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사법감시紙 1996-02-01   1602

[03호] 12.12, 5.18과 사법바로세우기

12.12, 5.17과 5.18로 상징되는 정치군부의 범죄행위는 때로는 적나라한 폭력과 살상으로, 또 때로는 법의 이름으로 법률기관의 입을 빌려 이루어졌다. 지난 13년간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그들의 원죄에 대하여 왜곡과 침묵, 기만적인 회해조치로 그들의 집권가도의 첫단계를 장식한 핏자국을 씻어 내려 애썼다. 대형사건이 빈발하는 이 땅에서 '망각의 해법'은 모든 부정한 권력자에게는 최상의 무기였다. 순치된 정치권과 제도언론, 잘 길들여진 검찰과 수동적인 법원, 거기다 지역감정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80년 광주는 옛날옛적 일어난 잊어버려도 좋은 사건으로 넘어갔다. 이 모든 기도는 성공하는 듯했다.

지난해 7월 검찰이 '공소권없음'이란 기묘한 법이론을 내세웠고, 시효는 마지막으로 치달아 범죄자들이 한숨 돌리고 있을 그 때부터 역사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평화적으로, 그렇지만 도도하게 전개된 기소촉구와 특별법제정운동은 불가능했을 것 같은 성취를 이루어냈다. 이를 김수환 추기경은 '진리의 힘'으로 해석했다.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기적일 수밖에 없는 사건들이 잇달아 생겨났고, 그것이 모여 전직 대통령 두명의 구속이라는 엄청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다. 개개인들의 지략과 술수를 압도해 버리는 역사의 신에 대한 믿음을 가끔씩 얻는 것은 이런 대목에서일 것이다.

'역사 바로세우기'는 특정 지도자의 정치적 구호이기 이전에 온 국민의 타는 목마름이었다. 총칼과 기만이 우리를 덮쳐 누르고 있던 시절, 독재자들을 비난하면서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는 부끄러움이 있었다.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잊어버리면서,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죽은 문자로 만드는데 모두가 일조하지 않았던.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악의 편이다'라는 본회퍼의 말을 떠올릴 때, 그 부끄러움은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했다.

법을 만들고 해석하고 집행하는 모든 이들은 그러한 부끄러움을 더욱 많이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독재자는 법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를 원했으므로! 법은 권력의 도구이고, 법률기관은 '정권의 주구'라는 오명을 써야 했고, 법정소란행위자들이 당당할 수 있었던 명분을 스스로 제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악한 과거에 오염되면서도 그것을 부끄러이 여길 줄 아는데서 미래의 발전이 기약된다.

개인과 달리 제도는 단지 참회한다는 말로써 회개할 수는 없다.법원과 검찰, 헌법재판소 등의 법률기관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내렸던 결정을 바로잡음으로써 자신의 과거를 청산할 수 있다. 과거 왜 그러한 결정을 내렸는가 하는 비난은 받아야 마땅하지만,때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이다. 자신들의 역량으로 법치와 정의를 바로세울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소극적인 보신과 타성에 젖어 있어서는 안된다. 청산할 기회에 청산하려는 의지적 노력을 보이지 않으면 정말로 '역사의 죄인'으로 자신의 묘비명을 새겨야 할 것이다.

학살자와 부패자들은 법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불처벌의 논거를 내세우고 있다. 헌정질서와 법치주의를 반헌법적·반법치적으로 짓눌렀던 자들이 이제는 법을 통해 법망을 빠져나가려 한다. 법의 파괴자들이 법의 힘을 빌려 빠져나가도록 하는 데 봉사하는 법일 수밖에 없는가.

과거청산은 백지 위에 그려지는 도면이 아니다. 이미 구석구석에얼룩과 낙서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청사진을 그려가는 작업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용기보다 지혜이며, 법률자구에 대한 지식에 못지 않게 차원 높은 판단과 안목이 중요시된다. 어느 나라나 과거청산은 커다란 진통과 반발을 수반한다. 법률가의 역할은 그러한 진통과 반발을 법의 테두리 내에 끌어들이면서, 잘못된 역사를 일관성 있게 심판하여 미래를 위한 터전을 닦아가는 것이다.

