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기 후기] 의회민주주의 말고 사법민주주의도 있다 -참여연대 청년공익활동가학교

참여연대 19기 청년공익활동가학교는 2017년 1월 9일(월)부터 2월 16일(목)까지 6주 동안 진행하게 됩니다. 이번 프로그램에는 19명의 20대 청년친구들이 함께 참여하는데, 이 6주 동안 우리 청년공익활동가학교 친구들은 인권과 참여민주주의, 청년문제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이슈에 대해 공부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직접행동을 기획하고 진행함으로써 미래의 청년시민운동가로 커나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후기는 김동섭 님께서 작성해주셨습니다 🙂
 

* 청년공익활동가학교란?
청년공익활동가학교는 그 동안 방중마다 실시되었던 참여연대 인턴프로그램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청년들의 공익활동을 위한 시민교육과 청년문제 해결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며 공부하는 배움 공동체 학교입니다. 

 

* 청년공익활동가학교를 응원하는 방법 : 해피빈 모금함 (클릭)

 

 

20170207_우리는 민달팽이 세대 (3)

 

우리 사회에 정의를… – 민주적 사법을 위한 개혁을 꿈꾸다.

 

  ‘사법’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무엇이 연상되는가? 대부분은 정의의 여신 디케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 여신은 일반적으로 안대를 써서 눈을 가리고 있으며, 한손에는 칼을 들고 있다. 이는 각각 재판을 할 때 주관성을 버리겠다는 것, 법을 인정사정없이 엄정하게 집행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의 대법원 앞에 있는 여신상의 경우에는 그 모습이 전통적인 디케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다. 동상은 눈을 뜨고 있고 한손에는 칼 대신 법전이 쥐어져 있다. 이는 눈을 부릅뜨고 재판을 공정하게 하겠다는 의지, 법전의 내용대로 판단하겠다는 다짐을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상희 교수님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법체계는 그러한 의도에 입각하여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 눈을 뜨고 사안을 바라보지만, 악한 자를 벌하기보다는 오히려 강자를 구별하여 그 편에 서고 있다. 또한 칼 대신 법전을 드는 설정은 법 만능주의를 떠올리게 할 뿐이며, 이는 법조인 집단의 폐쇄성으로도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후기에서는 강의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는 동시에, 강의를 들으며 떠올랐던 필자의 생각을 덧붙일 것이다. 강연에서는 큰 틀에서 세 가지의 내용을 다뤘다고 볼 수 있다. 첫 째로 법과 사회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설명이 강의의 도입부를 차지했다. 다음으로는 우리나라 사법체계가 갖고 있는 비민주적인 문제점에 대해 다루었다. 문제점에 대해 생각해본다면 그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며, 그에 따라 해결방안을 고민해보는 과정은 자연스러운 순서일 것이다. 강의도 그러한 순서로 전개되었다.

 

