지웠다. 다 쓸 수 없거니와 변변치 않은 글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신, 시설의 규모와 내외부 인테리어와 같은 맨눈으로 확인되는 차이와 객관적인 자료를 토대로 다시 썼고, 일본군 성노예제(위안부)와 베트남 전쟁을 두 축으로 전개했다. 논리를 갖다 댈 영역이 아니었으나,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신형철>), 나는 정확히 위로하기 위해 감정의 영역에 인식을 끌어다 쓴다. 시작하기에 앞서, 나는 우리 사이에 있는 결정적인 공통점을 짚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두는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 이것은 스스로 부정할 수도 없고 타인에 의해 침해할 수도 없는 인간의 조건이다.

1527회 수요집회 참석

1527회 수요집회. “날개는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그들은 군림하는가 우리를 포괄하는가 – 조국이 남긴 2만 5천 평의 기념비적 기록

“튼튼한 국가의 존립은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한 토대로써 가장 위에 국가가 있고, 그다음에 나와 너, 우리가 있다.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 ’호국 안보 공동체 의식‘은 우리가 모두 지향해야 할 최선의 덕목이다.”(전쟁 기념관 호국 추모실 회벽 문구) 전시관의 가장 처음에는 해당 전시의 취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서문이 있기 마련이다. 이 문장은 전쟁 기념관이 어떤 가치를 긍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있게 만든다. 홈페이지에 게시되어있는 건립목적을 보면 “(생략)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을 예방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과연 평화유지 활동이 군대를 파병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야 하는가? 국가 간 강력한 대응은 불가피하고 당연하지만, 확전을 부르짖는 방식을 피하면서 같은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애썼는가? 전쟁 기념관의 설립 의도가 ’전쟁을 예방하고‘, ’평화적 통일‘이라면, 애초에 전쟁 ’기념‘관이라는 이름부터 옳은 것인지 고민해야한다. 복역 중 이곳에서 진행하는 도슨트에 참여하면 포상 휴가가 주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스스로 국가임을 자임하는 핵심 권력자와 충성의 대상이 된 정부, 참전국 위정자, 유공자를 소홀히 대접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지었다고 역설하는 것 같았다.

광활한 야외 전시장만큼 내부도 넓었다. 잰걸음으로 쏘다니다가 글자를 속독하고 몇 개는 사진으로 남기고 지나갔음에도 다 보지 못할 규모였다. 1층 전쟁 역사관과 2층 6∙25 전쟁실, 3층 유엔실, 해외 파병실, 국군 발전실까지 장대하다. 호국 추모실 입구를 밝힌 전사자 명비와 참전국 기념비를 올려다보며 종교적 의례의 신성함과 전쟁의 비장미를 느꼈다. 높은 천장과 구 모양의 조형물, 창백하게 내려앉은 흰 빛과 순환하는 물은 신화적인 장치가 아닌가. 어떠한 이견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태도,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멈춘 시간을 곧이곧대로 읽지 않기 위해 비판적인 시각으로 봐야 하는 나는 내내 피로감을 느꼈다. 시대별 테마마다 ‘결과와 교훈’을 제시해놓았는데, 6.25 전쟁 테마에 새겨진 문장을 가져오면 이렇다. ”북한의 도발은 6∙25전쟁 중 말할 수 없는 야만성과 폭력성 그리고 잔혹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오늘날도 수십 만여 건에 이르는 정전협정 위반사항들과 무장공비 침투, 대통령 암살기도, 민간항공기 테러 등 전쟁에 버금가는 각종 도발은 대한민국 국민을 경악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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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정경 (출처=전쟁기념관)

 

팸플렛을 읽으면 상징적이고 큰 의미를 담은 단어가 많다. ‘호국의지’, ‘호국의 별’, ‘잉태’, ‘창조’, ‘영원성’, ‘선열’, ‘위업’, ‘존경’, ‘헌신’, ‘국민의 염원’ 전시장 벽에 쓴 글귀도 마찬가지다. ‘영웅’, ‘ 고귀한 희생’, ‘반공유격대’, ‘바다 사나이들이 조국을 구하다’, ‘싸우면 반드시 이기는, 우리는 무적의 해병이다’,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회피하지도 않았습니다! 왜 나일까, 되묻지 않았습니다.’ 독백은 숭고했으나 내가 이해하기엔 너무 거창했다. 생애사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방해되었다. 각종 대외 항쟁기를 설명하고 국사 유물을 보존한 방식은 많은 투자를 들이고 공들였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좋았다. 평면화된 그림에 굳이 입체적인 조형물을 도드라지게 넣거나 벽면을 가득 메운 그림이 있음에도 홀로그램을 추가하는 식으로 눈을 사로잡았다. 입구와 벽지의 문양은 시대별로 다양하였고 안내판으로 모자라 작은 안내 영상을 바로 옆에 비치해두었다. 3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중앙홀 천장에는 비행기와 폭격기 등 대형 조형물이 공중에 걸려있었다. 오감을 생생하게 살린 건 이뿐만이 아니다. 참전용사의 증언 듣기와 작곡가 안익태의 코라 환타지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곡 실을 마련하여 청각을, 각종 전쟁 무기를 전 층에 전시하여 촉각을 자극하였다. 한 아이가 유리벽 안에 들어있지 않은 모시나간트 소총을 한참 만져보았는데, “장전 안 되어 있네.”라고 중얼거리며 돌아서는 장면은 지금도 선연하다. 

