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9월 2013-09-06   2161

[참여연대사] 은유의 전사들 지리산 방황기 – 2000년 여름 고난의 행군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13

 

은유의 전사들 지리산 방황기
2000년 여름 고난의 행군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2000년 여름, 전체 상근자가 지리산으로 떠났던 ‘고난의 행군’ 이야기를 전합니다. 

 

 

참여사회 9월호

2000년 6월,
그해 봄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총선연대 운동이 끝나고 절반 넘게 파견됐던 
간사들이 복귀했지만 참여연대 사무실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전리품처럼 마음속에 품은 쾌감과 자부심에는 아쉬움과 공허함이 얼룩져 있었다. 
박원순 당시 사무처장은 간사들의 신체와 정신의 균형을 위해 
지리산 ‘고난의 행군’을 결심한다.

 

선의의 아침이 우리를 밤의 혼란에서 건져내어 눈꺼풀을 밀어 올리면, 벌떡 일어날 것인가 조금 더 누워 뒤척일 것인가 고민에 빠진다. 그 순간의 고뇌와 기민하지 못한 몸뚱어리의 자세는 게으름이 아니라 균형을 위한 몸과 마음의 협력 작용을 표상한다. 균형은 안정적이고 밋밋하기 그지없지만, 그 정태적 고요함 속에 폭발의 힘을 가두고 있다. 모든 힘은 균형을 깨뜨리며 터져 나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참여연대의 이름으로 발산되는 힘과 그 이면에 깔린 균형은 어떻게 조절될까?

 

2000년 6월 15일, 밤 10시를 조금 넘긴 시간, 버스 한 대가 인사동을 출발했다. 30여 명의 참여연대 상근자와 몇 명의 자원봉사자를 태우고 남쪽으로 달렸다. 대절한 관광버스가 움직인다고 야유회가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행선지가 지리산이라고 등산 대회라 단정할 수도 없었다. 지금 찾아보면 기록에는 거창하게 ‘고난의 행군’이라 표기돼 있다. 어감이 지시하는 대로 종교단체의 행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버스에는 무언가 목적이 적재돼 있었을 것이다. 버스 자체는 결코 알 수 없는, 인간이 버스에 붙여 놓은 목적 같은 것이라도 말이다.

 

참여사회 9월호
2000년 6월 15일, 지리산 종주 중인 참여연대 간사들과 필자

 

좌우 두 칸 씩 열두 줄로 배열된 의자에 파묻힌 면면은 지은, 광복, 송희, 강준, 은아 등 자못 중립적 표정을 지닌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초여름 나들이에 임의로 선정된 단순한 갑남을녀는 아니었다. 그들의 개체는 서로 얽혀 참여연대라는 단일공동체의 형체로 나타났다. 그런가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은 다시 사법, 행정, 경제, 정의, 투명사회 민주주의 따위로 분화됐다. 그들은 세상의 변화에 요구되는 덕목을 자신의 이름으로 대신하는 은유의 승객들이었다. 그런데 버스에 실린 하중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사회를 향한 자발적 가면 안쪽의 페르소나는 다른 고민을 잔뜩 안고 있었다. 불투명한 미래, 얄팍한 지갑, 부족해 보이는 능력, 취미생활의 욕망과 불만족스러운 건강 그리고 사랑 또는 배신. 조금씩 기우뚱거리며 달리는 모양으로 미루어, 그날의 버스야말로 균형이 필요한 듯했다.

 

그해 초부터 봄을 지나는 몇 개월 동안 전국을 들썩이게 하고 세계 시민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킨 총선연대 운동이 막을 내리고, 절반 넘게 파견됐던 간사들이 복귀한 참여연대 사무실의 분위기는 여전히 조금씩 겉돌고 있었다. 전리품처럼 마음속에 품은 쾌감과 자부심에는 아쉬움과 공허함 따위가 얼룩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그런 부조화는 박원순의 눈에 금방 띄게 마련이었다. 총선연대 이후의 정치적 요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며, 참여연대 고유의 업무는 언제 재정비할 것인가. 이미 아름다운재단의 설립 구상까지 겹쳐 있던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고 초조했다. 정신재무장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조급함도 있었다.

 

초보자를 위한 1박 3일의 종주일정

 

산행에 능숙한 박원순이 노고단 가까이에서 뒤돌아보니 성삼재 주차장에서 시작한 행군의 무리는 생쥐가 쏠아 놓은 노끈처럼 점점이 이어졌다. 점 하나하나가 그의 관심의 대상인 참여연대 정신의 주체들이었다. 자신에게 손오공의 능력만 있어도 한꺼번에 입김을 불어 넣어 일사불란한 개혁의 전사로 만들고 싶은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활동가들이 까치발로 뻗은 손길보다 더 높은 선반 위에 있었다. 발돋움하는 그들의 땀과 호흡을 빼앗아 그 빈자리에 신뢰할 만한 땅의 정기라도 채워주었으면 하는 염원을 의탁하기 위해 지리산을 찾았던 것이다.

