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4월 2014-04-07   2020

[참여연대사] 공간에 쓴 참여 민주주의 – 2007 참여연대 건물 신축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20

 

공간에 쓴 참여 민주주의

2007 참여연대 건물 신축

 

 

참여사회 2014-04월호
1994년 용산, 1998년 안국동을 거쳐 참여연대는 2007년 8월 10일, 통인동에 자리잡았다. ‘운동하는 사람의 내집 마련’에 대한 찬반론을 지나, 재정적 결핍을 거쳐 안정적인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은 상근자와 임원이 발휘한 끈질긴 추진력의 결과였겠지만, 그 힘의 근원은 당연히 회원들의 지지였다. 사진은 2007년 9월 8일 통인동 참여연대 창립기념식과 집들이를 겸한 회원대동제 날 풍선으로 입구를 장식한 참여연대.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2012년 9월부터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그 마지막 이야기로 참여연대의 통인동 건물 신축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봅니다.

 

카를로스 마리아 도밍게스는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고,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 살면서 『종이로 만든 집』이란 짧은 소설을 썼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 카를로스 브라우어는 세상의 질서와 자신의 지식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탐욕스럽게 책을 모으고 있었다. 어휘와 문장이 제시하는 길을 독창적으로 정리하려다 실패하고, 마침내 황량한 바닷가에 종이집을 지었다. 자신의 장서를 벽돌로 삼아 시멘트 모르타르와 회반죽으로 세운 집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기만의 통로였다.

 

우리의 집을, 그것도 서울의 도심에 짓는 데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혜를 담은 책이나 바람을 버텨 내는 벽돌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은 단체의 물리적 존속 조건이며, 건물은 사회 변화를 목표로 한 시민운동의 터미널이었다.

 

7년 만에 추진된 ‘내집 마련의 꿈’

 

물론 참여연대가 길모퉁이나 광장 한 구석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것은 아니다. 셋방살이였지만 사무기기를 설치하고 간판을 걸 수 있는 방이 있었고, 간혹 아슬아슬하긴 했으나 임차료를 체불하지도 않았다. 아쉬운 것은 많았지만, 순간의 결핍을 투지의 연료로 활용할 정도로 열정과 낭만이 있었다. 용산역 앞의 낡은 건물 2층에는 음식점이 있었고, 거기서 배를 채운 쥐들은 가끔 4층 사무실을 기웃거리며 세상을 엿보았다. 대낮 회의장에 나타난 놈을 이샛별이 발길질로 쫓아내면, 밤중에 다시 나타나 야전침대에서 자고 있던 박원석을 굴러 떨어지게 하였다.

 

1998년 5월 안국동의 안국빌딩 신관으로 이사를 하였을 때, 쥐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서생원들의 활동 범위를 4층까지 확장해 준 2층의 하부구조를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테다. 참여연대도 팽창하는 힘을 안정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사령부 같은 보금자리가 필요했다. 에너지를 한껏 발산한 총선연대 운동을 마무리하고, 2001년 초부터 박원순은 건물을 마련해야겠다는 포부를 구체적 계획으로 드러냈다. 그 희망은 반대론자에게는 무모하고 다소 허황돼 보였다. 참여연대가 정치적 영향력을 한껏 발휘하면서 빌딩 주인까지 되려 하는 것이냐는 자조적 내부 비판도 있었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얻어 내고야 마는 박원순의 비상한 실행력에 은근한 기대를 거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헌법재판소 앞의 건물을 알아보고, 걸스카우트회관 뒤쪽에도 달려가 보았다. 하지만 항상 의지만으로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건물은 너무 비쌌고, 가능성이 흐려질수록 내부의 반대론은 거세졌다. 그러다 건물 소유 계획은 박원순이 떠나면서 함께 사라졌다. 잠시 접었던 그 꿈은 박영선과 공동사무처장으로 임명된 김기식에 의해 되살아났다.

