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13099

[021] 사법개혁의 지침서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 발간

1995년 2월 참여연대/조선일보 공동기획 <사법개혁>” data-file-srl=”1339163″></td></tr><tr><td>
<p style=1995년 2월 사법개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형성하고 개혁방향 제시를 위해 진행한 언론기획시리즈 ‘사법개혁’. 이 내용을 수정 보완해 단행본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을 출간했다.

┃ 배경과 문제의식 ┃

참여연대 창립 다음 해인 1995년은 우리나라 근대사법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러나 그 100년은 영광보다는 오욕이, 자랑보다는 수치가 더 많은 세월이었다.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골격은 일제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고 해방 이후에도 별다른 변화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사법제도는 국민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하고 있었고 국민적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는 사각지대였다. 법원과 검찰의 권위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구조는 공고했고 문턱은 매우 높았다. 무엇보다도 사법기관들은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기관이었지 국민을 위한 법률서 비스 제공 기관으로 인식되지도 않았고 그런 역할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법조계 내부는 전관예우와 같은 폐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95년 근대사법 100주년을 앞두고 마침 대법원에서도 이런저런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고, 청와대 주도로 구성된 세계화추진위원회도 사법개혁을 논의주제에 포함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런 상황은 사법개혁을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이에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전면적인 사법개혁안을 제시하기로 마음먹었다. 법원과 검찰에 대한 개혁 없이 범정부 차원의 개혁 논의가 용두사미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했다. 참여연대는 사법 분야 전반에 걸쳐 문제점을 확인하고, 합리적이면서도 종합적인 대안을 제시해 사법개혁 논의를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기로 하였다.

┃ 주요 활동 경과 ┃

1995년을 앞두고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 50대 과제’를 정하고 시민포럼을 연속 개최하는 것을 창립 초기 사업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근대사법 100주년을 맞이한 사회적 환경은 이런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의 활동계획을 더 촉진시켰다. 사법개혁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형성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참여연대는 공동으로 기획할 언론사를 물색했는데, 결정된 곳은 조선일보 사회부 법조팀이었다. 1995년 2월 26일 첫 기획기사를 시작으로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3월 28일까지 10번의 기획기사를 내보냈다. 한 달 동안 한국 사법의 현주소와 외국 사례, 대안 등을 소개한 것이다. 매번 신문의 한 면을 모두 차지할 정도의 큰 기획기사가 열 차례나 나갔다.

2월 26일에 실린 첫 기사는 법조인 증원을 다룬 것으로, 기사의 주 제목은 ‘매년 2500명씩 더 필요하다’였다. 민사재판의 62%가 변호사없이 진행되고 판결 선고에 1분밖에 걸리지 않을 만큼 재판흉내도 못내는 현실을 드러내고, 법률서비스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법률가를 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2월 28일과 3월 2일에 실린 2, 3회 기사는 신규 법조인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판사 와 검사를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를 다루었다. 기사 제목은 각각 ‘전문법과대학원 세워야 한다’와 ‘연륜 있는 변호사가 판·검사돼야’였다. 첨단 분야의 높은 질의 강의도 고시과목 아니면 한산하기만 한 법대의 실상은 고시학원이나 다름없다는 현실, 판사의 67%와 검사의 74%가 39세 이하로 사회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누군가의 일생을 좌우할 결정을 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사법시험을 변호사자격 시험으로 전환하고 전문법과대학원인 로스쿨을 도입할 것, 판·검사를 경력 변호사 중에서 뽑을 것을 제안했다.

3월 3일에 실린 4회 기사는 전관예우 문제를 다루었다. 기사 주 제목은 ‘퇴임지 사건 일정기간 못맡게’였다. 사건수임 제한 외에도 구속을 줄이는 기소 전 보석제도 활용이나 합리적 양형제도 마련을 통해 퇴직 판·검사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법원과 법관을 다룬 5회 기사는 같은 달 9일에 실렸다. 판사 한 명이 처리하는 1일 사건이 평균 열 건이 넘고, 중도에 퇴직하는 법관의 63%가 부장판사급 이상인 점 등을 보여주며, 퇴직 후 변호사 활동을 위한 연수기관이 되어버린 법원 모습을 다루었다. 그 대안으로 판사 직급제와 인사권 독점 개선, 양형기준제도 도입 등을 주장했다.

검찰과 검사를 다룬 6회 기사의 제목은 ‘기소여부 결정 ‘검사 독단’ 없어야‘였다. 수사방향에 법무부 장관이나 ‘윗선’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현실 때문에 검사 개인의 소신 있는 수사가 어려운 현실과 욕설과 강압이 난무하는 조사실 등을 다루었다. 성역 없는 수사를 위해 특별검사제 도입, 검찰의 불기소결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정신청제도 확대 등을 주장하였다.

