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감시센터 칼럼(jw) 2003-11-25   1187

<안국동 窓> 헌법, 그리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

집시법 개악은 안된다

1. 마당

한국인은 ‘무대’가 아니라 ‘마당’의 사람들이다. 배우와 관객을 엄격하게 분리한 뒤 한쪽은 보여주기만 하고 다른 쪽은 지켜보기만 하는 저 서구적 이분법의 무대에서 한국인은 결코 자유를 얻을 수 없다. 모두가 배우이고 모두가 관객인 공간, 모두가 보여주고 모두가 지켜보는 공간, 이 즉흥과 신명의 마당에서 한국인은 비로소 역사 속에 실현되는 자아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이 마당은 곧 주인 또는 저자(Author, 권위자)가 없는 공간이다. 주인 또는 저자가 있다면, 그것은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어떤 의무감에서도 아니고, 제 스스로 마당을 열고 그곳에 나와 ‘감동’을 만들어가는 평범한 한국인들일 뿐이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이 벌어졌던 서울시청 앞에서 작년(2002) 같은 달 월드컵 응원전이 벌어졌을 때, 우리가 다시금 확인했던 것은 한국사회에서 ‘마당’의 중심성이 여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특히 6월 민주화 항쟁을 경험하지 못했을 젊은 세대가 자발적으로 감동적인 붉은 색의 바다를 연출했던 것은 그들 역시 ‘마당’의 사람들임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 광경을 목격했던 대다수의 서양 사람들이 원더풀(Wonderful!), 이츠 어메이징(It’s amazing!)을 연발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마당’의 놀라운 위력에 그들 모두가 압도당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비극적인 한국근대사에서 이 ‘마당’은 대체로 서러운 절규의 공간이었다. 그렇기에 그 절규의 목소리가 클라이맥스에 오를 즈음 마당은 어김없이 최루탄과 돌, 진압봉과 쇠파이프, 백골단과 화염병으로 뒤덮이곤 했다.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마당의 모습. 무대의 논리에 익숙한 서양의 TV화면에 그것은 당연히 무질서와 혼란의 표상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마당의 고유한 논리 속에서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방향에서만 단죄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지게 된다. 비록 서러운 절규의 목소리일지언정, 버림받고 무시당한 사람들까지도 마당의 중심에 엄연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광경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위현장의 과격한 격돌을 들어 국제적 신인도의 하락을 들먹이는 것은 문제의 표면에만 집착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서양 사람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그러한 무질서와 혼란에도 ‘불구하고’아랑곳 하지 않고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고 있는 저 불굴의 동력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것을 한국인과 한국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마당’의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배우이고 모두가 관객일 수 있는 이 공간의 특유한 활력. 이분법적 무대의 논리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2. 헌법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헌법은 이 ‘마당’의 논리에 관하여 매우 호의적이다. 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선언하면서(제1조 제2항), 그 구현방법 중의 하나로 모든 국민이 ‘집회의 자유’를 가진다고 언명한다(제21조 제1항). 시위는 움직이는 집회로서 그 자유는 집회의 자유에 당연히 포함된다고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민주권을 실현함에 있어서 집회(시위)의 자유는 필수적 조건이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한 그 제한은 기본권제한의 일반원리(제37조 제2항)를 지켜야 하는 것은 물론 더욱 엄격하게 통제되어야 한다는 것이 헌법의 기본적인 시각이다. 집회와 결사에 관한 국가의 허가제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헌법의 태도(제21조 제2항)는 그 단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마당의 문제에 관련된 실정법(특히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은 마땅히 이와 같은 헌법적 기대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입법되어야 한다. 국가의 허가제에 의거한 사전적 제한은 있을 수 없으며, 사후적 제한도 그 기본적인 방향은 다른 국민들과의 기본권충돌을 적절히 해결하려는 목적에서 고안되어야 한다.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려는 입법적 지향이 있어야 하고, 민사적 형사적 방식으로 충분히 권리구제가 이루어질 수 있음에도 집회(시위) 자체를 불법화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규제내용은 표현내용과 무관해야 하고, 과잉금지원칙, 특히 최소제한의 원칙과 필요성의 원칙을 지켜야 하며, 규제의 기준이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 요컨대, 가능한 한 집회(시위)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하려는 태도가 실정법의 내용과 형식에 배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2003년 10월 30일 헌법재판소가 내린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11조에 관한 위헌결정(2000헌바67, 2000헌바83 사건 – 병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헌법재판소는 국내주재 외교기관 청사의 경계지점으로부터 1백 미터 이내의 장소에서 옥외집회를 전면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동 조항을 헌법에 위반된다고 결정하면서, 동시에 집회(시위)의 자유의 제한에 관한 일반원리를 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입법자는 집회의 자유를 제한함에 있어서 특정장소(외교기관)를 보호하는 별도규정을 둘 수는 있으나, 그 경우에 반드시 비례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여기서 비례원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은 단지 1백 미터라는 금지구역의 범위가 필요한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1백 미터 안에서도 ‘국내주재 외교기관에의 자유로운 출입 및 원활한 업무의 보장, 외교관의 신체적 안전’과 같은 보호법익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예외적으로 집회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헌법재판소는 집회(시위)의 자유의 제한과 관련하여 일반적 추정의 합리성만이 아니라 구체적 배려의 필요성까지도 입법자에게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이러한 구체적인 경우들로 (1) 외교기관에 대한 집회가 아니라 우연히 금지장소 내에 위치한 다른 항의대상에 대한 집회 (2) 소규모집회 (3) 휴일집회 등을 예시한다. 그리고 이것들에 대한 고려 없이 외교기관 청사의 경계지점으로부터 1백 미터 안에서의 모든 집회를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것은 기본권제한에 있어서 최소제한의 원칙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사실, 이와 같은 논리는 반드시 외교기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같은 조문에 열거되어 있는 청와대,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등에 관해서도 적용될 수 있다. 나아가 그처럼 확장된 의미로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이해하는 것이 주문의 형식에 있어서 헌법불합치결정대신 단순위헌결정을 택한 의도를 제대로 헤아리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압도적 다수의 헌법재판관들은 이 조항의 효력을 당분간 유지하는 헌법불합치결정으로는 집회(시위)의 자유에 대한 위헌적인 침해를 적절히 제거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3. 개정이 아니고 개악이다!