 

안국동의 빌딩만 하더라도 참여연대로서는 행운이었다. 입주 당시 월 임차료는 600만 원이었는데, 2억 5,000만 원의 보증금을 감안하더라도 주변 다른 건물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그것조차 10년 가까이 단 한 차례도 인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주인의 파격적 호의는 더 기대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다. 철거 뒤 신축 또는 리모델링의 청사진 앞에서 참여연대의 사정만 내세우는 것은 몰염치였다. 비슷한 규모의 사무실을 구하려면 매월 2,500만 원 정도를 지출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동안 주인의 특별한 배려가 오히려 원망스러울 정도로 난감하였다. 그때 김기식은 위기에 처할지도 모르는 재정 문제를 타개하는 방안으로 건물을 소유할 계획을 세웠다. 중장기적으로 가장 비용을 절감하는 방법은 당장 가장 큰돈이 들어가는 내집 마련이라는, 일종의 역발상이었다.

 

도대체 건물을 지어 소유하는 데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지 추산조차 쉽지 않았다. 우선 가진 돈이 얼마나 되는가 살펴보았다. 그래도 지난 10년 동안 씨앗기금이란 이름으로 후원금을 아껴 모은 돈이 6억 원에 육박했다. 상근자 재충전기금 1억 원과 각 부서에서 보유하던 예금, 임차보증금 등을 합하니 12억 원 정도 되었다. 그것으로 한 뼘의 땅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까, 낡은 기와집이라도 한 채 확보할 수 있을까?

 

보금자리 마련 행진의 시작

 

일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전에 확실히 해 두어야 할 것은 ‘내집 마련’ 기획의 동의를 얻는 일이었다. 다시 찬반론이 함께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몇 년 전에 한 차례 논란이 있어 그랬던지 출발점에서부터 찬성 쪽이 많았다. 이사와 임차료의 부담은 한 번 떠올릴 때마다 몇 사람씩 마음을 바꿔 놓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반대하는 사람은 단 두 명이었다. 임차료 부담이 줄어들면 건축비의 압박과 후유증이 계속 남을 것이고, 모금하고 집 짓는데 쏟아부을 힘으로 본연의 일에 열중해야 옳지 않은가? 두 명 중의 한 사람은 장하성이었다. “우리는 좀 가벼워질 필요가 있습니다. 운동하는 사람은 가벼워야 합니다. 참여연대 활동을 영원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일이 끝났을 때, 우리는 빈손으로 홀연히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참여연대가 등기부상 부동산 소유자가 된다는 사실은 무거운 현실이었다. 결정에 들인 시간은 그다지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그 하중이 어느 정도인지 어깨에 짊어지고 걸어보기로 했다. 행진의 작전명은 보금자리 마련 사업이라고도 했고, 베이스캠프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땅한 건물이 눈에 띄면 매입하고, 그렇지 않으면 부지를 마련해 신축을 하기로 했다. 김기식은 시행 사업을 하는 선배의 도움을 받아 여러 곳을 뛰어다녔다. 부암동의 석파정은 정말 탐나는 장소였다. 1만 2,000평 중에서 녹지를 제외한 2,000평에 건축이 가능했지만,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꿈의 정원이었다. 환경운동연합에 공동 매입 의사를 타진하였는데, 단호하게 거절당했다. 호사스러운 환상에서 벗어나 분수에 맞는 땅을 찾는다면 분당 바깥이나 일산의 북쪽까지 염두에 두라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김기식은 온갖 접근성을 고려하면 반드시 4대문 안쪽이거나 마포 정도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2006년 12월 4일 참여연대 통인동 새보금자리 착공식 및 안전기원제 현장.

 

윤재식과 진영종은 김민영을 데리고 명당을 찾아 헤맸다. 홍대 부근의 몇 건물 안을 들여다보고, 성대 후문에서도 서성거렸다. 서대문에서 상속받은 집을 내놓은 모녀를 만났는데, 물건은 참하였으나 아무래도 돈이 모자랐다. 윤재식은 참여연대가 무엇을 하는 단체이며, 왜 건물을 구하러 다니며, 준비한 돈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늘어놓으며 선처를 기다렸다. 그러자 모녀는 충고하듯 한마디를 남겼다. “모금을 더 해서 오시지요.

