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4년 04월 2014-04-07   2044

[특집] 한국에는 빈곤이 없다고?

신명호 사회적경제연구센터 소장

한 달간 열린 박노해 시인의 아시아 사진전에 각계 유명 인사와 관람객 3만여 명이 다녀갔고, 아프리카를 담은 그의 또 다른 사진전은 7월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한때 분노와 저항을 노래했던 시인이 흑백 사진에 담아 전하는 원초적 가난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잔잔한 위로와 감동을 얻는 모양이다. 노동 해방 대신 삶의 혁명을 권하는 그의 변신은 충분히 수긍할만하고, 그의 내면이 더욱 깊어진 듯도 하여 내심 찬사의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는 이번 사진전에서 5년 전의 첫 사진전 때 했던 것과 꼭 같은 소회를 피력했다. “이제 우리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만 있을 뿐이다. 여느 시골집 옷장에도 안 입는 옷이 쌓여있다. 소비 문명이 석유 경제의 정점에 서 있다. 중국, 인도 등의 모든 사람이 우리의 최하위 10%처럼 산다면 지구가 열 개라도 자원이 모자랄 것이다. 이만하면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빈곤의 기준은 ‘현재의 평균적 삶’이다

물질문명의 탐욕에 휩쓸리지 말자는 그의 진의를 십분 감안하더라도, ‘한국 사회에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그의 단언은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다. 그의 말대로라면 지난달 말, 송파구의 세 모녀를 자살로 내몬 것은 무엇일까? 2003년, 세 아이와 동반 자살한 34세의 주부는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이 하루 1달러로 살아가는 아프리카나 인도의 극빈층보다 얼마나 풍족하고 행복한지를 깨닫지 못하고, 그저 부자가 되지 못한 게 속상해서 생을 마감한 것일까? 최근 줄을 잇고 있는 생계형 자살자들은 안분자족할 줄 모르는 탐욕의 화신들인가?

우리가 흔히 청빈이라 부르는 자발적 가난과 불가항력적으로 처하게 되는 극도의 빈곤은 본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현상이다. 자발적 가난은 무소유와 나눔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가져다주는 기쁨과 맞닿아 있는 반면, 어쩔 수 없이 직면한 궁핍은 절망과 괴로움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국어사전에는 빈곤을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여 몸과 마음이 괴로운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몸과 마음이 괴로운 까닭은 당사자의 삶이 그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이라고 여겨지는 최저한의 수준에 크게 못 미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이 정한 하루 생계비 1.25달러라는 절대빈곤선이 우리에게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은, 한국에서는 노숙자처럼 길바닥에서 자지 않으려면 당장 한 달에 수십만 원의 월셋방 임대료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빈곤을 말할 때, 뭣 좀 안다는 식자들조차 수십 년 전의 절대빈곤 시대나 현재의 개발도상국 상황과 단순 비교하기를 좋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하루 세 끼 먹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거나 1950~60년대에는 초근목피로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등의 회고담은 끝내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의 가난은 가난도 아니다”는 식으로 결론을 맺는다. 또는 박노해처럼 1960년대의 우리나라보다도 더 궁핍한 제3세계 빈민들의 삶을 기준으로 한국내 빈곤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어떤 사회의 빈곤에 대한 정의는 현재,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누리고 있는 평균적 삶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돈이 없어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된 우리나라 어느 중학생의 슬픔과 상처는 “내가 너만했을 때는 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는 할아버지의 증언이나 “네 또래의 아프리카 아이들은 배를 곯으며 힘든 노동을 하고 있다”는 식의 훈계로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그 아이에게 부모의 가난이 저주스러운 것은 수학여행이 상위 10%의 부잣집 아이들만 가는 소수의 특별한 행사가 아니라, 대부분의 보통 아이들이 함께 가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참여사회 2014-04월호

양극화와 불평 등이 만든 ‘신빈곤’

