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05월 2015-04-30   3068

[특집] 임금을 올려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임금을 올려야
경제가 성장한다고?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작년 9월 G20과 OECD, 세계은행, 국제노동기구ILO가 공동보고서를 발표했다. 대외비confidential 도장이 찍혀 있던 초안에는 세계경제가 장기침체에 빠질 것이라는 잿빛 전망이 담겨 있었다. 돌파구는 어디에 있을까? 보고서의 답은 ‘임금주도성장wage-led growth’이었다. 임금을 올려야 경제가 성장한다? 노동자 편일 수밖에 없는 ILO야 그렇다 쳐도 오랫동안 신자유주의 전도사 역할을 한 OECD나 세계은행이 이런 보고서를 채택한 건, 말 그대로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흔들릴 일이다.

 

수출주도성장국과 낙수경제학의 파산
이 보고서 초안을 작성한 이는 한국인이다. 현재 ILO 사무부총장 보좌관으로 있는 이상헌 박사가 그다. 하지만 보통 한국인이라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고 절반 이상은 ‘큰일 날 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박정희시대부터 무려 50년 이상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믿음으로 살아왔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살 길은 수출이요, 이를 위해선 임금 인상을 자제하여 대외경쟁력을 확보해야 한다. 수출이 잘 되어야 공장을 더 많이 짓고(투자), 고용도 늘어나서 결국 모두가 잘 살 수 있다는 낙수경제학trickle down economics이 대대손손 전해내려 온 레퍼토리였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어딘가에 우리 물건을 계속 사주는 나라가 존재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수출주도전략이 성공한 것은 미국이 그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미국의 고달러 전략과 부채주도성장이 바로 그것이다. 미국(유럽에서는 그리스나 스페인)은 정부와 가계가 빚을 내서 소비를 증가시켰다. 그러나 요즘 세계와 우리나라에서 목도하듯이 마냥 빚을 늘릴 수 있는 경제주체란 있을 수 없다. 미국발 세계금융위기와 유럽의 재정위기는 수출주도-부채주도가 맞물린 세계경제체제의 붕괴를 의미한다.

 

특집-그래프-정태인

 

세계은행도 ‘임금주도성장론’
그렇다면 현재의 장기침체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1930년대의 장기 실업이 유효수요의 부족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경기가 나빠지면 실업이 늘어나고, 물건이 안 팔릴 게 예상되면 기업도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다. 총수요를 구성하는 소비와 투자가 동시에 축소되는 상황, 지금이 바로 그렇다.
소비가 늘어나려면 임금 등 소득이 증가해야 한다. 이것이 임금주도성장, 또는 소득주도성장(한국은 자영업의 비중이 크기 때문에 임금뿐 아니라 자영업자의 소득도 늘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이 용어를 쓴다)의 핵심 명제다. 기실 임금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비용이지만 거시경제에서 보면 수요다. 쉽게 말해서 모든 기업가는 자사의 노동자에겐 임금을 덜 주려고 하지만(비용의 측면), 타사의 노동자 임금은 오르길 바란다(수요의 측면).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2월 국정연설에서 “연간 1만 5천 달러 미만의 소득으로 괜찮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원은 반대하라”며 이른바 텐텐(최저임금 10.10달러)법안의 통과를 강조했다. 그래서일까? 극도의 저임금 때문에 ‘악의 제국’으로 불리던 월마트가 최저임금을 9달러로 올렸고 내년에는 10달러까지 인상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뿐만이 아니다. 아베 일본 수상은 대기업 총수들과 골프를 치면서 임금을 올려 달라고 하소연했다. 중국 대도시들의 평균임금도 10%이상 올라가고 있다.
<그림>에서 보듯이 1990년대 중반 이래로 한국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을 밑돌았으며 그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그 간격을 메꾼 것이 수출이고, 2000년대 이후에는 부채에 의한 소비였다. 즉 한국의 최근 정책기조는 ‘수출주도+부채주도’ 경제 성장이었으며,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내 놓고 부채주도성장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전 세계의 장기침체로 인해 수출은 여의치 않고(지난 2년간 원화표시 수출증가율은 마이너스였다), 가계부채의 폭증으로 더 이상 소비도 늘어나기 어렵다. 정책기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요즘 야당과 학계에서 “소득주도성장”이 세를 얻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득주도성장의 바탕은 경제민주화
하지만 소득주도성장론이 단순히 임금인상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저성장의 대재앙이 예고된 우리 경제에 대하여 이 정도의 내용을 성장의 해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유승민),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기업의 결심이 필요한 일인데, 기업을 움직이게 할 정부의 수단이 줄어들고 있다”(안철수)는 정치인들의 비판은 그런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우리나라 중소기업의 절반을 차지하는 하청기업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청단가가 올라야 한다. 대기업의 천문학적 사내유보금은 이들 노동자의 임금 인상에 쓰여야 마땅하다. 복잡하게 세법을 개정할 것이 아니라 경제민주화라는 정공법을 택해야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재벌의 하청계열에 속하지 않은 ‘독립’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의 클러스터화cluster, 산업집적와 지원도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속한다. 이탈리아 에밀리아 로마냐 지방에는 직원이 고작 5~6명뿐인 영세기업들의 네트워크가 세계적인 경쟁력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는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 정책도 소득주도 성장전략의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지역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면서 고용이 늘어날 것이고, 이들 기업의 고유한 특징인 평등한 임금으로 인해 사회 전체의 임금불평등도 줄어들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전략에는 정부가 주도하는 생태 인프라 투자도 포함된다. 과거의 철도 건설이 그랬듯이 재생가능 에너지의 발전을 늘리고 스마트그리드smart grid, 에너지 네트워크와 통신 네트워크가 합쳐진 지능형 전력망로 연결하는 정부 투자는 수많은 관련 기업을 탄생시킬 것이고 이에 따라 고용과 임금도 늘어날 것이다.

 

임금의 수준 = 사회적 협상력의 크기
소득주도성장론의 이론적 기초는 포스트케인즈주의 경제학이다. 포스트케인지언들은 임금이나 이윤이 주어진 기술수준 하에서 사회적 협상력의 크기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즉 생산요소들의 가격이 시장에서 한계생산력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적 합의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현재의 소득주도성장론의 원형은 1970년대 유럽의 ‘소득정책incomes policy, 초기에는 임금정책이라고 불렸다’이며 가장 성공한 사례는 스웨덴의 ‘연대임금정책’이었다. 즉 합의의 정치에 의한 복지국가가 소득주도성장론의 사회경제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론은 탄탄한 이론적 기초와 역사적 사례를 갖춘 정책기조이며, 각국 정상들이 임금 인상을 호소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세계 전체의 흐름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계량연구들은 한국도 소득주도성장국가에 속하며 임금인상(더 정확히 말하면 노동소득분배율의 상승)이 수출과 투자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걱정 말고 임금인상을 주장하시라. 단 각종 불평등을 줄이는 방향일 때라야 노동자 몫이 최고로 상승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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