민간을 위해 마련한 공간은 음침하거나 인물 모형이 무채색으로 표현되었던 점은 의아했다. 무고한 민간인들의 죽음을 부수적인 피해로 치부해 버린 것은 아닐까, 혹여나 내가 놓친 얼굴이 있진 않을까 걱정하다 발걸음이 자꾸 늦춰졌다. 6∙25 전쟁 중 벌어진 민간인 학살은 북한군은 물론 국군과 경찰, 미군 등 전쟁의 양측 모두가 저질렀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군경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이 최소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전쟁 초기 국민보도연맹”은 한국 군경에 의한 무차별적인 학살 사건이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서울이 수복된 후 인도교 폭파 등 이유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던 사람들에게 북한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지리산 인근 지역 주민 등은 빨치산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한국 군경에 의해 살해됐다.) 그러나 전쟁 기념관은 이를 전시하지 않았다. 다친 군인에게 붕대를 감아주는 민간인은 있어도 총을 차마 들지 못한 민간인은 없다. 깃발을 드높이며 나아가는 군인은 있어도 트라우마에 시달려 고엽제 피해에 시달리는 군인은 없다. 대신, 을지문덕, 계백, 김유신부터 김종서, 강우규, 홍범도, 김좌진, 이봉창, 윤봉길, 중령, 준장, 소령 등의 흉상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총과 칼을 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 흔히 거론되는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여성의 얼굴은 없었다. 국제적으로 전시 성폭력이 있었다는 점 역시 빠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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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기념관 풍경 (출처=전쟁기념관)

 

나는 전쟁 기념관에서 슬픔을 겪지 못하고 나왔다는 점에 당혹스러웠고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자 낭패감이 들었다. 한국적 의식구조의 낙후성, 산업화와 민주화로 해결하지 못한 잔재에 의문조차 품지 못한다면 난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조지 오웰은 <나는 왜 쓰는가>에서 작가가 글을 쓰는 네 가지 동력 중 하나로 역사적 충동을 들고, “이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라고 규정했다. 간접체험으로나마 전쟁의 시행착오를 훑게 해준 전쟁 기념관이 보존하려는 실패와 오류가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파악하는 데는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분단체제와 성폭력과 반전의 역사를 더는 되풀이 할 수 없다는 관점에서 과거를 헤아리는 기념관이 세워지길, 여전히 원한다.

왜 나를 죽였는가 왜 우리는 살아있나 – 학살의 음모를 밝힌 일본군성노예제 생존자의 기억

국방부 옆 광활한 평지를 가진 전쟁 기념관과 달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주택가 사이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 언덕에 있었다. 서대문독립공원에 지으려 했으나 ”순국선열에 대한 명예훼손“ 등 반대 측의 근거로 무산되어 100평 남짓한 30년 된 주택에 문을 열 수 있었다고 한다. 1992년 1월 8일, 서울 중학동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작된 수요 집회가 11년째 이어지던 2003년 집회에 뜻을 함께하는 이들 사이에서 할머니들을 위한 기념관을 짓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지 9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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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전시 포스터 “그 날의 목소리” (출처 =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가장 먼저 눈에 띈 차이는 전시의 규모였다. 지하 1층부터 2층까지로 구성된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전쟁 기념관과 마찬가지로 3층 구조였으나, 아무리 올라가도 지하 공간에서 느낀 축축함과 어두운 내부는 계속 이어졌다. ”보통 너른 공터에 기념비적 장소로 건립하는 추모관 대신 우리는 건축적 스토리텔링을 통해 은근히 이야기를 끌고 가는 서술적인 공간을 생각했다. 커다란 제스처를 취할 수 없던 물리적 제약도 있었지만, 직설적이기보다 생각할 여지를 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봤다.”고 건축을 맡은 와이즈 건축의 장영철은 말한다.