 

김기식은 만리재의 한겨레 사옥 건너편 집이 마음에 들었고, 윤재식은 통인동의 낡은 한옥을 선호했다. 결국 후자로 낙찰되었다. 주변의 부동산중개사무소 세 곳이 경합하여 흥정한 끝에 매매 대금은 25억 원으로 합의되었다. 윤재식과 김민영은 한정식 요릿집이었던 그 집 안방에 주인 아주머니와 마주보고 앉았다. 그 자리에서 주인은 은행 대출금이 8억 원이라고 밝혔는데, 조기 상환할 경우 이자 부담이 늘어나는 금융상품이었다. 김민영은 이해를 한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윤재식이 손을 저으며 나섰다. “우리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이자 부담이 생긴 것이니, 5,000만 깎아 주세요.” 당황스런 주인은 이렇게 응수하였다. “1,000만 원만 더 얹어 주시죠.” 그리하여 계약서에 기재된 매매대금은 24억 6,000만 원이 됐다.

 

안팎에서 물심양면 힘을 보태어

 

건축비는 대략 11억 정도로 예상했다. 여러 업체에 문의하고 비교한 결과 김기식의 선배 장용성의 적극적 도움으로 이루어낸 최소 공사비였다. 그나마 건설 현장에 관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경험이 많은 윤재식이 나서 계약서에 깨알 같은 글씨로 쓴 두 장의 특약 조항을 첨부하였다. 공사금액 변경을 절대 금지하고, 민원 등의 모든 책임은 시공자가 부담한다는, 언뜻 보기에 불공정할 정도의 일방적 부담을 안기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바닥 마감 편차는 0.5mm, 천장과 벽이 만나는 지점의 편차는 0.2mm 이하여야 한다는 치밀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것을 받아 읽고 난 상리건설 대표는 한참 생각한 끝에 아무 말 없이 날인했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참여사회 2014-04월호

2007년 8월 9일 통인동 보금자리에 입주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모습.왼쪽 사진은 고사 상을 차리고 있는 박근용. 박근용은 참여연대 측의 건설 현장 담당을 맡았다. 오른쪽 사진은 축문을 태우고 있는 당시 사무처장 김민영.

 

하지만 만사는 예측 가능한 필연에 우연이 겹쳐 일어나는 법이다. 용적률 제한 때문에 원하는 만큼의 공간 확보가 어려웠다. 지하를 2층까지 시공하면 늘어나는 건축비는 상상을 초월했다. 지하를 1층으로만 하자니 주차장을 지상으로 뺄 수밖에 없었다. 지상은 4층까지만 올리면 엘리베이터 설치 의무가 면제돼 공사비를 줄일 수 있었지만, 층수에 관계없이 참여연대 건물이 장애인의 출입에 불편을 준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더 높게 짓고 싶어도 고도제한 규정이 가로막았다. 그 절충과 한계의 결과가 5층이었다. 한옥을 허물고 토목공사를 시작하자 물길이 치솟았다. 지하에는 작은 연못 하나에 우물까지 숨어 있었다. 더 깊이 팔 수밖에 없었고, 추가 공사비는 윤재식의 특약조항을 슬쩍 무시했다. 참여연대에서는 박근용을 현장 담당자로 보냈다. 톰 소여처럼 영리한 박근용이었지만 심성은 몽실언니보다 더 고왔기에, 건설 현장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적당히 친절한 인부들이 “문짝은 이것으로?”, “타일 색깔은?”이라고 할 때마다 그는 결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먼지 같은 세상사도 겪다 보면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구체화되기도 했다. 전문가나 문외한이나 나름대로 서로 노력했고, 통인동 132번지에 선 건물 한 동은 최선의 결과라고 단언해도 뚜렷한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2007년 8월 8일 안국동 참여연대에서 이삿짐을 싸고 있는 간사들. 이사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전체 간사들은 일주일 전부터 매일 짐만 꾸렸다. 

 

절약은 공사장 바깥의 건축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사 비용도 최소화하려니 간사들의 육체적 고통을 대가로 치러야 했다. 이틀에 걸쳐 트럭으로 날라야 한다는 이삿짐센터의 견적을 하루로 줄이기 위해 전체 간사는 일주일 전부터 매일 짐만 꾸렸다. 2007년 8월 10일로 잡은 이사를 하루 앞두고, 고사를 지내고 주민들에게 떡을 돌렸다. 참여연대 입주를 반기는 이웃도 있었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폭력도 불사했다. 착공 때부터 민원을 제기하던 뒷집 중년 신사는 이삿떡을 담벼락 너머로 집어던졌다. 참여연대의 목표는 건물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것을 경고라도 하듯이.

