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7월 2013-07-05   1283

[역사] 안보에 갇힌 평화

안보에 갇힌 평화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참여사회 7월호

7월은 평화 기원의 달이다. 7·4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은 자주, 민족대단결과 함께 평화를 조국 통일의 원칙으로 천명했다. 7월 27일은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정전협정 체결일이다.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정전협정을 대신해 평화협정을 체결하고픈 희망은 언제 결실을 맺게 될까. 평화의 꿈을 가로막는 ‘우리 안의 파시즘’을 대표하는 개념이 바로 ‘안보’다. 이 두 글자만 들썩이면 평화의 훈풍은 기를 펴지 못하고 잦아들곤 한다. 평화와 안보의 기막힌 악연은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에 생겨났다.  

 

 

반전평화의 물결로 넘실대다

 

베트남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과 중국, 그리고 북한에서는 반전운동이 펼쳐졌다. 일본 반전운동의 주체는 시민사회였다. 미국의 베트남 군사 개입과 그에 대한 정부 지원에 반대한 일본 시민사회는 ‘베트남에 평화를! 시민연합(베헤이렌)’을 결성했다. 베헤이렌은 참가자의 자발성을 중시하는 평화운동을 펼쳤다. 일본의 반전평화운동에는 210만 명의 노동자가 파업으로 동참하기도 했다. 이는 세계 노동운동사에 길이 남는 반전 파업으로 그들이 국제 공동 행동을 제안한 10월 21일은 국제 반전의 날로 기념되고 있다. 일본에서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평화운동과 함께 전개된 시민운동이 바로 안보 투쟁이었다. 이는 안보를 내세우며 미국과 일본의 상호방위조약을 개정한 정부에 반대하여 일어난 평화운동이었다.

 

일본의 반전운동은 당시 미수교 국가였던 중국의 청년·학생과의 국제연대로 확대되었다. 일본 대표 100여 명이 상하이에서 10만 명의 중국 청년·학생과 반전 시위를 전개했다. 일본인이 원자폭탄으로 막을 내린 전쟁의 트라우마를 상기하며 반전운동을 했다면, 중국인은 베트남전쟁이 한국전쟁처럼 중국과 미국 간의 전쟁으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다. 평양에서도 15만 명이 참가해 베트남전쟁에 반대하고 베트남인의 투쟁을 지지하는 대규모 군중대회가 열렸다.

 

이렇게 미국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반전평화의 연대가 물결 칠 때, 한반도의 남단은 조용했다. 반공주의의 위력이었다. 베트남전쟁은 공산 세력에 대항해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미국의 편에 서서 베트남 파병을 결정할 때도 반대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안보의 광풍이 몰아치다

 

베트남전쟁도 이에 반대하는 평화운동도 최고조에 달한 1968년, 한반도에는 안보의 광풍이 몰아쳤다. 해방 이래 언론에 오르내린 ‘안보’라는 말은 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약칭으로 사용되었고, 때론 냉전 시대 집단안보체제를 언급할 때 등장했던 국제 정치 용어였다. 안보가 국내 정치 용어로 둔갑한 것은 4·19혁명 직후 장면 정부가 국내 치안을 빌미로 국가안전보장회의를 열면서부터였다. 국가안보회의는 박정희 정부에 들어와서 상설화되었다. 대간첩작전의 강화,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대비한 계엄령 실시 검토는 물론 베트남 파병도 국가안보회의의 주요 의제였다.

 

1968년 벽초부터 북한의 무장게릴라가 청와대를 습격하려다 검거된 1·21사태와 원산항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의 해군초계정에 의해 납치된 사건 등이 발생하자, 안보의 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국가안보회의는 예비군 창설을 의결했고, 대통령은 안보담당특별보좌관을 임명했다. 국회는 무장침투의 재발 방지와 응징을 촉구하는 안보결의안을 채택했다. 야당은 의용군을 편성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가운데 안보는 북한 침략을 분쇄한다는 의미의 반공적·반북적 개념으로 거듭났다. 그렇게 1960년대를 거치면서 평화를 갈구하는 동아시아의 한켠에서 한국은 안보의 옹벽을 쌓았다. 그리고 1970년대 안보에는 새로운 의미가 덧붙여졌다. 민주화와 인권을 탄압하는 명분으로서의 정권 안보가 그것이다.       

 

이제야 피어난 평화라는 이름의 꽃

 

7·4남북공동성명에서 남북 당국자는 평화를 내세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일찍이 조봉암이 평화통일을 외치다 간첩으로 몰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듯이, 7·4남북공동성명 이후에도 평화주의와 평화운동은 안보의 벽을 넘지 못한 채 번번이 좌절해야 했다.

 

평화라는 이름의 꽃은 여성·종교·인권단체를 중심으로 한 평화군축운동, 민간인 학살· 고엽제 등 전쟁 피해자 지원운동, 베트남전쟁 사죄 및 화해운동 등이 전개된 1990년대에 와서야 피어나기 시작했다. 반전평화를 외치는 광범한 대중시위는 9·11테러 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한국 정부의 전쟁 지원에 반대하면서 본격화되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2003년 2월 15일, 세계 100여 개국 600여 도시에서 진행한 ‘국제 반전의 날’ 행사에 서울을 포함한 전국 6개 도시에서 많은 시민들이 동참하여 미국의 무모한 전쟁에 반대하고 한국군의 파병을 우려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21세기에 들어와서야 한국의 시민사회도 세계 반전평화운동의 대오에 합류한 것이다. 그럼에도 한반도 문제를 놓고는 평화국가 혹은 평화체제를 표방하는 평화 담론이 점차 부상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안보 담론에 열세다. 언젠가 평화가 안보를 넘어설 날이 올까?    

 

 

김정인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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