우리 사회에서 생활고 때문에 생을 포기한 사람들에게는 삼시 세끼를 해결하는 일뿐 아니라 집세와 전기·수도·가스요금, 아이들의 학비, 병원비, 교통비, 친지들에게 체면치레라도 할 수 있는 부조금을 마련하는 일이 힘겹고 고통스럽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부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냥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인정받으며 보통 사람으로 사는 것이었다. 그런 삶을 살고자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의 궁핍을 유지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게 되었을 때 스스로 희망의 끈을 놓았던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맬 대로 졸라매 현재의 생계에서 더 이상 덜어낼  건덕지가 없는 이들에게, 적게 소유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으라는 충고는 참으로 잔인하다.

한 사회가 얼마나 빈곤한가, 더 정확히 말해서, 얼마나 빈곤한 사람들이 많은가를 따지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전체 인구 가운데 빈곤층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 즉 빈곤률을 척도로 삼는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빈곤층 인구수는 아프리카나 남미의 표준소득이 아닌 바로 우리나라의 표준소득, 즉 우리나라 국민의 소득분포에서 한가운데에 위치한 중간소득(혹은 중위소득)을 기준으로, 개인 소득이 그것의 50%가 채 안 되는 사람들을 가려냄으로써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계산된 우리나라의 빈곤률은 대략 15% 정도로 OECD 34개국 가운데 다섯 번째로 높다. 한국은 소위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을 향해 가고 있는 나라들 사이에서도 빈곤인구의 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한다. 상대빈곤률 뿐 아니라 노인빈곤률, 아동빈곤률 등에 있어서도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들에 견주어 거의 최악의 수준에 있다.

흔히 국민 생활의 윤택한 정도를 1인당 국민소득이라는 것으로 비교하지만, 사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란 개념은 불평등의 정도를 무시한 산술평균의 결과치여서 순진한 백성들에게 통계적 착시를 일으킨다. 국내총생산 규모 세계 1위, 1인당 국민소득 최상위권을 자랑하는 미국은 빈곤인구의 비율이 OECD 국가 중 멕시코 다음으로 높은 17%대를 기록하고 있어 중산층의 나라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심각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같은 이유로, 빈곤과 불평등으로 인한 갈등이 연이어 죽음을 몰아오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서민들을 향해 국민소득 4만 불 시대의 기치를 흔들어대는 것은 정치적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일자리를 잃고 은행에게 집을 빼앗긴 하우스푸어들의 자살이 1인당 국민소득 4만 9,600달러인 미국에서도 간혹 일어나고 있다.

과거 한국은 산업화의 성공으로 1980년대까지 빈곤의 굴레를 빠르게 벗어났고, 경제성장이 한계에 다다른 지금 다시 새로운 빈곤을 맞이하고 있다. 한때는 빠르게 도약하고 비상했으나 이제는 빠르게 추락하고 있다. 더구나 눈부신 경제성장의 역사는 정치권력과 자본의 결탁, 노동에 대한 탄압, 재벌의 탈법적 관행이라는 어두운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놓았다. 그리고 이러한 비민주적이고 부정한 관습들은 오늘날 빈곤과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산업화 시대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옛날 이야기를 무한 반복함으로써 현재 우리 눈앞에서 눈덩이처럼 커지고 있는 빈곤과 불평등의 현실을 가리려 든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등의 가치를 앞세우는 경제정책의 시행에 당장 나서지 않으면, 사회적 분열과 배제의 비극은 계속될 것이다.

또한 ‘이제 우리 사회에는 더 이상 빈곤이 없다’는 식의 천박淺薄한 언행은 비록 그것이 무지와 무관심의 소산일망정, 결국 서민들의 아픔을 철저히 외면하는 배부른 정치인·관료들과 어깨동무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명호 도시빈민연구소와 그 후신인 한국도시연구소에서 저소득 주민의 각종 생활 문제를 공부하고 연구해왔으며, 가난한 이들의 실업 및 고용 문제와 관련해서 사회적 경제 부문에 대한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2014. 4월호 특집 – 빈곤과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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