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6년 06월 2016-05-30   860

[특집]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특집4_고장 난 나라, 빗나간 애국

 

 

좋은 국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글. 김만권 정치철학자

 

당대 민주주의에서 좋은 국가를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이런 문제는 당연히 “무엇이 애국일까”라는 질문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를 두고 사이먼 켈러Simon Keller는 “애국주의자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그것이 왜 문제일까”를 고민하면서 “애국주의는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그것은 여러분이 의미하는 ‘애국주의’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어떤 이에게 애국주의는 자기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것을 말하고, 어떤 이에게 최상의 애국주의는 그 정책에 이견을 제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켈러의 말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듯 보이지만, 이 두 가지 다른 행위에는 필연적으로 내적 갈등이 존재한다. 대개의 경우 자기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이들은 정책에 이견을 제기하는 자들을 향해 침묵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견을 제기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반-애국적인, 심지어 매국적인 행위로 여겨지기 십상이다. 

 

‘국민’과 ‘시민’ 
그러나 필자는 애국에 대한 이 두 가지 다른 태도가 바로 ‘국민’과 ‘시민’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일종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 ‘국민’이란 개념은 서구 근대 국가가 강력히 추진했던 19세기 산업화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구 국가들이 경쟁적으로 산업화에 돌입할 때에는 국가의 내부적 결속이 요구되었고 그 내부적 결속의 근거를 단일민족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국민은 전체의 결속력을 강조하는 정치적 개념으로, 켈리의 표현을 빌자면 “자기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국민’의 성향을 지닌 이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당대 민주주의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성향을 지닌 이들이 정치에서 엘리트주의, 나아가 극단적인 경우 맹목적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한 방향으로 가기 위해 좋은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엘리트들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일반적인 인식은, 국민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역할이 좋은 정치엘리트들을 뽑고 그들이 결정한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것이라고 여기도록 한다. 더 나아가 엘리트들이 결정한 정책에 대한 반대를 국가 자체에 대한 반대로 여기는 ‘왜곡된 애국주의’에 이르기도 한다. 필자는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는 왜곡된 애국주의가 바로 이 전형적인 ‘국민의 오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오류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산업화 이후 민주화 시대에 강조된 개념으로서 ‘시민’은 안정된 민주정체의 구성원들에게 널리 그리고 깊숙이 퍼져 있는 자유적이고 민주적인 속성을 드러내는 정치적 언어로, ‘차이와 개인성’을 인정하면서도 사적 이익보다는 공적 가치에 우선성을 부여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을 지닌 이들을 의미한다. 차이와 개인성을 인정하는 존재인 시민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정책에 이견을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견 제기’라는 속성은 시민이 그 자체로 정치에 참여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근대 이후 민주국가는 시민이 많은 국가가 보다 건강한 정책을 생산, 유지, 발전시킨다는 전제 하에 작동해 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은 ‘시민’보다는 ‘국민’이라는 개념을 훨씬 더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의회’대신 쓰이고 있는 ‘국회’라는 용어나 민주화 이후 탄생한 헌법조차 권력의 소재를 ‘인민’ 혹은 ‘시민’이 아닌 ‘국민’에 있다고 밝히고 있는 것은 국민 개념의 영향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시민적 가치를 지닌 이들은 훨씬 많아 보이는 이유는 시민의 정확한 의미가 알려지지 않은 까닭에 시민의 가치를 지니고도 습관적으로 스스로를 국민이라 부르는 사람들이 많은 탓으로 보인다. 

 

참여사회 2016년 6월호(통권 235호)

왜 시민이 중요한가?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가 단지 ‘시민이 국민보다 좋은 개념이다’가 아니라, ‘왜 시민이 좋은 국가를 만드는 데 필수적인가’라는 질문에 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당대 ‘지구화 시대의 국가’와 연관이 있다. 지구화 과정에서 빚어진 국가에서 시장으로 이행된 권력 이동은 ‘시장권력’이란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켰다. 지구화된 시장에서 권력을 잃고 구성원들에 대한 최대한의 보호라는 근대 국가의 궁극적인 이상을 내려놓은 국가는 이제 개인들을 향해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말한다. 국가에겐 글로벌 시장이라는 국민들을 돌보지 못하는 핑계가 생겼고, 그 책임이 시장 그 자체에 떠넘겨진 이상 누구도 사태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더불어 지속되고 반복되는 경제 침체라는 위기의 일상화 속에 국가의 구성원들도 국가의 보호를 포기하고 마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믿는 이들은, 국가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마저 각자 짊어진 채 “국가에게 요구하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보호하라”는 논리를 떠받들게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은 자신들이 이런 논리를 떠받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우리정부가 말하는 ‘경제민주화’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규제되지 않는 기업에 대한 통제가 아니라 오히려 규제를 풀어주는 것으로 권력이 시장에 넘어갔음을 반영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국가의 정책을 굽힘없이 지지하는 이들은 이런 정책이 자신을 보호하는 정책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가의 정책에 이견을 제기”하며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들이야말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정치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정치엘리트가 기업과 결탁한 포스트 민주주의 구조에서는 야당조차도 기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여간해선 내지 않는다. 그렇기에 시민의 정치참여가 중요한 것이다. 

 

‘더 많은 민주주의’가 좋은 국가를 만든다
무엇이 더 좋은 국가를 만드는지 묻는다면, 주저하지 않고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답할 것이다. 당대의 지구화 구조 속에서 ‘좋은 국가는 정치에 참여하는 좋은 시민들이 만든다.’ 시장에 권력이 넘어간 상태에서 국가는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와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일상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의 정책에 끊임없이 이견을 제기하는 시민들이야말로 효율성에 집착하는 국가가 구성원들의 보호라는 국가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게 한다. ‘국가의 정책을 있는 그대로 굽힘없이 지지하기’보다 ‘더 많은 이의 제기를 통해 국가에게 자신의 임무를 다하도록 하는 것.’ 지금은 이야말로 좋은 국가를 만드는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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