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활동✨100 1994-2014 2014-12-31   2086

[063] 해외 진출 한국기업 감시 활동 – ‘슈퍼 앵그리 맨’의 나라, 한국은 과연 좋은 이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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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진출기업의 인권침해 실태와 기업의 투자 전략, 정부 정책, 각 국의 다국적기업 모니터링 사례 등 해외진출기업과 관련된 다양한 소식을 담아 발간했던 계간지 <지구촌 인권통신>.

┃ 배경과 문제의식 ┃

90년대 초 한국기업은 값싸고 풍부한 노동력을 찾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동남아 국가나 온두라스, 과테말라 등 중남미로 직접 투자를 활발하게 하기 시작했다. 상대적 저임금을 이용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노동자 조직화 수준이나 노동권 의식이 낮아 조직적 저항이 적다는 사실, 그리고 현지 국가가 자국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기보다 외국 기업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 커다란 투자 유인으로 작용했다. 94년 말 기준으로 국내 기업의 해외진출건수는 102개국 4,125개 기업(총 투자액 97억 달러)으로, WTO체제 하에서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 전략에 따라 각종 규제완화 조치를 취하고 기업의 해외투자를 적극 지원하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전체 투자의 절반 이상이 제 3세계와 노동집약적 산업인 제조업 분야에 집중되었는데, 대다수가 국내에선 내리막길을 걷던 신발, 가발, 봉제공장들로 대기업에 밀려 자기 생존을 모색하는 중소규모의 기업들이었다. 이들 소규모 기업들은 단기간에 투자 이익을 거두기 위해 60~70년대 한국의 가혹한 노동통제방식을 그대로 적용하여 현지 노동자들에게 큰 반발을 샀다. 저임금, 열악한 작업환경, 비인간적인 경영방식, 억압적인 노무관리, 잦은 노사분규 등 국내에서 익숙했던 이야기들이 해외로부터도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천진시의 외국기업 분규 10건 중 9건이, 인도네시아의 경우 93년 노사분규 300건 중 대부분이 한국기업들에서 일어났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세계 유명 관광지마다 한국 관광객들의 추태가 종종 언론에 보도되며 ‘추한 한국인(어글리 코리안)’이란 말이 퍼지고 있었는데, 해외진출 기업의 거친 관리방식, 인격 무시, 노사분규 소식도 추한 한국인의 이미지를 덧대고 있었다.

세미나 등으로 해외를 왕래하던 한국의 지식인들은 현지 교수나 노동인권 단체 활동가로부터 구체적인 한국인의 억압적인 노무 관리 방식, 천민적 행태에 대해 듣게 되었다. 언론에서도 이따금 보도가 되었는데, 1993년 한국여성노동자회가 마련한 기자회견에서는 인도네시아 여성 활동가 3명이 한국기업의 악명을 생생히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선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인권 침해 문제가 한창이라, 거기에 해외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인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사업을 추진할 만한 사람, 단체가 사실상 없었다.

그러던 차에 창립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던 조희연 교수가 참여연대가 나설 것을 제안하였다. 먼저, 외국에서 한국기업에 대한 비판을 들은 진보적 지식인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각자 자신들이 들은 이야기들을 풀어놓게 했다. 산업의 특성상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다수인데 아예 화장실 수를 적게 만들거나 번갈아 가도록 하면서 화장실 사용을 제한하고 퇴근할 때 몸수색을 하고, 이슬람교도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기도시간을 통제하고 예배를 강요한다는 둥의 이야기들이 봇물 쏟아지듯이 나왔다. 노동권만의 문제가 아닌, 타 문화에 배타적인 인식도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 발음 그대로 ‘Segyehwa’라고 표기하면서까지 정부는 세계화를 추구했지만, 우리는 미처 ‘세계시민의식’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한겨레신문에서 동남아 여러 나라를 돌아보며 한국인과 기업들의 태도를 취재해 연재했는데 제목이 ‘아시아와 어떻게 사귈까’였다. 참여연대가 시민단체의 활동방식으로 나서는 것이 일견 필요했다.

