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3283

[065] 한국군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 우리를 전범국 국민으로 만들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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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이라크 파병동의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하기 위한 여의도 긴급행동.

┃ 배경과 문제의식 ┃

2001년 9월 11일 오전, 시커먼 연기와 화염 속에서 110층짜리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뉴스 장면이 전 세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 사건 직후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내세우며 9.11 테러 배후인 알카에다를 보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다. 2003년 3월에는 이라크 후세인 정부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 의혹을 제기하며 바그다드 공습을 개시했다. 2011년 12월 미군이 이라크에서 철수하기까지 그 누구도 이 전쟁이 그렇게 오래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당시 한반도 상황도 급박했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은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제기했는데, 아프가니스탄 다음 전쟁지역이 한반도가 될 수 있다는 우려로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은 이미 2002년 1월 29일 이라크·이란·북한 3개국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즈음 미국의 이라크 침공 분위기는 더욱 분명해졌다. 2003년 들어 이라크 파병 지원 논의를 진행하고 있던 정부는 영국 다음으로 많은 군대를 이라크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을 반대하는 국제 반전평화의 목소리는 한국에서도 터져 나왔다. 시민사회단체들이 반전평화운동을 위한 연대체를 꾸렸고, 한국군 파병 논의가 무르익을 무렵 자연스럽게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으로 이어졌다. 이 운동의 중심에 참여연대가 있었다.

┃ 주요 활동 경과 ┃

반전평화 활동의 구심체로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 결성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는 데 이어 미국의 요청에 따라 한국군을 파병하기로 함에 따라 참여연대는 약 350여개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이라크파병반대비상국민행동’(이하 파병반대국민행동)을 발족시켰다. 평화군축센터가 공식적으로 발족하기 이전이었지만, 당시 센터 소장을 맡고 있던 박순성 교수가 파병반대국민행동의 정책사업단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당시 이태호 정책실장과 평화군축센터 활동가들은 한국군 파병을 저지시키기 위한 정책대응과 함께 직접행동과 집회를 기획해나갔다. 첫 대중집회가 있었던 2003년 2월 15일 ‘국제 반전 행동의 날’에는 어린아이는 물론 종교인, 학생, 연예인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거리에 나와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한국 정부의 이라크 파병 반대를 외쳤다. 당일 마로니에 공원에 모인 사람들의 수는 약 3000명 이었다. 전 세계적인 반전시위의 규모를 보면 미미한 숫자였을지 모르나 시민들과 함께하는 반전평화 운동의 싹이 한국에서도 틔어지는 순간이었다.

 

참여연대는 정부의 파병결정에 대해 공개질의서를 연속 발송하면서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반대하면서 명분 없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원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유엔 안보리 결의 없이 미국이 이라크 공격할 경우에도 정부가 지원할 방침인지 등 정부 입장을 분명히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또한 공개서한을 통해 이라크 전쟁의 불법성, 전 세계적 반대여론과 파병의 부당성 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였다. 서한의 이름으로 발송되었으나 그 자체는 굉장히 전문적인 이라크 파병 논리 반박 문서였다. 대규모 파병 반대 시위도 이어졌다.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날, 주한미대사관 앞에서는 미국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려는 시민사회단체들과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미국의 계획적인 대량 살육을 규탄하며 불의한 전쟁과 파병에 국민적 분노로 맞설 것을 천명했다. 파병반대의 외침은 평화를 밝히는 촛불들로 이어졌다. 매일 저녁 이뤄진 광화문 교보문고 앞 촛불시위는 3일이 지나 약 1만 개로 늘어났다.

‘우리를 전범 국가 국민으로 만들지 말라’ 릴레이 1인시위와 국회 부결 촉구 활동

참여연대는 곧바로 파병반대 릴레이 1인 시위를 기획했다. 3월 17일 박순성 소장의 청와대 앞 1인 시위를 시작으로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는 정부종합청사 그리고 국회 앞까지 이어졌다. 시위 구호는 짧으면서도 강렬했다. ‘우리를 전범 국가의 국민으로 만들지 말라.’ 간결하지만 호소력 짙은 이 구호에 연예인들까지 1인 시위에 자발적으로 참여의사를 밝혀왔다. 1인 시위 시작 5일 만에 가수 신해철과 영화배우 방은진 씨가 청와대 앞 1인 시위에 참여하였고, 국회 앞 1인 시위에는 영화배우 정진영, 방송인 김미화 모델 변정수, 개그맨 노정열, 배우 홍석천, 가수 윤도현 등이 참여하였다. 파병반대집회에는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뿐 아니라 점점 더 많은 학생과 일반 시민들도 참여했다. 2003년 11월에 참여연대가 초청하여 방한했던 9.11 유가족 단체인 ‘Peaceful Tomorrows’의 대표 데이빗 포토티는 폭력은 폭력을 낳을 뿐이며 군사적인 대응으로는 결코 평화를 기대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한국 시민사회에 전하기도 했다.