헌법재판소의 세심한 판단이 있은 뒤 국회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의 개정작업에 착수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은 당연히 ‘마당’의 논리와 가치에 주목하는 헌법적 기대가 제대로 반영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2003년 11월 19일 국회의 행정자치위원회를 통과한 동 법률의 개정안은 그 방식과 내용에 있어서 이러한 예상을 정면으로 뒤엎었다. 특히 동법의 개정을 위한 법안심사소위원회를 구성한 뒤(2002.07.19.)1년여를 방치하다가 갑작스럽게 법안심사소위원회가 4개의 법률안을 종합하여 동 소위원회의 대안을 마련한 것이나, 이 대안에 관하여 단 한 번의 공청회도 개최하지 않은 채 주관상임위원회인 행정자치위원회를 통과시킨 것 등은 ‘마당’에 관한 헌법적 기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마당’을 관리하는 가장 중요한 법률인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을 개정하는 것이라면, 일단 그 개정안 자체가 ‘마당’에 나와 다양한 비판에 노출되는 것이 마땅하겠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시민사회의 일각에서 경찰청의 강력한 로비를 의심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추론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쩌면 이렇게 졸속으로 입법과정을 진행할 수 있단 말인가?

개정안의 내용에 관해서도 개정(改正)이 아니라 개악(改惡)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적지 않다. 우선, 주요도로에서 질서유지인을 두고 행진하는 경우에도 당해 도로와 주변 도로의 교통소통에 장애를 발생시켜 심각한 교통불편을 줄 것이 예상되는 때에는 이를 금지할 수 있도록 한 내용(개정안 제12조 제2항 단서 신설)이다. 질서유지인을 두고 행진하는 것을 금지하지 못하도록 한 현재의 규제와 비교할 때, 이것은 사실상 관할경찰서장에게 주요도로에서의 행진여부까지를 허가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시행령에 규정된 주요도시의 주요도로는 시위가 발생할 경우 항상 심각한 교통불편을 동반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규제의 의도는 주요도로가 사람과 차량의 통행이 빈번하기에 집회 및 시위의 효과를 거두기에 적합한 공간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원활한 교통소통과 시위(행진)의 자유를 질서유지인을 둔 행진의 경우에는 금지할 수 없도록 하는 수준에서 조화시키려는 것이다. 별도의 집회 및 시위공간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규제는 일단 합리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그보다 엄격한 규제를 도입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국회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주요도시의 주요도로를 대통령령으로 정하게 한 뒤, 그 장소에서의 집회(시위)를 제한하고, 다시 그 위반행위를 처벌하는 것(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제20조)의 정당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집회(시위)를 예외적으로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허가제로도 평가될 수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죄형법정주의 및 기본권제한의 일반원리인 법률주의에도 정면으로 위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령이 아니라 법률로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그와 함께 고속도로나 자동차전용도로의 경우에는 원활한 교통소통 이외에도 시위(행진)참가자의 신체에 대하여 중대한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욱 높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별도의 규정을 마련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신고된 집회가 집단적인 폭행ㆍ협박ㆍ손괴ㆍ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할 경우에는 남은 기간의 당해 집회ㆍ시위와 동일 목적의 다른 집회ㆍ시위에 대해 관할경찰서장이 금지를 통고할 수 있도록 한 것(개정안 제8조 제1항 단서 신설)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동 개정안이 ‘집단적인 폭행ㆍ협박ㆍ손괴ㆍ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험을 초래할 경우’라고만 규정하고 있을 뿐, 그 사태의 책임소재가 신고된 집회의 주최자에게 있는지 여부에 관해 아무런 언급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의도에서 벌어진 최근의 농민시위에서 확인했듯이, 옥외집회와 가두시위로 표출되는 사항들은 대부분 국회나 언론과 같은 기성의 공론장에서 해결되기 힘든 문제들이기에, 그 진행과정에서 우발적인 폭력사태가 초래될 여지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이 확실히 집회의 주최자나 선량한 참가자들에 의해 기획되거나 유도된 것이 아니라면, 우발적으로 발생한 폭력사태의 책임을 집회와 시위를 통해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려는 주최자 및 선량한 참가자들의 정치적 기본권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전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집단적 군중심리에 편승하여 폭력사태를 야기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집회의 주최자 및 선량한 참가자들과 분리하여 그 책임을 별도의 법적 절차를 통해 추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사법당국은 반드시 경찰의 과잉진압이 일종의 대항폭력을 불러 일으켜 폭력사태의 단초를 제공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시민들의 지적을 경청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신고서에 기재된 집회장소가 관계법상의 학교시설이거나 군사시설일 경우 그 시설이나 학습권 또는 군작전수행 등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할 우려가 있고 그 거주자 또는 관리자가 시설 등의 보호를 요청하는 때에는 집회 또는 시위의 금지나 제한을 통고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운영의 묘를 거두기 어려운 대목이다(개정안 제8조 제3항, 동 제18조 제1항 제4호). 