조희연 교수는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질만한 사람, 서강대 신윤환 교수를 비롯하여 이정옥 효성가톨릭대 교수, 전제성 박사 등 당시 동남아 지역 전문가와 진보적 사회학자, 노동운동가를 하나둘 참여연대로 이끌었다. 이렇게 해서 1995년 봄, ‘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라는 다소 투박한 이름의 활동기구가 조직되었다.

┃ 주요 활동 경과 ┃

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는 국내 첫 여론화 작업으로 1995년 5월 11일 ‘해외진출기업과 인권’이라는 주제로 공청회를 열고 그동안 언론 보도 기사와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얻은 정보들을 수집하여 자료집을 냈다. 영어 번역이 기본으로 필요했지만, 인도네시아어, 중국어, 베트남어, 스페인어까지 한국기업이 진출해있는 나라의 언어 번역가들이 필요했다. 외대 자원활동 학생들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홍콩에 있는 아시아정보센터(AMRC)의 도움으로 홍콩의 노동운동가를 초청하여 한국기업과 비슷하게 악명을 떨치는 대만기업의 사례를 듣는 자리도 마련했다.

그리고 7월, 직접 한국기업들이 가장 많이 진출해있는 인도네시아로 현지 조사를 갔다. 당시 참여연대는 창립 초기라 재정 상황이 여유롭지 못했다. 현지조사 비용뿐 아니라 이후 소식지 발간 등 해외진출 한국기업의 인권침해 감시활동 사업 대부분을 해외프로젝트로 신청해서 충당해야 했다. 현지 조사단은 인도네시아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신윤환 교수를 주축으로 전제성 박사와 김은영 간사, 그리고 AMRC에서 활동하는 한국 활동가 차미경이 현지에서 결합하여 구성되었다. AMRC는 아시아 여러 단체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돼있고 조사 경험도 많아 한국 조사단이 누굴 만나야 할지 일정을 짜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우선 규모는 작지만 노동자들을 직접 상대하는 현지 노동단체를 통해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해고노동자를 만났다. 한국에서 조사하러 왔다하니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길게 줄지어 서있는 노동자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일은 모두 신윤환 교수와 미리 통역자원활동을 부탁받은 인도네시아에서 유학 중인 외대 학생의 몫이었다. 조사단은 일 끝내고 오는 노동자들을 위해 밤에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국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후련해했다. 한국 사람은 화 잘 내고 소리 잘 지르고 잘 던지기로 정평이 나 있어 ‘슈퍼 앵그리 맨’이라 했다.

한국 관리자들은 대부분 국내에서 하급 관리자로 지낸 이들로 사전에 그 나라에 대한 문화나 전통, 언어를 제대로 교육을 받지 않은 채 투입되었고 노동 법규라든가 노동권, 인권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무지했다. 한국 기업의 관심은 오로지 이윤의 극대화였다. 조사단은 노동자들만의 이야기뿐 아니라 현지 관련기관, 언론인, 그리고 한국기업도 찾아가고 한국대사관도 찾아가 이야기를 들었다. 현지 조사를 마치고는 한국에 돌아와 ‘한국은 과연 좋은 이웃인가’라는 제목으로 보고회를 열고, 노사갈등과 인권침해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노동집약적 산업 진출에 대한 강력한 통제, 투자자와 관리자 교육 강화, 현지 근로감독체계 확립, 시민단체의 감시체계 확립 등을 제시했다.

시민포럼 ‘지구촌 좋은 이웃되기’도 매월 열었다. 정보를 교류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자리인데, 과거 한국에서 외국투자기업에 맞서 싸웠던 노동운동가들도 참여하였다. 포럼 참석자들은 기업 스스로가 한국 시민들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업의 거친 노무관리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업 노무관리 개선 권고 엽서’를 써서 발송했다. ‘지구촌 인권통신’이라는 계간 소식지도 발간하여 해외진출기업의 인권침해 실상과 기업의 투자전략, 정부 정책, 각국의 다국적기업 감시 활동 사례를 소개해 관련 기관들에 배포했다.