 

파병반대 운동은 길 위에서만 있지 않았다. 참여연대는 파병을 반대하는 국회의원 53명의 서명을 받아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을 국회 차원의 활동으로 확장시키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시민사회의 강력한 반대여론은 이라크 파병 동의안 부결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결국 국회는 4월 2일 한미동맹이 곧 ‘국익’이라며 이라크 파병동의안을 통과시켰다. 바로 다음날 여성, 학계, 종교 등 각계 인사 442명은 ‘반전평화를 위한 비상 국민회의’를 소집하고, 공동으로 채택한 반전평화를 위한 국민행동 지침을 널리 알려나갔다. 2003년 9월, 미국이 한국에 추가 파병을 요청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번에 미국이 요청한 것은 대규모 전투병력 파견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나름대로 병력규모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했지만,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전투병 파병은 국민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참여연대를 포함한 시민사회단체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며 파병의 부당성을 강하게 제기했고, 한미동맹과 석유 확보 등을 내세운 정부의 ‘국익’논리에 대한 반박을 이어갔다. 그러나 국회는 끝내 2004년 2월 13일 추가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파병 예정 지역을 둘러싼 치열한 공방

전투병 추가파병이 결정된 이후로는 파병예정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공방이 오갔다. 애초 미국이 파병을 요청한 지역은 이라크 북부 모술이라고 알려졌고, 북부지역에 파병될 경우 위험한 지역으로 꼽히는 키르쿠크 지역까지 맡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3년 6월, 정부는 민간인을 포함한 합동조사단을 꾸려 모술지역을 답사했는데, 현지조사 후 해당 지역이 예상보다 위험하지 않다는 조사결과를 공식 발표하였다. 그러나 합동조사단에 유일하게 민간인으로 참가했었던 가톨릭대 박건영 교수는 조사결과 발표 자리에서 모술 지역 조사가 미군의 브리핑시간 외 지역 현지 조사는 45분에 불과했으며 그것도 헬기와 차량으로 지역을 돌아보는 수준이었다고 폭로했다. 참여연대도 파병예정지로 추진되고 있는 모술지역 상황을 조사하고 있었다. 박정은 간사와 이나래 당시 자원활동가 등은 며칠 밤을 새면서 유엔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이라크안전보고서’를 분석하여, 모술 지역이 이라크에서 가장 많은 공격이 발생하고 있는 위험한 지역임을 보도자료로 발표한 것이다. 참여연대는 정부의 조사 내용이 부실할 뿐 아니라, 현지 위험 상황을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하고 있다며 정부 보고서 검증을 위한 공청회 개최를 요구했다. 파병예정지를 둘러싼 정부와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결국 정부는 파병지를 쿠르드 지역 아르빌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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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10월 참여연대 창립 10주년 시민한마당 행사가 열린 서울광장에서도 이라크 파병 철회를 촉구하였다.

