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6월 2013-06-07   1399

[참여연대史] 만리장성으로도 광장을 막지는 못한다 – 2009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10

만리장성으로도 광장을 막지는 못한다

2009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막힌 서울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주기 위해 서울시민 10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주민발의하여 조례를 개정했던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을 복기합니다.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2008년 촛불시위에 놀란 이명박 정부는 군중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서울시장도 거기에 호응했다. 다음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대한문 앞에 분향소가 설치되자, 서울시는 경찰청에 요청하여 30여 대의 버스로 서울광장을 촘촘히 막아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해버렸다. 

참여연대는 광장을 시민에게 돌려줄 방법을 고심한 끝에 허가제로 된 광장 사용에 관한 조례를 신고제로 바꾸는 운동을 펼쳤다. 여당이 절대다수였던 시의회에 발의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주민발의 뿐이었다. 서울시 유권자 1% 이상의 서명을 받아내야 했다. 불가능해 보였지만 마감 한 달을 앞두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 위 문서는 광장조례개정 청구 서명 용지임. 

 

 

차병직 변호사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 <욕심쟁이 거인The Selfish Giant>은 누구나 아는 우화다. 거인이 멀리 친구 집에서 7년을 보내는 동안 그의 빈 정원에는 동네 아이들이 매일 몰려와 꽃동산을 이루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온 거인이 그 광경을 보고 시끄럽다며 화를 내곤 아이들을 쫓아버렸다. 높은 담장을 쌓아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 그 뒤로 거인의 정원에는 봄이 찾아들지 않았다. 꽃은 피지 않았고, 새도 날아오지 않았다. 항상 겨울이었고, 거인은 우울했다. 그러던 어느 해 봄에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담장에 난 구멍으로 아이들이 들어와 나무 위에 올라타자 다시 꽃이 피고 새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거인은 담장을 허물어버렸다. 

 

정원은 자연과 인간이 만나 생명의 활력을 만들어 내는 주거 공간의 일부다. 따라서 사람이 없는 정원은 생각할 수 없다. 정원이나 집이 그러할진대, 하물며 광장은 어떠한가. 둘 이상의 길이 만나는 곳에 광장이 있다. 사람들이 교통에 방해 받지 않고 쉽게 접근하여 만남, 의견 교환, 산책, 휴식을 즐기는 곳이다. 시장이 열리기도 하고 축제가 벌어지는가 하면, 수시로 집회가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권력의 과시는 물론 반란과 처형이 동시에 행해지던 정치와 종교의 마당이기도 했다. 광장은 도시 구조의 구심점이며, 시민사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장소로 기능한다. 그런데 도심의 광장이 장벽으로 막혔다면 이해할 수 있는가?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광장을 대하는 기상천외한 방법

 

한때 서울시청 앞 교차로는 그 자체로 명물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의 일방통행로까지 포함하면 6개의 도로 어느 쪽에서 들어와도 평면에서 몇 바퀴 돌면 원하는 방향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복잡한 구조였다. 그 넓은 도로에 인파가 넘치는 장관을 연출한 것은 2002년 월드컵 때였다. 붉은악마를 비롯한 시민 응원단의 열기에 고무된 당국이 그 자리에 광장을 설치하기로 한 결정은 나름대로 멋진 판단이었다. 애당초 그곳은 고종 때 닦은 경성부청 앞 광장이었고, 3·1운동과 광복 후 격동기의 정치 집회가 단골로 열리던 현대사의 무대였으니 원상회복의 의미도 담고 있었다. 

 

약간의 곡절 끝에 40년 동안 물을 뿜어내던 분수대를 허물고 서울광장을 개장한 것이 2004년 5월 1일이었다. 지나다 언뜻 보면 동그란 잔디밭으로 보이지만, 시청 옥상이나 건너편 플라자 호텔에서 내려다보면 커다란 타원형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잔디 바깥으로 돌로 포장한 공간이 조성돼 전체적으로는 사각형이다. 중심부에 새 광장을 마련한 서울이 시민의 도시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4천 평의 서울광장이 높다란 담장으로 완벽히 봉쇄되어버렸다. 2008년 촛불시위에 놀란 이명박 정부는 군중을 적대시하기 시작했고, 서울시장도 거기에 호응했다. 다음해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망하고 대한문 앞에 분향소가 설치되자, 서울시는 경찰청에 요청하여 30여 대의 버스로 서울광장을 촘촘히 막아 아무도 접근할 수 없게 해버렸다. 와일드의 상상력을 무색하게 하는 기상천외의 발상이었다. 어이가 없어진 참여연대 간사 10명이 나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1인시위를 했다. ‘서울시장은 경찰청 버스 주차 관리인인가!’라는 피켓이 등장했다. 하지만 철창을 두른 버스가 무슨 대답을 하겠는가. 참여연대 행정감시팀은 고심에 빠졌다. 소송을 하는 방안과 허가제로 된 광장 사용에 관한 조례를 신고제로 바꾸는 운동을 동시에 펼치기로 했다.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10만 명을 모아야 했다