학교당국이나 군부대가 학습권침해 또는 군작전수행지장의 이유로 보호를 요청하는 경우에는 예컨대 사립학교의 재단비리를 규탄하거나 군대내부의 인사비리를 비판하는 옥외집회를 학교나 군부대 앞에서 가지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서의 군사시설에 주한미군시설이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다). 공공시설로서의 의미가 강한 학교시설이나 군사시설을 주거지역처럼 공공영역으로서의 의미가 약한 장소와 동일한 평면에서 취급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주최자에게 통보한 뒤 집회 및 시위 현장에 경찰관이 출입하면서 질서유지를 위하여 주최자 및 참가자에게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도록 근거조항을 둔 것(개정안 제17조 제1항)도 우려를 자아내는 개정내용이다. 질서유지를 위하여 경찰관이 사사건건 집회와 시위의 내용에 개입하는 방식으로 이 조항이 운영된다면 집회(시위)의 자유는 심각하게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번 개정안은 그동안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던 장기간의 집회독점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보완통고의 기간을 연장하는 등 일부 긍정적인 내용도 담고 있다. 관변인사들로 채워질 위험이 적지 않지만, 집회 및 시위 자문위원회를 설치하는 것도 형식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개정작업의 도화선이 되었던 헌법재판소의 위헌결정을 매우 형식적으로 받아들여 외교기관 근방에서의 집회(시위)에 관한 예외규정만을 두었을 뿐, 동 결정의 취지를 청와대, 국회, 법원, 헌법재판소 등의 국가기관에 확대하는 것에는 대단히 인색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전반적으로는 집회와 시위를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행정의 규제대상으로 파악하는 관점에서 그로 인한 혼란과 불편을 최소화하려는 방식으로 개정작업이 진행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4. 소수자

국회의 행정자치위원회를 통과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개정안을 살피면서 다시금 떠올리는 것은 한국인이 가진 ‘마당’의 주인 또는 저자에 관한 물음이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마당’을 주인도 저자도 없는 모두의 공간으로 정의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그 ‘마당’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누군가 먼저 ‘마당’에 나와 서러운 절규로 그 공간을 열어가는 개척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회탈춤과 같은 전통마당극들이 보여 주듯이 그 개척자들은 어김없이 국회나 언론과 같은 기성의 공론장에서 소외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수자들이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의 경우에도 성난 군중이’마당’을 가득 메우기까지 박종철이 있었고, 정의구현사제단이 있었고, 6월 10일 이후 명동성당에 모여 단식농성을 계속했던 소수의 무리가 있었다. 작년 같은 달의 월드컵 응원열풍에도 붉은 악마라는 소수자의 헌신이 결국 ‘마당’을 일구었음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신비라 할 저 ‘마당’의 에너지는 궁극적으로 소수자들의 서러운 절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어떻게 바뀌든 국회와 언론에 채널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회의 주요세력들은 그다지 큰 타격을 받을 까닭이 없다. 각종 매스미디어에 차고 넘치는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의사표현은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세력들에게 가두시위는 그저 세련된 언론플레이의 한 방식일 뿐이다. TV 카메라와 함께 잠시 얼굴을 내밀었다가 이내 사라져버리는 대중스타의 영업방식으로 그들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공론장의 토론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을 수 없는 소수자들에게로 귀착된다.

이들에겐 찬바람 부는 공원과 광장과 거리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개정안대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 개정될 경우 목소리를 빼앗기고 불법공간에 내몰리게 될 피해자들은 분명히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소수자들일 것이 다. 그러다가 그들이 ‘마당’에서 아예 밀려나게 된다면, 그것은 단지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치명적인 재앙이 될지도 모르겠다. ‘마당’을 개척하는 소수자들이 없다면,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신비라 할 저 ‘마당’의 에너지 역시 소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깊이 고려한다면, 대한민국 국회는 지금이라도 본 개정안을 폐기해야 할 것이며, 각 정당은 시민사회와의 협조아래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의 새로운 개정안을 마련하는 작업에 하루 속히 돌입해야 할 것이다.

이국운(한동대 법학부 교수, 사법감시센터 실행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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