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4월 2015-04-02   730

[정치] 열정페이와 땅콩회항, 제약받지 않는 자들의 민낯

열정페이와 땅콩회항,
제약받지 않는 자들의 민낯

김만권 정치철학자

 

참여사회 2015년 4월호 (통권 221호)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자, 정의에 얽매이지 않는다
“정의로운 것이 대접받는 이유는 결코 정의가 좋은 것이라서가 아니라 불의를 저지를 수 없는 허약함 때문일 뿐입니다. 정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조차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마지못해 행하는 것입니다. 충분히 불의를 저지를 수 있는 자라면, 그리고 사람이라 불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불의를 저지르지도 불의를 당하지도 않게 하자는 그런 약정 따위에 굴복하진 않을 겁니다. 만약 그럴 수 있는 자들이 그런다면 그건 미친 짓이나 다름없을 것입니다.”
플라톤의 『국가』에서 글라우콘이 소크라테스를 향해 던지는 말이다. 플라톤의 둘째 형인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와 정의가 무엇인지를 두고 열띤 논쟁을 펼친다. 글라우콘에 따르면, 사람들이 법을 지키는 이유는 정의가 좋아서가 아니다. 불의를 당할 때보다 저지를 때 더 큰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법이 힘을 갖는 이유는 불의를 행한 자에게 그가 저지른 불의보다 훨씬 더 큰 징벌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우리가 흔히 법이 솜방망이 처벌을 했다고 할 때 이 말에 담긴 속뜻은 법이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리지 못해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저지르지 않는 것보다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만들었다는 비난이라 할 수 있다.

글라우콘은 이런 주장을 더욱 확대시켜 정의를 위해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그 누구라도 기회만 있다면 불의를 저지르려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만약에 불의를 저지를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는 이유는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정의라고 부르는 것은 허위나 가식일 뿐이며, 법은 허위나 가식에 근거해 불의를 저지르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정해 놓은 어정쩡한 협약에 불과한 것이다.

 

열정페이, 왜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일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말이 있다. 열정페이. 일자리 및 업무 경험 제공이라는 명목으로 급여를 지불하지 않거나 아주 소액의 임금을 주면서 취업준비생들을 착취하는 고용주들의 행태를 이르는 말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청년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른 정직원들과 똑같이 출근할 뿐만 아니라 주말 근무, 야근까지 하면서도 때로는 무급으로 일해야 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 심지어 고용노동부 장관이 나서서 “도제식 인턴과 열정페이는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적정 대가를 받고 근로를 제공하는 것과 일을 배우는 수습 성격의 일자리는 구분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향후 자신의 자산이 될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에게 최저임금을 다 달라고 하면 그 일자리는 없어질 것입니다”(한국경제, 2015년 3월 22일)라고 말한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도제식 인턴이란 이름으로 열정페이에 대한 강요를 살짝 덮어놓으며, 최저임금을 다 달라고 한다면 그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 협박한다. 무급에 가까운 도제식 인턴. ‘무술을 배운다는 이유로 물 길어나르는 것부터 시작하라’는 소화자식의 발상이 21세기에도 유효할 수 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적어도 소화자는 취권을 배우러 온 제자에게 도제식 인턴을 통해 이윤을 착취하지는 않았다는 것만큼은 지적해두고 싶다.

글라우콘의 말에 따르면 열정페이가 사라질 수 없는 이유는 고용주들이 청년들의 열정을 아무렇게나 이용해도 대부분의 경우 그 어떤 불이익도 입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낼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법으로도 지켜지지 않는 최저임금의 현실과 이를 단속하려는 정부의 의지가 없는 상태에서 청년들의 열정은 사실상 보호받을 곳이 없다. 고용주들은 정식직원으로 유경험자들을 찾고 있다며, 젊은이들에게 무급으로라도 경험을 주는 게 어디냐고 큰소리친다. ‘수습’, 인턴’, ‘실습’이란 명목 하에 청춘들 앞에 놓인 열정의 현실은 ‘착취’일 뿐이다.

 

땅콩회항, 노동이 아니라 인격을 샀다고 믿는 자들의 오만
열정페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요즘 우리 사회에서 괜찮은 일자리 찾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대기업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일종의 행운에 가깝다. 자신의 자녀가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가 대기업에서 일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부모의 자랑이 되곤 한다. 그래서일까? 때로 우리는 상식의 틀을 완전히 벗어난 고용주들을 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땅콩회항’ 사건이다. 하지만 ‘땅콩회항’ 사건은 단편적인 예일 뿐, 일상에서 고용자들의 ‘갑질’은 수없이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노사관계에 있어서 고용자들은 임금을 통해 피고용자들이 소유한 ‘노동’을 산다. 그럼에도 많은 고용자들은 자신들이 피고용자들의 ‘인격’마저 소유할 수 있다고 믿는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인격을 모멸하는 행위들이 이렇듯 일반화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천민자본주의의 틀을 벗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일자리와 임금을 주는 사람들은 이제 제약할 수 없는 하나의 권력이 되어가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서 지적한 대로 이들의 오만을 제약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제도적 장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고, 그럴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김만권
소크라테스를 존중하여, 정치와 사회를 철학으로 풀어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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