 

박주민 변호사가 나서 7월 21일에 헌법소원을 냈으나, 언제 결정이 날지 기약할 수 없었다. 조례 개정 운동은 6월에 시작했다. 시의원 10명 이상이 동의해야 개정안을 발의라도 해볼 텐데, 106개 의석 중 민주당은 겨우 5석에 불과했다. 주민발의를 시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 유권자의 1% 이상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대략 계산해도 8만여 명, 줄잡아 10만 명을 확보해야 가능했다. 

 

6월 10일, “광장을 열어라!”고 외치며 바로 서울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협동사무처장 박원석은 그 자리에서 10만 명의 서명을 받아내겠다고 공언했다. 그 짐은 고스란히 행정감시팀의 이재근, 신미지, 장정욱에게 떨어졌다. “3명은커녕 50명이 있어도 힘든 일”이라며 처음에 회의적 태도를 보였던 팀장 이재근이 발 벗고 나섰다. 먼저 서명을 받아줄 수임인을 모집했는데, 일주일 만에 천 명이 넘는 시민이 자원했다. 6월 24일에 수임인 신청서를 접수하고 광장조례개정 시민캠페인단을 발족하면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힘 내라 민주주의’란 기치와 함께 10명이 나뉘어 시청 앞과 여의도로 나섰으나, 성과는 고작 200명 남짓이었다. 그 비율대로라면 1년 6개월은 소요될 터였다. 마감인 12월 하순까지 달성하기에 목표는 너무 벅차 보였다. 8월 4일에는 인턴을 포함해 10여 명이 홍대 앞에 진을 쳤으나 겨우 50명의 서명을 받는 데 그쳤다. 거의 절망적이었는데, 그나마 희망을 이어준 계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식이었다. 분향소 앞에서만 일주일 동안 7천 명 이상의 서명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사람이 모이는 데라면 어디든 달려갔는데, 9월 19일 봉은사 초하루 법회에 간사 3명이 서서 애절한 눈빛을 보냈으나 펜을 들어 호응한 사람은 30여 명이었다. 법회에 참석한 노인들은, “며느리가 아무한테나 함부로 주민번호를 알려주지 말라고 했다”며 슬슬 피했다. 

 

서명은 그냥 지나치다 몇 초 머물면서 사인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니었다.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기재하고, 성명란과 서명란에 똑같이 정자로 이름을 적어야 했다. 그러니 웬만한 행인에게는 여간 성가신 과정이 아닐 수 없었다. 자칫 서두르다 보면 그 서명은 무효가 될 판이었다. 실제로 서울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이나 19세 미만의 성급한 성인이 서명하는가 하면, 어떤 열혈 광장론자는 혼자 7차례나 서명하여 중복 서명 부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마감을 2개월 정도 남겨 둔 10월 14일에 점검해 본 결과 서명인 수는 대략 4만 명, 아직 절반에도 비치지 못했다. 계속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논의했다. 사무처장 김민영이 고심에 차 있을 때, 협동사무처장이었던 이태호가 나섰다. 끝까지 밀어붙이자는 그의 강경론에 아무도 반대할 수 없었다.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기적은 거리에서 출발했다

 

다시 거리로 나섰다. 인턴들은 프로 경기가 열리는 잠실야구장으로 도루하듯 뛰어 갔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전체 간사가 동원된 11월 7, 8일의 여의도 노동자 대회에서 1천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았으나, 여전히 전망은 우울했다. 11월 중순부터 총력전을 전개했다. 모든 간사들이 사무실 업무를 중단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4명씩 팀을 구성해 지하철을 파고들었다. 도중에 다른 팀과 전화로 연락해 서로 자기 팀의 성과를 부풀려 자랑하며 상대를 독려했다. 그러다 잡상인으로 신고를 당해 쫓겨나기도 했다. “좋은 일 하시는 줄 알지만, 우리도 힘듭니다.” 간사들을 지하철 문밖으로 밀어내던 어느 공익근무요원이 한 말이다. 