지금은 과거의 잘잘못에 오염될 수밖에 없었던 법률기관이 스스로를 쇄신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이다. 잘못을 반성하는 행동을 비할 수는 없다. 검찰의 '기소유예처분'(12.12), '공소권없음' (5.18)의 반법치적·반역사적 결정을 바로잡기 위한 최근의 수사·소추작업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검찰의 방향전환에 대하여 일관성의 문제를 내세우고, 다른 유형의 권력의지에 종속된행위로 보기도 하고, 특검제 주장을 무산시키기 위한 행위로 비난하기도 한다. 이 모든 주장은 나름대로 타당하며, 그 원인제공자는 물론 검찰이다. 그러나 검찰로서는 자신들이 과거에 저질렀던엄청난 과오를 바로잡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무리 검찰이 미워도 폐기할 수 없기에, 국민의 입장에서도 '검찰바로세우기'가 진정으로 진행된다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극복해야 할 과제도 많다. 진정 검찰 바로세우기라면, 12.12와 5.18 범죄자들을 정치적 고려없이 범죄관여의 경중에 따른 법적 판단에 입각해서 엄격히 소추해야 할 것이다. 소추범위에서 다시 현 집권층의 주문의 냄새가 풍긴다면, 검찰로서는 15년 국민불신을 씻어 낼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이다.

정치군부의 범죄행위를 완성시키는 데 가담한 법원의 재판도 이제 바로잡혀야 한다. 우리 법원은 12.12와 5.17, 5.18과 관련하여 가해자와 피해자를 거꾸로 판결하고도, 그러한 잘못된 판결을 스스로 재심을 통해 번복시키는 모습을 보여오지 않았다. 5.18 특별법에 특별재심 조항이 들어간 것은, 법원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적 응답이요, 법원에 오류를 광정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재정신청에 대한 특례도 마찬가지이다. 여태껏 법원은 검찰의 기소권전횡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 이 사건들에 대해 검찰이 한정소추·선별소추를 하고자 할 때, 법원에 그러한 잘못을 특별검사(공소유지변호사)를 통해서라도 바로잡을 권한을 이 기회에 부여한 것이다. 법원이 특별재심조항을 잘 활용할 때 실질적 피해자들의 분노와 원한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며, 재정신청조항을 적극 활용할 때 검찰의 전횡견제는 물론 한국의 법치를 우뚝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씻어 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여태까지의 타성과 보신책으로만 일관해서는 안된다.

5.18특별법과 관련자 기소와 관련하여 제기된 헌법적 쟁점에 대한 궁극적 판단은 헌법재판소의 몫이다. 공소시효의 기산점 문제, 공소시효 정지문제, 대통령이 아닌 공법의 처벌시효의 문제 등이 판단대상으로 남아 있다. 지난번의 피해 당사자들의 소취하가 헌재를 모욕했다는 비판을 하기 이전에, 명백한 내란범죄에 대한 헌재의 우유부단함이 모욕을 자초하는 결과를 빚어내지 않았는지 진지하게 반성할 일이다. 내란으로 집권한 대통령이 검찰권을 수족처럼 부리고 있던 기간, 즉 공소권행사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기간을 공소시효가 진행되었다고 하는 것은 어거지 형식논리에 불과하다. 주범이 대통령인데, 공범은 처벌할 수 있지 않았는가 하는 질문도 어리석은 것이다. 공소시효에 관한 5.18 특별법의 조항은 이 당연한 사리를 법제화한 것일 따름이다.

몇몇 언론에서는 5.6공 불법통치에 부역했던 법률가 군상을 언급하고 있다. 개개 법률가는 비판받아도, 제도로서의 검찰·법원·헌재는 신뢰를 회복하고 국민의 마음속에 되살아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과거잘못을 스스로 바로잡아가야 한다. 우리의 법률기관들이 국민의 힘으로 만들어진 이 소중한 자기정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겸허하게 헌신하기를 소망해 마지않는다.

한인섭 l 서울대 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