  강연에 따르면 법과 사회발전은 크게 세 번의 시기로 나뉘어 일어난다. 제 1기는 ‘근대화/서구화’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경제발전을 위해 법이 발전한 때이다. 서방국가의 지원에 의해 근대법이 이식되었으며 일부 저개발국가의 개발에 도움이 되었으나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만을 제외하고는 성공하지 못했다. 제2기는 ‘신자유주의의 법화’라고 칭할 수 있으며, 법이 자본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개혁이 일어났을 때다. 즉, 법이 시장을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제3기는 ‘법의 지배로서의 법 발전’이라고 하며, 이 시기의 법은 인권신장을 위해 발전했다. 인간개발의 단면으로서 법 지배가 일어났으며 법은 인권보장과 역량 강화의 수단이었다. 위의 내용을 들으며, 당연히 자연법(존재 한다면)과는 다르게 실정법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화한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양상이 당대 사회의 담론이나 요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했다. 그렇다면 어떤 법이든 특정한 관점에서 보면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포스트모더니즘시대 이후에는 변화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졌고 선악의 개념도 애매해졌으니 앞으로는 법도 지금보다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사법의 비민주성은 얼마나 심각할까? 본래 법 지배의 핵은 사법부가 되어야 한다. 권력분립이 된 상황에서의 사법부가 법을 지배하는 최후의 수호자가 돼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당연하게도 수호하는 주체가 권력과 특권을 가진 검찰과 판사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일반 시민, 즉 ‘우리’가 중심이 된 상태를 전제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법은 지금까지 외부 압력과 독립적으로 집행되어오지 못했다. 크게 민주화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 설명이 가능하다. 80년대 이전 시기의 사법은 권위주의체계에 종속되어있었다.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의 중앙정보부와 안기부의 명령에 따라 사법부는 그저 꼭두각시놀음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대목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 생애의 일부를 그린 영화 ‘변호인’이 생각났다. 현재로서는 비상식적이고 폭력적인 방법까지 동원되던 당시의 상황에서 권력과 무관한 정치중립적인 사법진행은 불가능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비민주적인 사법절차들이 해결되었을까? 강의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권위주의적 권력이 빠져나간 공백을 세 가지의 현상이 대체했다. ‘법조관료주의’가 첫째이며 ‘정치의 사법화’, ‘신법경유착’문제가 그 다음을 잇는다. 현재 우리나라 사법부는 지나치게 관료화되어있기에 법관들이 온전하게 자신의 양심에만 따라 판결을 내리기에는 힘든 환경이다. 인사권을 상급자가 갖고 있으며 그에 따른 내부의 간섭에서 완전 자유롭기란 쉽지 않다. 배석판사가 부장판사를 ‘모신다.’는 표현에서 사법부의 상명하복의 체계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법조관료주의 문제는 비단 사법부 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사법화’문제와도 연결이 된다. 정치영역에서 논의되고 처리돼야할 이슈들이 법정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몇몇 판결이 바로 정치의 과도한 사법화의 예이다. 행정수도이전, 통합진보당 해산과 같은 문제를 법관이 결정하게 된다면, 국민들은 입법부와 사법부 모두를 이중적으로 불신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위배되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으로는 경제권력이 법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인 ‘신법경유착’을 문제로 들 수 있다. 즉, 재벌이 새로운 사법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법무실 강화 전략, 대규모 법무법인과의 결탁이 ‘유전무죄 무전유죄’현상을 부추기고 있다. 이전의 대기업은 법에 저촉이 되면 그 테두리 내에서 자신에게 유리한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힘썼다면, 현재는 법 자체를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일련의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점들의 근본적인 원인은 제도적인 부분과 법조인을 비롯한 국민의 인식적인 부분으로 나뉘어 생각할 수 있다. 우선 민주항쟁 이후 87년, 8인회가 국민들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고 헌법을 고친 데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민중은 소외되었고 과거의 청산은 불충분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법조인 집단 폐쇄적인 특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국가 중심적으로 양성된 법조인들은 ‘연수원 00기’로 본인을 소개하는 데서 드러나듯 본인들만의 카르텔을 형성했으며 이들은 사법개혁에도 소극적이었다. 동시에 사회적으로도 법률가를 신성시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이러한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문제의 해결방법을 논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국민의 사법감시 강화와 법관⦁검찰의 인사과정에 국민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 그 방법이다. 배심, 참심제도를 실질화하는 노력이 있다면 재판 과정에서 불공정한 결과로 덜 이어질 것이다. 참여연대에서 국회를 탐방하는 도중 들었던 설명이 기억이 난다. 국회에서 회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여 소란스러운 와중에 국회의장의 몇 마디가 분위기를 바꾸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바로 ‘지금 2층에서 00여고 학생들이 방청중입니다. 정숙하세요.’라는 식의 메시지였다고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남들이 자신을 주목하고 있으며, 그들이 자신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 도덕적 잣대나 양심에 따라 보다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참여재판이 부분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이를 보완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한편 국민이 직접 법관이나 검찰의 요직을 선출하는 방식도 고려해봄직하다. 그렇게 된다면 사법부가 행정부나 입법부의 영향을 덜 받게 돼 권력분립의 원칙이 보다 잘 실현될 것이다. 
  

 한편 법조인을 비롯한 국민의 인식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사법이 권력으로 인식되기보다 서비스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로스쿨제도가 보다 원활히 시행돼야 할 것이다. 법률가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본래 법조인들의 기득권은 무너질 것이며 그에 따라 법은 신성하며 우월한 자만이 다룰 수 있다는 국민들의 신화(myth)도 잠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로스쿨 제도에 대해 평소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법이 서비스의 영역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에는 크게 동감하는 바이지만, 그 방법이 꼭 로스쿨이어야 할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존재하던 사법시험의 선발인원을 크게 늘린다든가 의대처럼 대학원개념이 아니라 학부부터 법을 공부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방식은 어떠할지 여쭤보았다. 장학금을 수혜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위치한 학생들의 문제, 법과 무관한 공부를 하며 학부 4년 동안 투자해야하는 시간과 돈의 비용문제, 로스쿨 3년동안 공부하면서 배우는 실질적인 법 공부시간의 부족함, 과연 변호사시험이 사법시험에 비해 다원화된 법조인을 가르는 자격시험이 되는지에 대한 이슈 등이 생각이 났다. 이에 대해 교수님은 사법시험에 있어서는 국가가 법조인을 양성하는 시험이라는 점에서 비판할 점이 크며 위에서 언급했던 법조관료주의를 형성한 큰 요소이기 때문에 회귀할 이유가 없다고 설명해주셨다. 다만 로스쿨 자체의 문제, 예컨대 등록금 문제나 초기 학부졸업을 요하는 문제는 교수님 본인도 아쉽게 생각하고 계신 부분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로스쿨에서의 3년 공부가 과연 법조인의 자질을 기르는 데 부족한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답변하셨다. 실무라는 것은 엄연히 법 공부와는 또 다른 영역이라고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더불어 특수한 직업의 ‘밥그릇’을 정부나 국민이 신경 쓰고 챙겨줄 하등의 이유는 없으며 과잉경쟁의 상황에서 법 공부에 진입할지 말지는 공부하는 당사자가 고민할 문제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공감이 되는 대목이었다. 

 

 자칫하면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텐데도 몰입이 잘 되었다. 아마 민주적인 사법개혁을 향한 한상희 교수님의 진심이 잘 느껴져서 그런 건 아니었을지 생각해본다. 
 

 

20170201_국제사회와 시민단체 (1) 20170111_왜 시민인가 시민운동의 역사와 흐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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