현지조사는 이듬해 인도네시아로 한 차례 더 다녀왔다. 이정옥 교수, 황덕순 박사, 변성규 한양대 교수, 외대 중국어과 출신 정민용 간사를 임시로 채용해 중국에 다녀왔으며, 이후 베트남도 다녀왔다. 중남미는 직접 가기는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아 미국에 있는 단체들을 통해 자료와 영상물을 구했다. 또한 차지훈 변호사를 중심으로 ‘해외투자기업의 행동강령(code of conduct)’을 만들어 경총 등 경제단체들에도 보내 기업들이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촉구하고 법제화를 모색하는 국제 세미나도 개최하였다. 노동자들의 국제연대도 필요한 일이기에 민주노총 조합원 교육용 소책자도 만들어 연대활동에 함께하자고 설득했다.

참여연대의 활동이 외국에도 알려지면서 외국 노동인권단체들이 현지에서 문제가 되는 한국기업에 대한 정보를 문의해왔다. 규모가 작은 기업의 정보는 한국에서도 얻기 어려웠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로 가서 개괄적인 기업 정보를 찾아 전달했는데도 유용하다며 고마워했다. 또 현지 기업에 항의편지를 보내면서 해외 단체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일상적인 감시활동을 해나갔다. 그러면서 이미 유럽을 중심으로 다국적기업 혹은 초국적기업에 대한 감시활동과 시민들의 캠페인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국제 세미나에도 참여하면서 경험을 공유하였다. 흥미롭게도 일본에서도 한국과 유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과거 한국에 투자한 일본기업의 만행에 ‘일본 진출기업문제를 생각하는 모임’이 구성되어 한국 노동자들을 지원했는데, 이제 한국기업이 같은 길을 걷고 있다며 참여연대를 초청해서 경험을 나누기도 했다.

┃ 성과와 의미 ┃

해외진출 한국기업이 현지에서 일으키는 문제는 과거 수출자유지역에 있던 수미다, 피코, 모토로라, 이리 후레어 훼션 등 한국에 와 있던 외자기업들로부터 우리가 겪었던 문제이기도 했다. 이제 거꾸로 한국이 가해자로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개발독재국가로 성장하는 동안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고 기계처럼 부렸던 것을 이제 우리보다 잘 살지 못하는 나라에까지 가서 그들의 문화와 인격을 무시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려는 천민의식을 그대로 보인 것이다.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한국을 많은 개도국들이 자신들의 개발모델로 삼으려하는 그 때 우리의 과오까지 답습하지 않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혹자는 아직 한국 내의 한국인 인권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마당에 남의 나라 남의 인권까지 개입할 여력이 어디 있느냐고 문제제기하기도 했다. 아직 인권의식이 세계화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던 때였다.

해외진출기업 감시 활동을 통해 참여연대는 한국 시민의 보편적 인권 의식의 확장을 꾀했다. 한국 시민사회에서 지구촌, 특히 아시아부터 먼저 알고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관점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를 토대로 아시아에 대한 시민강좌를 열고, 아시아 인권여행(지구촌 좋은 이웃되기 배낭여행-버마, 중국)을 조직하고, 영어만능주의에 빠져있던 그 때 시민사회 내에서는 아시아 언어도 구사할 수 있는 지역 전문가의 발굴과 양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해외진출기업문제 특별위원회는 정책위원회 산하에 있던 국제연대위원회와 통합되어 1997년 ‘국제인권센터’라는 활동기구로 전환되었다. 그러다가 1999년 9월 국제인권센터는 참여연대에서 독립하여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라는 새로운 단체를 창립하였고, 현재까지 해외진출기업 감시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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