 

도심 귀퉁이에 쌓아올린 시민의 힘

 

불과 몇 개월 만에 불가능해 보이던 희망이 또 현실이 되었다. 상근자와 임원이 발휘한 끈질긴 추진력의 결과였겠지만, 그 힘의 근원은 당연히 회원들의 지지였다. ‘회비 한 번 더 내기’, ‘회비 증액’, ‘백년지기 회원 모집’ 등의 운동에 일일이 응하여 앞장선 그들의 얼굴과 이름은 건물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인간은 필요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든다. 집은 개인의 요구에 따라 마련하는 것이고, 길은 집단의 요구에 따라 내는 것이다. 집은 길을 따라 짓고, 길은 집을 이어가며 닦는다. 참여연대 건물은 참여연대 가족의 뜻에 의해 세웠지만, 그곳을 교차하는 길은 다른 사람들과 사회를 향하고 있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2011년 5월 26일 백년지기 감사의밤 행사에서 공개한 백년지기 현판. 참여연대 보금자리 마련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참여연대는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한 다양한 모금 활동 중의 하나로 ‘백년지기 회원’을 모집했다. 이들의 회비 약정액 납부가대부분 마감되는 시점인 2011년 5월엔 이들에게 감사를 표하는 행사를 열었다. 

 

7년이 지난 참여연대 건물은 지금도 특유의 멋을 그대로 지녔다. 정면 상부는 밝은 갈색을 바탕으로 거의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어, 그 자체가 추가 비용을 제로화한 돌출형 파사드를 형성하고 있다. 젊은 건축가 김경일이 길 위에서도 참여연대의 내부가 들여다보이도록 설계한 결과였다. 투명성과 친밀성을 동시에 상징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지금 참여연대의 창과 벽은 햇빛도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불투명하다. 블라인드와 커튼이 완고하게 가리고 있고, 그 구겨진 이면에서 비품만 어슴프레한 실루엣을 던지고 있을 뿐이다.

 

도밍게스의 소설이 우리나라에서 번역되면서 단 제목은 『위험한 책』이다. 종이로 만든 책은 벽돌보다 더 단단한 수 있으며, 책도 인간에게 위험할 수 있다는 관념이 배어 있다. 브라우어는 필요한 책을 찾으려 벽을 몇 군데 뚫다가 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참여연대의 벽돌은 정치적 이념일까, 시민적 명분일까, 아니면 감시와 견제의 눈초리로 모자이크한 우리 사회의 희망일까? 그 명분이나 이념을 한두 개 포기하거나 바꿔 끼우면 건축물을 유지하기 힘들게 될까?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연재를 마칩니다.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참여연대 20년 20장면 연재 순서

 

#01 봄은 주총의 계절이었던 시절 – 1997 소액주주운동

#02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03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04 호루라기를 나눠 드립니다 – 1994~공익제보자 지원 운동

#05 “비가 싫어질 수도 있겠구나” – 2004, 2010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

#06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07 ‘올리브’가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까닭 – 2003~2008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08 깃발의 상상력 – 1인시위

#09 작은 것도 치열하다 – 1997~ 작은권리찾기운동

#10 만리장성으로도 광장을 막지는 못한다 – 2009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11 종이에 새긴 희망, 열정 그리고 고뇌 – 참여사회

#12 햇빛은 어디에 필요한가 – 1998년~ 선샤인 프로젝트

#13 은유의 전사들 지리산 방황기 ? 2000년 여름 고난의 행군

#14 천안함은 가라앉고 의혹은 뜨고 – 2010 천안함 침몰 사건 대응

#15 옥은 보이지 않고 티만 보이는구나 – 1994~ 인사청문회

#16 압구정 아줌마의 방향 전환 – 1996~ 참여연대 아카데미

#17 기우뚱한 균형을 찾아서 – 2000 ~ 정치적 중립성 논쟁

#18 주고 받는 마음의 과학 – 참여연대 후원의 밤 

#19 운이 나빠도 지킬 수 있는 인간 품격 – 1994~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운동

#20 공간에 쓴 참여 민주주의 – 1997 참여연대 건물 신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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