 

발바닥 두 개로 1,915미터의 두께를 떠받쳐 오르는 이들은 아무도 자신의 정신세계를 타인이 나서서 간섭할 수 있으리라 믿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어리고, 꿈에 비해 능력이 모자라고, 비정상적으로 쌓인 일 곁에서 휴식은 부족하고, 따라서 열심히 해도 잦은 실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정해진 기준의 틀을 통해 볼 때 비친 모습이 그럴 뿐, 다면성과 복잡성을 지닌 인간 활동가들이었다. 짧은 경험에 긴 고민이 호응하여 나름대로 전문성을 익혀 가고 있었다. 가끔 차분한 이성보다 격정의 감정을 앞세우긴 하지만 책임이 무엇인지 잘 인식하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작은 기여가 동료의 그것과 합치면 권력을 꾸짖을 수 있는 힘이 된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그 성과는 시민사회 영웅의 몫으로 돌려도 결코 아쉬워하지 않는 겸손도 갖추었다.

 

하지만 산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부분은 가야 한다고 하니 버스를 탔을 뿐이었다. 태어나서 등산은 처음이라는 사람도 많았다. 대학 시절 500명의 공학도 중 그야말로 홍일점이었던 최현주는 소풍이라고 남학생들을 따라나섰다가 북한산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입구에서 돌아온 일이 유일한 산과의 조우였다. 지리산을 간다는 바람에 남대문으로 가서 단체 할인으로 구입한 파이프텐 릿지화를 생애 최초의 등산화로 소유하게 된 사람이 열 명이나 됐다. 지리산 종주가 무엇이며 얼마나 높이 또 멀리 걸어야 하는지 관심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산을 걷는 대열은 지리멸렬했다. 걸음은 느렸고, 휴식은 길었다. 벽소령에서는 이재명과 이샛별이 주저앉았다. 

 

예정 시간보다 이미 두세 시간 늦었지만 숙소로 정한 세석산장을 향해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걸으면 해질 무렵엔 도착해 저녁을 먹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막연한 기대였다. 그 뒤의 상황은 어떻게 전개 될지 아무도 몰랐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감지하지 못했다.

 

참여사회 9월호
2005년 7월 ‘차며연대’와 경실련, 흥사단 축구경기 후 찍은 단체사진

 

산에 대한 순수한 감정이 워낙 강렬했든지 아니면 혼자 잘난 척하는 태도가 너무 심했든지 둘 중의 한쪽임이 분명한 이탈리아의 발터 보나티는 미지에 대한 불가능의 감정만이 진정한 알피니즘이라 주장했다. 그러한 신비로움 없이 계획과 규칙에 따라 진행되는 육체의 움직임이라면 등반이 아니라 운동경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참여연대의 그날 밤의 행렬은 알피니즘의 극치였다. 벽소령에서 세석평전까지의 트레킹은 마치 헤드라이트가 깨져버린 차로 터널을 지나는 모험이나 마찬가지였다. 

 

예측 가능하고 규칙에 따른 운동이라면 참여연대도 해 보았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신생 철학과를 한림대 챔피언으로 등극시킨 경험을 가진 홍석인이 주도해 축구단을 만들었는데, 훗날 그 팀은 ‘차며연대’라 불렸다. 자신의 희망에 따라 적절히 포지션을 정했고, 간혹 조희연, 진영종이 값싼 용병으로 가세했다. 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2001년 오마이컵 시민사회단체 축구대회에 나가 1회전에서 함께하는 시민행동에 4:0으로 패퇴했다. 수요일 오후의  성공회대 교수팀, 그 다음 주의 풍문여고 교사팀에 수시로 승리를 양보했다. 회원 대동제에서 회원팀과 무승부를 기록한 것이 그나마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다. 

 

참여사회 9월호 참여사회 9월호
2001년 7월 1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영화배우팀과의 축구경기에서
‘차며연대’는 7대 1로 대패했다.

 

참여연대 간사들에게 보나티 같은 도전정신이 깃들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축구 경기의 결과가 그랬듯이 지리산과의 호흡도 모조리 필연이 강한 우연이었다. 단지 믿음으로 삼았던 것은 사무국장 김성희가 짠 일정표에 쓰여진 “초보자들을 기준으로 넉넉하게 잡은 진행안입니다”라는 한 줄이었다. 

 

혼비백산 야간산행으로 정상에 오르다 

 

일정표에 보면 벽소령에서 세석산장까지 세 시간이 소요된다고 했다. 그러나 세 시간이 지나도 절반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 사이에 해는 졌고, 랜턴은 거의 없었다. 야간산행은 애당초 계획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저마다 가쁘게 들이마신 산소를 심장이 뿜어낸 혈액에 실어 다리의 근육으로 열심히 날랐지만, 러닝머신 위를 달리듯 물리적 거리는 쉽사리 단축되지 않았다. 그나마 칠흙같은 어둠에 휩싸이자 위기감마저 감돌았다. 대여섯 명씩 조를 나누었고, 앞장선 사람은 기다시피 팔을 내저으며 선캄브리아기에 바다였던 흔적을 더듬었다. 배는 고팠고, 체력은 고갈됐다. 만약 여름의 지리산에 흔한 남동계절풍이 사면에 부딪쳐 상승하며 비라도 퍼부었다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뻔했다. 누군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고통에서 비롯하는 것일 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 본인의 증언에 의하면 두려움 탓이었다. 걷는데 도깨비가 자꾸 나타났다는 고백이었다.