세상과의 단절, 역사의 무게감을 부여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지하 전시관 내 외부는 열악했다. 대문이 좁거나 천장의 높이가 낮아 몸을 수그려야 할 정도였다. 2층 테라스는 듬성듬성 벽돌을 쌓은 스크린 벽을 두어 틈새로 밝은 빛을 통과시키고 헌화나 메모를 둘 수 있는 재단으로서 기능했다. 인터랙션 영상을 비롯해 설치된 영상은 여섯 개였다. 벽면을 메운 스크린은 두 개였고, 그 중 하나는 들어가 볼 수 없는 공간에 있었다. (터치 스크린은 제외했다. 총합은 김학순 공개증언 30주년 기념전시관 포함해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흰 회벽에 어른거리는 사람의 형상을 바라보다가 전쟁을 기념하기는커녕 제대로 기억할 수조차 없는 사람들, 박물관에서조차 이름을 새기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했다. 스며드는 불빛들은 명료한 정적과 고립 속에서 하얗게 질려버리는 듯했다.

금방 돌아볼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으나 ‘기억록’, ‘추모관’, ‘역사관’에 새긴 문구를 오랜 시간 투자해 정독했다. ”소리 안 내고 눈물만 흘렸지. 말할 데가 없었어.“, ”나올 때 좀 무서웠어요.“, “절대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 것은 피맺힌 한을 풀지 못해섭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일본 정부의 법적 배상금이지, 위로금이 아닙니다.”, “이 내가 살아있는 증인임에도 일본 정부는 어째서 증거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일본어 임의 번역)”, “아이들은 평화로운 세상에서 자라났으면 합니다.(일본어 임의 번역)”, “해방 전에 한국 사람들의 정조만은 지금의 젊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유교로 길드려진(길들여진) 보수적인 것이었다. 고향에서는 살 수가 없어 아니면 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을 벌어보려고 떠난 젊은 여성들은 자기들이 걸려든 덫에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1(윤정옥 육필원고 사본)” 내가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 만난 것은 통계와 수치가 아니었다. 기존의 공적 언어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적 기억이었다. 전장에 있지 않은 이들의 고통과 한이 서린 절규,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속삭임이 가득했다. 특별히 그들이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음을 알기에 그들이 견딘 위태로움이 문장 속에서도 또렷하게 느껴졌다.

“돌격 1번”(일본 성노예 군인용 피임기구), “처녀공출”, 벽돌 구조로 쌓은 계단 벽면에 온 힘을 다해 긁어 새겨놓은 듯한 절실한 직선들. 할머니들의 분노와 회한. 한차례 파괴되었던 사람들, 잊힌 잔해들을 스스로 복원한 사람들,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간 사람들. 나는 최초의 공개증언자이자 한 명의 인권운동가였던 김학순 할머니의 개인전을 보면서 탄식했다. 한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얼마나 더 깊어질 수 있는지 그녀는 입증한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진지하게 성찰하면서 한편으로는 그와 같은 삶의 형식이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지 고민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정부의 관여 사실이 명백히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일본 정부는 전면적인 책임 인정과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채 미봉책만을 취했으므로 이에 대응하는 다각적인 활동 전개를 그녀는 주도해왔다. 자신이 겪은 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채 규정되는 모든 존재는 억울하다. 이 한스러움은 벌써 폭력의 결과다. 나는 최대한 섬세해지면서 그들을 겨우 잠깐이나마 이해했다. 과거를 현재로 끌어오기 위해 일생을 쓴 김학순 할머니는 이런 미래와도 연대하고 있다. 당신은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이렇게 숨어서 힘들어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겪은 고통을 당신은 겪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연약하다가도 얼마간 독해진 사람처럼 기를 쓰고 일어날 수 있게 된다. 마침내 그녀가 외로움의 상태와 단절될 때까지 나는 의식적으로 소녀의 상 곁에 앉을 것이다.  

수요집회에서 피켓들고 서있는 공활 참가자 모습

1527회 수요집회 참석 “돈은 대안이 아닙니다”

 

눈보라가 치는 날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모두가 선 채로 있었다. 대설 예비특보를 시작으로 대설 주의보와 도로 결빙경보가 연이어 울린 정오였다. 십 분도 안 되어 눈송이가 모자와 눈썹을 물큰하게 적셨다. 피켓을 움켜쥘수록 두 주먹이 창백해졌다. 양발이 추위로 굳어가는데 무엇을 견디기로 시작한 사람들의 열기가 배어 있어 눈보라를 견딜 수 있었다. 어떤 희고 맑은 마음이 내 안에 어른거려서 나는 동요된 것일까? 한 사람이 지치면 또 한 사람이 큰소리로 선창했다. 심해에 빠진 사람이 가라앉다가 살려고 마음먹었을 때 솟구치려고 온 힘을 다하는 것처럼 악을 썼다. 막아서려는 파도의 힘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니까 나아가려는 힘이 어쩔 수 없이 더 세지는 게 아닐까. 손뼉 치고 열광하고 고래고래 지르는 목소리로 도로는 시끄러워진다. 판 하나를 두고 이곳을 등진 사람들을 지나치면서 나는 어디에 힘을 실어야할지 절대 헷갈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여겼으나 현장에서는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처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었다. 반복해서 우리가 모이는 시간이, 주춤거리며 할머니들이 길을 잃었던 시간을 추월하지 않길 바라게 된다. 

