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5년 11월 2015-11-02   811

[정치] 빨갱이보다 더 빨간 역사교과서 국정화

 

빨갱이보다 더 빨간 
역사교과서 국정화

 

 

글. 김만권 정치철학자
소크라테스를 존중하여, 정치와 사회를 철학으로 풀어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거리 위의 정치철학자다. 시민들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 함께 말을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불평등의 패러독스>, <참여의 희망>, <정치가 떠난 자리> 등을 썼다.

“김일성 주체사상을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있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는 청와대를 돕는 새누리당이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내건 현수막이다. 이 현수막을 둘러싸고 왜곡 논란이 거세지자 하루 만에 내리고 말았다. 그러나 현수막만 내렸을 뿐 국정화 추진에서 이 논리도 아닌 거짓말은 여전히 변함이 없다. 

“주체사상을 뿌리 뽑기 위해서라도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켜야 한다.” 참으로 원색적이다. 우리 아이들이 주체사상을 배운다는 거짓말로 ‘진실이 담긴 국정교과서를 만들겠다’고 외치는 이 기이한 주장. 참으로 추잡하기까지 하다. 이런 일들이 민주사회를 표방하는 곳에서 벌어진다는 점에서 서글프기도 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모든 해석은 지워버리겠다는 ‘빨갱이보다 더 빨간’ 이런 주장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정말 역사에 대한 해석을 단 하나의 진실로 채울 수 있는 역사교과서가 가능하긴 한 것일까?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많은 사람들이 사실fact을 진실혹은 진리, truth과 동일시한다. 그리고 확인된 사실을 쓰면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과 진실은 엄연히 다르다. 이는 사실과 진실의 시제가 명백히 드러낸다. 사실은 시간이 지나면 ‘is’가 ‘was’로 변하지만 진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is’의 형식을 취한다. 사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과거에 남겨지는 것이지만, 진실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항상 현재라는 시제의 형태로 우리 곁에 남는다. 

불행히도 이 차이 덕분에 사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체불명의 유령이 되어 이 세계를 떠돌기도 한다. 역사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런 ‘was’를 기반으로 하는 탓에 소위 역사 왜곡이 가능한 것이다. 인류는 이를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왕들이 실록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한 조선의 “권력과 역사의 분리” 정책에서도 쉽사리 알 수 있다. 당대에는 이런 유동적인 사실을 둘러싼 역사의 왜곡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한다. 어쩌면 역사를 해석한다는 말 그 자체가 ‘역사에 진실 혹은 진리는 없다’는 상식적인 명제를 증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진리는 그 자체로 자명한 것이라 해석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참여사회 2015년 11월호 (통권 228호)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실을 진리로 만들겠다는 폭력
그런데 우리 정부는 기존의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정리하기 위해 하나의 해석만을 제시하겠다고 한다. 아이러니 한 점은 그 기존의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검정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허용해 준 것이 정부였다는 사실이다. 그 정부가 기존의 교과서를 이념편향이라고 매도하고 자신들이 중립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기괴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는 결국 사실(was)을 진리(is)로 만들어 후손들에게 전달하겠다는 의도이며, 국가의 해석이 진리라는 선언이다. 국가는 “진리”를 추구하는 집단이 아니다. 언제나 “이데올로기”를 만드는 집단이다. 이데올로기는 말 그대로 “잘못된 의식”이라는 뜻이다. 통치에 필요한 의식을 만드는 곳이 바로 국가다. 그렇기에 우리는 국가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늘 경계한다. 중립을 빙자하며 국가가 그런 곳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순진함을 가장하는 사악한 이데올로기로 가득한 발언은 단호히 부정한다. 국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그런 곳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런 국가의 가능한 권력남용을 제한하는 일을 두고 ‘자유liberty’라고 불렀다. 

 

생각이 다른 모든 해석은 지우겠다는 기이한 중립교과서 
지금 국가가 그 “잘못된 의식”을 만드는 일을 위해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를 쥐었다. 분명 그 역사를 고치는 일에 가담하는 이들은 그 역사를 자신들의 이익에 맞게 수정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전달할 것이다. 그러나 중립은 다양한 입장이 공존할 때 가능한 것이다. 중립이 다른 입장 없이 세상에 남겨질 때 그것은 지배적인 발상으로 변모하고 만다. 시간의 변화 속에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 중립이기 때문이다. 

다른 입장이 마음에 들지 않아 모두 없애 버리고 등장하는 것들을 중립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은 중립이 아니라 생각과 해석의 다양성을 말살하는 폭력이다. 생각과 표현의 다양성, 해석의 다양성을 추구해야 할 민주국가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그 다양성을 품고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깊은 모멸이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역사뿐만 아니라 ‘다양성’을 중요한 축으로 삼는 민주주의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당신의 편견을 국가 전체에 심지 말라 

이런 점에서 우리는 누가 이 일에 가담하는지 지켜보고 기억해야만 한다. 집단의 기억을 하나로 조작하려고 시도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시기가 왔을 때, 가담했던 자이든 가담을 통해 이익을 입은 후손들이든 반드시 그 책임을 지도록 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앞장 선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시 기억해야 한다. 자신들이 ‘독재’와 ‘친일’이란 유산에서 자유롭지 않은 한, 역사에 손을 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아주 지극히 평범한 상식을. 

“역사는 유동적인 편견이란 잉크로 쓰여진다”고 마크 트웨인은 말했다. 국정화 교과서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당신들의 유동적인 편견이란 잉크로 국가 전체를 먹칠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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