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3월 2021-03-01   623

[보자] 언제 종말할지 모를 세계를 붙잡는 이유

언제 종말할지 모를 세계를 붙잡는 이유

 

나는 소위 ‘패키지 게임’이라 불리는 비디오 게임을 좋아한다. 누군가 공들여 만든, 이야기로 가득 찬 ‘폐쇄적인’ 가상세계를 모험하는 것이 취미라는 뜻이다. 그중 《위쳐3》, 《라스트 오브 어스2》, 《사이버펑크 2077》의 세계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온라인 게임과는 친하지 않다. 내가 아는 한, 대체로 온라인 게임은 서사보다 경쟁을 중시한다. 점점 좁아지는 경기 구역 내에서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결투하는 《배틀 그라운드》, 6대6으로 팀을 갈라 싸우는 《오버워치》, 공성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과금) 전쟁으로 유명한 《리니지》 등이 대표적인 예다. 나는 경쟁하는 상황에서 심한 스트레스를 느끼기에 이런 게임은 해 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속한 팀에 발목 잡히면 부모님 안부와 관계된 ‘패드립’을 듣는다는 풍문, 음성채팅이 지원되는 온라인 게임에서 여성은 성희롱 대상이 되기 쉽다는 점도 거리를 두게 했다.

 

게임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결국 사람 

하지만 모든 온라인 게임 환경이 이렇게 살벌하진 않은가 보다. 영화 〈내언니전지현과 나〉를 보고 느낀 바다. 영화에 나오는 《일랜시아》는 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게임이었다(역시 세상은 넓고, 게임은 많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일랜시아와 그 유저들에 대한 영화다. 일랜시아는 캐릭터의 ‘능력’을 키우기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도 높은 일상을 제공하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일랜시아에서 친구들의 머리를 예쁘게 바꿔주고 싶은 사람은 미용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시작하면 된다. 물론 대다수의 유저는 ‘매크로’의 도움을 받을 것이다. 수련을 위해서는 반복적인 ‘클릭질’을 해야 하는데, 매크로가 수고를 덜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넥슨이 일랜시아를 ‘방치’한 덕에 누리는 유익이다. 1999년 출시된 일랜시아의 마지막 업데이트는 2014년에 있었다. 이러다 서버가 종료돼도 이상하지 않다. ‘넥슨 매각설’이 솔솔 새어 나오며 유저들의 불안은 더욱 고조됐다. 넥슨이 매각되면 돈 안 되는 서비스는 종료될 것이고, 여기에 일랜시아가 포함될 가능성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이것이 작품을 만들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고 감독이자 주인공, ‘내언니전지현’은 말한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3월호 (통권 283호)

내언니전지현과 나 People in Elancia

다큐멘터리 | 86분 | 2020 | 한국 | 12세 관람가

감독·출연 박윤진

 

‘내언니전지현’은 주인공이 일랜시아 안에서 쓰는 활동명이다. 그는 일랜시아 속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직도 ‘망겜’에 남아있는 유저들에게 묻는다. “일랜시아 왜 하세요?” 그래픽이 취향에 맞아서, ‘똥컴’에서도 잘 돌아가서, 게임에서의 보상이 현실 보다 합리적이어서, 등등…. 사람들은 자조적으로, 때론 열띤 표정으로 그 이유를 밝힌다.

 

감독은 유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공감하고, 때로는 위로를 건넨다. 그는 따뜻한 말에 재능 있는 사람이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많은 일랜시아라면 과연, 사람들이 떠나기 아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유저들이 게임에 대해 한 말 모두 그럴듯한 이유지만, 이 게임을 ‘아직까지’ 하게 만드는 건 결국 사람으로 보인다는 거다.

 

그래서인지 영화 속 일랜시아는, 낙엽만 봐도 까르르 웃는 사람들로 가득한 포근한 공간으로 비친다. 이런 분위기는 ‘정모’에서도 이어지는데, 펜션에 한데 모여 웃고 떠드는 다양한 성별과 연령대의 사람들을 보며, 고기를 굽던 펜션 직원이 묻는다. “그런데 어디서 오셨어요?” “게임이요! 일랜시아요!” 밝게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게이머를 향한 세간의 편견과는 거리가 멀었다(그 직원이 “일랜시아가 아직도 있어요?”라며 크게 놀라는 게 이 장면의 웃음 포인트다).

 

일랜시아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이라는 말처럼 일랜시아에도 문제적 인물은 있다. 아이템 사기를 치거나, 캐릭터를 마주치면 게임이 종료되어버리는 ‘팅버그’를 퍼뜨려 (안 그래도 얼마 남아있지 않은) 유저를 떠나게 만드는 사람들이다. 특히 팅버그의 경우, 일반 유저들이 노력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재앙과도 같았다.

 

이로 인한 스트레스로 접속하지 않는 유저들이 날로 늘자, 감독은 더는 가만히 있어선 안 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무엇을 했고 효과가 어땠을지는, 직접 영화를 보고 확인해보자! <내언니전지현과 나>는 독립·예술영화 공공 온라인 플랫폼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kr를 통해 볼 수 있다.

 

게임을 통해 만난 사람에 대한 애정은 다시 그들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언제 종말할지 모르는 세계를 붙잡고 있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그리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될 때가 있다. <내언니전지현과 나>가 내게 해준 이야기다. 나는 이게 현실 세계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쨌든 아직까지 일랜시아의 숨은 붙어있다. 서버를 유지하는 데는 비용이 발생하므로, 온라인 게임의 숙명을 언젠가 일랜시아도 맞닥뜨릴 것이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일랜시아에 호감과 관심을 가지게 된 이로서, 넥슨이 멋지고 감동적인 이 세계를 남겨주길 바랄 뿐이다. 다행히 넥슨은 <야생의 땅 : 듀랑고>의 서버를 종료할 때 아듀 영상 제작, 싱글 플레이 제공 등으로 유저들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최근 일랜시아 유저들과도 간담회를 진행했다고 하니, 후일담을 기대해 본다. 

 

➊ ‘패륜’과 ‘애드리브’의 합성어로, 부모나 가족을 성적 비하나 개그의 소재로 삼아 욕하는 것을 말함

➋ 캐릭터가 특정 행위를 자동으로 반복하게끔 하는, 사실상 불법 프로그램

➌ ‘망한 게임’의 줄임말. 여기서는 일랜시아를 가리킨다.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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