김선일의 ‘살고 싶다’는 외침 외면한 정부, 다시 타오르는 촛불

한국군의 임무는 평화 재건이므로 이라크 현지인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라던 정부의 말은 금새 거짓으로 드러났다. 2003년 이라크에서 근무하던 ‘오무 전기’ 한국직원 4명이 티그리트 주변 고속도로 상에서 총격을 받아 2명이 숨지고 2명이 중상을 입은 데 이어, 2004년 6월 21일 새벽, 이라크 무장단체가 가나무역직원 김선일 씨를 납치했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무장단체는 24시간 내 파병을 철회하지 않으면 김씨를 살해하겠다고 했다. 파병반대국민행동은 무장단체에 김선일 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한편, 정부가 김씨의 석방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촉구했다. 하지만 정부는 김씨의 피랍과 파병결정은 무관하다며, 테러단체와의 협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민의 생명보다 중요한 국익은 없다며 시민들은 다시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다음날 22일, 파병반대국민행동을 포함한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은 청와대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했고, 이후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김선일 씨 피랍 사건으로 온 국민이 충격을 받고 있을 무렵, 미국은 김씨의 피랍사실을 알고도 한국정부에 즉각 통보하지 않았다는 의혹이 드러났다. 참여연대는 김선일 씨의 피랍시점과 더불어 당시 떠오른 의혹들을 정부가 명백히 밝힐 것을 요구하며, 감사원 조사 뿐 아니라 국정조사까지 병행할 것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김선일 씨는 정부의 외면 속에서 결국 피살되고 말았다. 국민을 보호해야 할 국가는 그 자리에 없었다. 이 소식을 접하고 온 국민들의 애통과 분노가 거리를 휩쓸었고, 파병반대국민행동은 또 다시 시민들과 함께 촛불을 들었다. 함께 연대했던 여야 국회의원 40여 명은 ‘국군부대의 이라크 추가파병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추모의 물결은 계속 이어졌고, 진상규명과 파병철회를 외치는 목소리는 더욱 드세졌다.

파병부대 활동에 대한 집요한 모니터 활동

결국 정부는 이라크 추가 파병을 강행했다. 그렇다고 파병반대 운동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이 주둔하는 기간 내내 한국군 파병기간도 계속 연장되었다. 참여연대는 이라크에 주둔한 한국군부대의 활동과 이라크 현지상황을 지속적으로 감시하는 활동을 이어나갔다. 주둔부대 활동과 관련한 정보 공개를 요구하는 등 모니터 활동을 이어간 지 1년, 참여연대 이태호 정책실장이 주도하여 이라크 파병의 배경과 파병진행과정의 문제점, 파병 반대의 논리를 총망라한 약 300페이지의 자료집을 발간하기에 이른다(2005년 11월). 보고서는 정부가 자이툰 부대 활동 실적을 과도하게 부풀리고 있다는 점, 실제 재건비용은 파병예산의 10분의 1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 상당부분의 예산이 쿠르드 민병대와 정보조직 지원에 사용된다는 점 등을 공개하며 정부와 국회가 파병 부대 철수에 나설 것을 요구했다. 참여연대의 파병부대 모니터 활동은 정부의 왜곡, 은폐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2007년 10월 당시 박정은 팀장이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 인터뷰에서 “자이툰부대의 공개되지 않은 활동 중에 쿠르드 민병대 훈련이 있다”고 밝힌 것에 대해 합동참모본부는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보도자료를 내기도 했지만, 참여연대는 미 육군이 발행한 『밀리터리 리뷰』에 담긴 당시 자이툰 사단장의 기고 글과 미 육군협회 발행지 『육군』 9월호 및 국정감사 자료를 들어 합참의 주장이 거짓임을 밝혀내기도 했다. 2007년 6월에는 자이툰 부대 활동에 관한 정보공개 거부에 대해 참여연대가 행정심판을 제기하자 정부가 허위로 조작한 서류를 행정심판위에 제출했던 사실이 드러내기도 했다.

┃ 성과와 의미 ┃

한국의 이라크 파병반대 운동은 결과적으로 파병을 막지는 못했다. 정부와 군 당국, 파병에 찬성하는 학계 등이 내세우는 실체 없는 ‘국익’론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미국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라크파병반대운동은 수많은 논쟁을 통해 한국 사회에 진지한 화두를 던졌다. 한국은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국가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헌법 정신을 따라 침략전쟁을 부인하고 국제평화에 기여하는 나라가 될 것인가를 말이다. 한반도 평화와 국제 평화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시민사회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이는 참여연대 평화운동이 지속적으로 도전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지금도 참여연대는 한국군의 해외 파병에 대한 감시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 당시의 주장과 근거들이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파병반대 운동은 참여연대가 반전평화, 한미동맹의 민주화 등 활동 의제를 분명히 세우고 이후 본격화되었던 PKO법 제정과 한국군 해외파견 문제를 지속적으로 모니터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한 정책대응, 시민사회운동 조직, 직접행동 기획 등 참여연대 평화운동의 전형을 만들었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해외 평화활동가들과 긴밀하게 소통하며 국제연대를 확장해 나갈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비록 한국군 파병은 저지하지 못했지만, 한국 평화운동으로 더 성숙해지고 단단해졌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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