 

반쯤은 산사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김성희는 지칠 대로 지쳐 초췌한 몰골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야간산행의 위험 때문에 앞뒤로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벽소령에서 두어 시간 지체됐다 하더라도, 그가 짠 시간표에 따르면 늦어도 밤 9시 이전에는 세석에 도착해 밤참 같은 저녁을 끓이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산장은커녕 손만 내밀어도 닿는 나무조차 보이지 않았고, 더듬거리는 걸음은 점점 느려졌다. 달팽이도 부지런하기만 하다면 그보다 빠를 것 같았다. 선두 조가 세석산장에 도착한 것은 자정 무렵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조를 맞으러 먹을 것을 손에 든 안진걸이 맨발로 달려 나간 때는 밤 1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모두 소리 없이 쓰러졌다.

 

폭동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는 아침 햇살에 씻겨 갔다. 천왕봉을 향해 다시 걷기 시작했지만,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정상까지 예정된 세 시간은 또 몇 배로 늘어날지 모르는 일이었다. 끌다시피 하던 발걸음이라 부상자도 생겼다. 무릎을 다친 이승희와 김민영, 발목을 삔 인턴 한 명은 장터목에서 바로 하산하기로 했다. 이태호가 따라갔는데, 그는  중산리를 내려가는 내내 부상자를 부축해주었다. 그 헌신적 태도가 이승희의 심장에 새겨졌다. 

 

천왕봉에 이르자 일순 웃음을 되찾으며 술렁였다. 탁현민은 히말라야 등정에 따라간 다큐멘터리 작가처럼 뛰어다녔는데, 그의 손에는 참여연대로서는 거금을 들여 처음 장만한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김박태식은 정복하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라며 정상을 4~5미터쯤 남겨 둔 아래쪽을 돌아 내려오는 유머를 과시했다. 최현주는 다시는 산에 오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나중에 남자를 만나면 한 번만 더 등산을 해야겠다고 즉시 번복했다. 인간성을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다고 나름대로 최초의 산행 경험을 실용적 교훈으로 풀어냈다. 그리고 훗날 결혼한 최현주는 지리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내리막이라고 저절로 내려오는 것은 아니었다. 느린 속도는 차며연대 축구단의 승률처럼 일관되게 유지했다. 정말 천 리를 걷듯 걷고 또 걸어 진주에 도착했다. 저녁을 대접하겠노라고 기다리던 변호사 강대승과 경상대학의 정진상은 시내 천황식당에서 담배만 피워 물고 세 시간 가까이 기다렸다. 가까스로 식당 문을 닫기 전에 들어서서 석쇠에 바싹 구운 불고기와 숙주나물이 매끄러운 진주비빔밥으로 주린 배를 채웠다. 놋그릇의 비워낸 부피 만큼 무거워진 승객을 실은 버스가 자정을 넘어 고속도로를 관통함으로써, 1박 3일의 대장정은 종결됐다.

 

그날 고난의 행군이 남긴 것

 

차며연대가 특별히 기억하는 시합의 상대는 영화배우팀이었다. 2001년 7월 19일, 동대문운동장에서 격돌한 결과 7:1로 크게 졌지만 뿌듯함은 있었다. 공격 전면에 나선 안성기, 박중훈, 최종원 같은 스타들과 맞붙어서가 아니라, 동대문 축구장에서 뛰었다는 역사적 의미 때문이었다. 1925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경기장으로 준공된 축구장은 철거를 위해 폐쇄하기 직전이었는데, 신문선의 주선으로 승률 꼴찌의 축구선수들이 그 잔디를 밟아본 것이다.

 

전체 간사 대부분이 참여한 그해 6월의 지리산 종주에서 기대했던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일까? 개인의 능력이나 취향에 관계없이 고통을 수반한 단체행동을 통해 개별적 신체감각의 집단화를 꾀한 것일까? 그 공통의 감각은 참여연대라는 이름 아래 정신의 유대를 공고히 하였을까?

 

이성과 감성의 균형은 조절했을까? 그런 단체주의적 기획을 선뜻 받아들이기에는 개개 구성원의 자유주의적 개성이 너무 뚜렷했다. 따라서 등산은 어수선하게 마무리됐지만, 무모한 일정 속에 의미는 남겼다. 밤길을 헤맨 어리석음이 미답의 암벽에서 논리적 선을 찾아내는 순결주의 알피니스트의 지적 모험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기어이 해내고 마는 참여연대의 정신 같은 것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산은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경험은 각자의 것이다. 지금까지도 가끔 기억을 떠올리곤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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