퍼지는 파편, 번지는 눈물, 얽히는 상처 – 베트콩이 아닌,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가 대한민국 앞에서 증언한다

전쟁 기념관 팸플렛을 보면 “국군의 해외 파병 및 세계평화유지 활동상 전시, 부제 아래 베트남 전쟁 당시 국군이 베트남 주민들을 돕기 위해 펼친 교육, 의료봉사 등 다양한 대민지원 활동을 모형으로 연출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내부전시 벽면에는 “대한민국은 6∙25전쟁 당시 자유 우방의 지원에 보답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베트남에 국군을 파병하였습니다.”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기도 했다. 왜 은혜를 갚는 일이 제3국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을 지원하는 일이었을까? “한국군은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당시 사령부 채명신 씨의 말을 정리한 것으로 베트남에 세워진 안내판을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군 해외 파병의 주요한 사례인 베트남전을 세계평화에 기여한 군사행동이었으며 이를 통해 국가의 위상을 높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곳에서 나는 베트남 전쟁을 “반공 십자군 전쟁”으로, 한국군 파병을 “국가적인 무한한 긍지와 보람을 갖게 되는 계기”로 이해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는 “한국군을 비롯해 어느 나라,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전쟁 중 혹은 군부대 주변에서 강간 범죄는 끊이지 않아 왔다.”고 서술한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와 같이 정부와 군 당국이 주도하여 미성년까지 포함된 여성들을 집단적으로 동원하고, 조직화된 제도로 장기간에 걸쳐 강간을 행한 사례는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유일무이하다고 덧붙인다.) 또한,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 병사들에게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의 참혹상을 기억하기 위해 지하에 방 한 칸을 마련해두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2015년에 만난 베트남 빈딘 성 거주 피해 여성들은 백발이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그 증오를 견딜 수 없어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증오해. 너무 미워.”, “악몽을 많이 꾸었어요. 몇 년 동안. 잠자면서 그렇게 소리를 질렀대요. 살려달라고.”. 나는 고국이 베트남에서 저지른 일을 생각했고, 그들이 온전히 받지 못한 애도에 대해 생각했다. “평화의 씨앗을 뿌리고 왔다.”는 전쟁 기념관의 문구 속 평화는 이곳에 과연 잘 심어졌나. 피해자이지만, 가해자이기도 한 역사의 질곡을 드러내려고 하는가.

기억은 계급과 성별, 지위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 그리고 다른 현실을 만들어낸다. 언론은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나 전쟁을 수행하는 남성들만 이야기했을 뿐, 아무도 여성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사적의 기억으로 치부된 이야기들이 남았다. 전쟁이 남성의 영역으로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가정폭력은 남성 개인의 인성 문제로 인식되고 강간은 여성의 처신과 관련 있다는 관습은 깨지지 않고 반복된다. 어떤 사람이 당연히 받는 권리를 어떤 사람은 평생 싸워서 얻는다. 제1527차를 맞은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에서 한옥선 할머니의 삶을 활동가가 읊었다. 이승도 아니고 저승도 아니고 정처 없이 구천을 떠돌며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할머니들은 끊임없이 묻고 있었다. 하늘과 땅에 깃들 곳 없는 넋의 노래는 우리를 향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나는 들으려 하는가. 기억의 권력들과 죽어서도 싸우는 전쟁 기념관.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얼굴과 아직도 전장을 헤매는 생존자들의 이야기. 나는 공동의 경험이 갖는 감수성에 같이 진동하는가. 오랜 시간을 들여 유구한 역사를 모아 가지런히 배치해놓은 전시를 보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나는 앞으로 은폐된 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둘 수 있을까. 그런 맥락에서 배상이든 사과든 이야기를 풀어가는 장이 끊임없이 열려야 하고 각자가 처한 역사적 위치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말했듯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이므로, 그것은 영원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현재의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며 함께 한다. 지난한 투쟁이 끝날 때까지 나는 더 자주 휘청여야 한다. 다정하게 손 붙잡고 충고해주는 동무의 말은 열 사람 한 입 같이 “편하게 전과 같이 살다가 죽읍시다.”(<경희–나혜석>)라고 말하지 않고, “한 번 넓어진 세계는 결코 다시 좁아지지 않는다.”고 당신도 외쳐주길. 이 담론이 낡고 촌스러워질 수 있도록.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 앞에서 청년공익활동가학교 26기 단체사진

눈오는 수요일, 우리의 기억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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