구속과 교도행정을 다룬 7회 기사의 제목은 ‘징역형 대신 벌금-사회봉사 활용해야’였다. 외국에 비해 구속율이 매우 높다는 점과 구치소나 교도소에 수용된 재소자가 너무 많아 처우가 열악한 실태를 드러내고, 즉심제도 폐지와 구속기간 단축 등을 제안하였다.

8회 기사는 변호사 수임료를 다루었다. 기사 제목은 ‘건당 얼마, 불합리… 법정-인가제 검토를’이었다. 일부 변호사의 경우 착수금만 천만 원 이상이며, 변호사가 많이 모자라 독과점이 형성된 실태를 드러내고, 형사사건이나 가사사건에서는 성공보수제를 제외할 것 등을 다루었다.

9회 기사는 법률구조제도를 다루었다. 기사 주 제목은 ‘저소득층 국선변호 확대해야’였다. 형사피고인 66%가 변호사 없이 재판받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민사사건에 국한된 구조업무를 확대할 것을 주장했다. 3월 28일 마지막 기사는 이 기획연재를 총괄한 박은정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소장의 기고문과 기획연재에 참여한 전문가 3인의 기고문으로 채워졌다.

이러한 기사들은 좌담회를 개최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수렴하는 작업을 거쳐 만들어졌다. 당시 사법감시센터 소장이었던 박은정 당시 이화여대 법대교수가 좌담과 기획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한 달 이상 수고했다. 통계작업과 실태분석, 대안모색을 위한 토론과 해외자료를 포함한 참고자료 수집 등도 필수였다. 이러한 자료와 청취한 의견을 기반으로 하여 한인섭 당시 경원대 법대교수 등이 논문식 초안을 주 2회, 매회 200자 원고지 100매 정도로 작성하고 이를 조선일보 법조팀에 전달했다. 그러면 조선일보 법조팀의 이창원 기자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자료를 더하여 기사글로 완성했다. 마감시간에 맞추기 위해 한인섭 교수, 황승흠 교수, 박원순 변호사, 이창원 기자는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이런 과정을 거친 기획기사 연재가 끝난 뒤에, 참여연대는 논문형 초고와 기사를 다듬어 책으로 묶었다. 이것이 1996년 1월 25일에 발간된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이다. 박영률출판사를 통해 발간된 263쪽의 이 단행본은 신문기사로 다루어진 주제들을 모두 다루고 실태와 사례, 대안을 골고루 실었다. 모두 9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다. 1장은 ‘시민의 권익 편의에 봉사하는 법원’이고, 2장은 ‘정의와 형평성을 수호하는 검찰’, 3장은 ‘값싸고 질 높은 서비스로 국민에게 다가가는 변호사’, 4장은 ‘인권의 사각지대, 인신구속과 교정제도’, 5장은 ‘사법정의를 부인하는 전관예우’, 6장은 ‘양질의 법률서비스를 위한 적정 법조인 수’, 7장은 ‘법조인력 충원제도와 법학교육’, 8장은 ‘변호사에 의한 법률구조’, 신문연재에서 다루지 않았던 ‘시민의 사법 참여’를 9장으로 추가했다. 배심제 도입을 검토하자는 것과 법관을 선거로 뽑자는 것, 일반 국민 중에 선발된 검찰심사원이 검찰의 불기소처분을 심사하도록 하자는 것을 제안했다.

┃ 성과와 의미 ┃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은 한국의 사법 실상에 대한 참여연대의 문제의식과 개혁방안을 담은 것으로, 1995년 연초에 시작된 범국가적인 사법개혁 논의에 영향을 미치려는 참여연대 노력의 결실이었다.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그려놓은 참여연대의 사법개혁 청사진이자 지침서이기도 했다. 참여연대 내부 구성원은 아니지만 1990년 중반에 사법개혁을 고민하던 동시대 전문가들의 문제의식과 대안을 종합한 것이기도 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참여연대는 ‘사법개혁’의 방향은 국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사법이 민주주의의 전제가 된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밝혔다. 그리고 그 책에 담긴 주장들은 2000년대까지도 계속 유효했다.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1995년 연초 마침 정부와 대법원의 사법개혁 논의도 시작되었는데 아쉽게도 사법시험 합격자수를 늘리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장한 것들은 대부분 이후 사법개혁을 논의할 때마다 거론되었고, 2000년대에는 현실화되었다.

전문법학대학원은 2009년에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 형태로 도입되었고, 배심재판은 2008년부터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고 있다. 미흡하지만 재정신청제의 적용 범위도 넓어졌고, 검사동일체 원칙도 명목상으로나마 검찰청법에서 사라졌다. 법조인 증원도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판사 충원 방식도 법조일원화 원칙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은 이후 이루어진 사법개혁의 초석이었다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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