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1월 2013-10-31   1972

[놀자] 오늘 하루 시내버스로 여행하자

오늘 하루 시내버스로 여행하자

이명석 저술업자

십 년 전, 내가 혜화동에서 살 때다. 어느 날 친구들과 심심풀이로 동대문 운동장에 고교 야구를 보러 가기로 했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져 버스 정류장이 있는 올림픽 생활관 앞으로 걸어가는데, 배낭을 든 외국인이 지도를 보며 두리번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어라, 이 동네는 관광객이 올만한 곳이 전혀 아닌데? 혹시 게스트하우스라도 찾고 있는 걸까? 나는 백인 청년에게 어디를 찾고 있냐고 물었다. 청년은 꼬깃꼬깃 구겨진 지도를 꺼내 보여주며 더듬더듬 알아들을 수 없는 지명을 말했다. 청년이 지도에 펜으로 그어놓은 선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비원에서 출발해 창경궁을 지나 대학로를 거쳐… 동대문! 거참 재수 좋은 친구군. 

시내버스로 서울 여행

나는 그렇게 폴란드에서 온 배낭여행객과 함께 301번 버스를 탔다. 창밖의 왁자지껄한 서울 풍경을 내다보며 신기해하는 친구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 버스의 노선이 참 멋지네. 그냥 이걸 하루 동안 타고 다니면 서울 구경을 제대로 하겠는걸? 출발지인 혜화동에서 서울 산성과 골목길을 둘러볼 수 있지. 대학로에 가서는 공연을 보고 동대문에서 쇼핑을 할 수 있잖아. 남산의 녹지에서 잠시 쉰 뒤에 압구정, 청담동으로 가면 서울에서 제일 화려한 가게들을 만날 수 있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코엑스에서 저녁을 먹고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감하는 거야. 아예 거기서 공항버스를 타고 집으로 날아가도 좋겠네.  

이후에 두어 번 이사를 하면서 내가 즐겨 타는 시내버스도 바뀌게 되었다. 나의 서울 투어에 또 다른 노선들이 생겨난 거다. 요즘 내가 살고 있는 동네를 지나는 버스 중에는 1020번이 좋다. 정릉의 북악산 숲길에서 시작해 국민대학교 캠퍼스 앞을 지난 뒤에 세검정의 아담한 물길을 돌아간다. 부암동 언덕을 낑낑대며 올라가면 좋은 카페들을 만날 수 있고, 다시 터널 아래로 내려오면 통인시장과 수성동 계곡이 있는 서촌이 나온다. 이어 경복궁을 끼고 돌아서는 조계사와 인사동을 훑은 뒤에 광화문에서 회차한다. 역시나 이만큼 멋진 관광 코스가 있을까 싶다. 

여행 코스 짜 주는 <생각버스>

이런 생각을 나만 한 건 아니었다. 최근 <생각버스>라는 무가지를 보게 되었는데, 시내버스 노선을 중심으로 서울의 여러 동네를 소개하면서 작은 여행을 할 수 있게 도와준다. 창간호에 나온 472번 버스는 승객의 평균 연령이 가장 낮은, 청춘 버스라고 한다. 개포동에서 출발해 압구정-신사동-명동-시청-이화여대-연세대를 지나는데, 대학생들이나 젊은 층이 즐겨 찾는 곳들을 구슬처럼 꿰어놓은 노선이다. 번호는 바뀌었지만 오래전부터 이 길을 달렸던 버스 노선의 역사도 흥미롭다. 옛날 12번 좌석버스일 때는 운행요금이 비싸 ‘노블리안 리무진’, 패셔너블한 젊은이들이 많이 탄다고 ‘오렌지 버스’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선 자체도 패션 쇼핑가를 많이 지나고 이화여대까지 노선에 들어 있기 때문인지 여성 승객이 많아 ‘여탕 버스’, ‘꽃마차’로 불린다고. 내가 홍대 산울림극장 쪽을 갈 때 시청에서 환승해서 가는 7011번도 제법 매력적인 노선을 돌고 있다. <생각버스>는 이색적인 간판 여행 코스로 이 버스를 소개한다. 을지로의 자재와 인쇄 골목, 충무로의 애견거리, 염천교 구두거리, 아현역 가구거리, 웨딩타운, 홍대 미술학원 거리를 지나 요즘 새로운 가게들이 많이 들어서는 망원동에 이른다.

자, 이제 나가보자

이렇듯 누구든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부터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을 도는 여행 코스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난점이 있다. 같은 번호의 버스는 환승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시에 건의해서 하루 동안 한 노선을 계속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반대의 접근도 가능하다. 다른 번호의 시내버스를 계속 갈아타는 것이다. 요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통해 버스의 노선과 실시간 도착 시각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것들을 활용해 서울의 재미난 곳을 환승하며 돌아다니는 거다. 

서울도 돌 만큼 돌았다고? 그렇다면 더욱 큰 프로젝트에 도전하자. 어떤 버스 마니아들은 시내버스만 타고 전국을 일주한다. 서울에서도 가까운 경기도 지역까지 연결되는 시내버스들이 있는데, 이런 걸 차례로 연결하면 부산까지 사흘 안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면 강원도 속초에서 일출을 보고, 해남 땅끝에서 해지는 걸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내버스, 이거 참 괜찮은 놀이 도구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화, 여행, 커피, 지도 등 호기심이 닿는 갖가지 것들을 즐기고 탐구하며, 그 놀이의 과정을 글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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