 

그래도 지하철 운동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한겨레와 오마이뉴스가 보도로 협력했다. ‘광장조례개정 서울시민캠페인단(openseoul.org)’ 웹사이트를 만들어 시민이 직접 양식을 다운받아 서명할 수 있도록 했다. 곳곳에서 서명한 우편물이 도착했다. 그 봉투 속에는 언제나 격려 편지가 포함돼 있었다. 심지어 지폐를 넣어 보내 주기도 했다. 어느 회사원은 급히 출장을 가야 하니 서명 받은 봉투를 경복궁 옆 공중전화 박스 안의 전화번호부에 끼워 두겠다고 전화를 했다. 신미지는 마치 현금 봉투라도 되는 양 혹시라도 누가 집어갈까 바로 달려갔다. 자원활동가와 수임인들도 더 열심히 뛰었다. 화가 이용길은 6개월 동안 항상 서명 용지를 지참하고 다녔다. 3주 남짓 동안 지하철에서만 약 1만 2000명의 서명을 보탰다. 이미 8월에 시작한 야당의 협업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특히 민주당은 조직을 이용해 마지막까지 모두 3만 명 가까이 서명을 받아냈다. 뭔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광장을 막은 서울시는 광화문광장에 난데없이 스키 점프대를 설치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그 반작용으로 서명자가 조금 늘었다. 마감 1주일을 남겨 두고 6만을 넘어 7만 선에 도달했다. 12월 18일에 8만을 돌파했고, 마지막 날에는 “10만이다!” 생각하며 책상을 거두었다.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기적에 가까운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일이 끝나지 않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밤을 꼬박 새우며 1인당 1장으로 된 서명 용지 10만 장을 동별로 분류했다. 그래야 제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29일 서명인 10만 2741명의 명부를 제출했는데, 해를 넘겨 2010년 1월 25일 검토 결과 8만 5072명이 유효하다는 발표가 있었다. 명부를 제출하러 시청으로 가는 길에 민주당 의원들이 서로 앞줄에 서려고 잠시 다투었다.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인의 꼴불견이었지만, 그날만은 이전보다 더 밉게 보이지는 않았다. 

 

 

당연한 결정, 기묘한 교훈

 

작은 기적을 한순간에 무화시켜버리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역사의식보다 권력의지가 앞서는 다수당의 정치인이었다. 거의 한 해를 다 바친 땀과 정성의 기쁨은 잠시였다. 서울시의회 행정자치위원회는 주민발의안을 움켜쥐고 상정하지 않았고, 참여연대는 항의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치졸한 시의원의 행태를 들어 차기 선거 낙선운동도 병행했다. 6월 2일의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했다. 그들의 임기는 7월 1일부터 예정돼 있었고, 제7대 서울시의회는 당연한 잔무 처리라는 듯 6월 24일 조례개정안을 폐기했다.

 

참여사회 2013년 6월호 (통권 199호)

 

참여연대는 7월 14일 새로 구성된 서울시의회에 광장에 관한 두 개의 조례 개정안을 제출했고, 그 뒤의 일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민주당 소속 시의원 79명 전원이 발의했고, 모두 통과됐다. 그런데 시장이 두 개정안에 대한 재의를 요구했다. ‘광장운영시민위원회’ 안은 제외하고 ‘서울광장 사용에 관한 조례안’만 재의결했다. 그러자 이번엔 시장이 공포를 거부했다. 9월 27일 시의회 의장이 공포하여 서울광장 사용 허가제를 신고제로 바꾸는 투쟁은 종결되는 듯했으나, 시장은 개정 조례가 시장의 권한을 침범하여 무효라며 지방자치법에 따라 대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대개 그렇듯이 꼭 필요하고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발걸음이 느렸다. 광장의 주인 시민이 1년 넘게 싸워 사태를 거의 정리해 놓고 대법원의 최종 확인만 남은 상황에 처하자, 헌법재판소는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나서서 서울광장 사용을 불허하고 차량으로 벽을 쌓은 시장의 최첨단 시공을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그때가 2010년 9월 30일이었다.

 

주민발의는 기묘한 교훈을 남기기도 했다. 2011년 여름, 서울시장은 아동 무상급식을 포퓰리즘이라며 반대하고 나서 찬반을 주민투표에 붙였다. 거기에 자신의 정치 생명도 함께 걸었다. 8월 24일 투표에서 참패한 시장은 26일에 사퇴했다. 그 이름은 누구나 기억하는 오세훈이다. 보궐선거에서 새 시장이 된 박원순이 대법원에 계류 중이던 조례 무효 소송을 취하한 것은 2011년 12월 21일이었다. 그리하여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물리적 공간인 광장을 주인에게 돌려주기 위한 격동의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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