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 2021-11-30   592

[역사] 기억이라는 고통

기억이라는 고통

 

 

“3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 앞에 섰다”

 

신촌의 작은 골목을 비집고 서 있는 이한열기념관은 <보고 싶은 얼굴 展>이라는 기획전시를 해마다 주제를 달리해 열고 있다. 올해는 ‘1991년 5월을 깨우다’라는 테마로 열리는데, 전시장을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마주보이는 열사들의 초상에는, 1991년을 제법 기억하는 사람조차 낯설게 느낄 수 있는, 대구의 예비교사 손석용과 제주의 지역 활동가 양용찬의 모습도 만날 수 있다. 전시장을 돌아 나올 때 마주치는 자료 전시에는 강경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노트의 메모가 정성스럽게 놓여 있다. 

 

이 전시의 백미는 관람객이 전시관 한켠 단출하게 마련된 부스에 들어가 직접 헤드폰을 쓰고 들을 수 있는 시 낭송 설치 작품이다. 여러 배경음악과 간단한 믹싱을 통해 녹음된 시 낭송을 들을 수 있다. 한 드라마 PD와 배우들이 마음을 모아 완성했다는 이 작품 속엔 1991년 5월 18일 연세대 앞 굴다리에서 분신한 이정순의 유작 시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한 달 전, <1991, 봄> 촬영 중에도 차마 뵙기를 청하지 못했던 이정순 열사의 딸 공문정 씨를 바로 그 전시에서 만날 수 있었다. “30년이 지나서야 사람들 앞에 섰다”는 그녀의 말은 매년 5월이면 수없이 마주해야 했을 그녀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조금은 지워졌다는 의미일까. 그저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나눌 수 있는 맘이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시간이 이어졌다. ​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91호)

 

 

이한열기념관 전시 <보고 싶은 얼굴 展 : 1991년 5월을 깨우다>에서 어머니 이정순 열사의 유작 시 낭송을 듣고 있는 공문정 씨 Ⓒ권경원

 

 

30년 세월의 알리바이, 6공화국의 진심

 

광주 학살의 주범 전두환과 노태우가 영욕榮辱의 생을 마감했다. 한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포스팅과 사설들이 저마다의 미디어를 채우고 있는 사이, 그들과 그 추종자들이 구획한 6공화국 체제는 여전히 이 사회를 휘두르고 있다. 보수 양당이 권력을 나눠 가지며 벌이는 기만적인 진영 싸움, 검찰과 언론의 반민주적 헤게모니, 서울의 대학을 졸업한 이들의 이해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것을 대표하는 양 사회의 담론을 굴절시키고 독점하는 것까지, 모두 여전히 6공화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다. 

 

1991년 봄에 있었던 젊은이들의 희생은 이 사회가 얼마나 진심으로 민주주의를 원하고 있는지를 짐작게 하는 임계점이기도 했다. 권력자들의 죽음과 함께 그들이 처참히 부순 인간의 가치, 보편적 정의, 그리고 소박한 이들이 학살자들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짐으로써 말하려 했던 그때, 명백히 도착했어야 할 미래들을 기억하는 것은 여전히 살아남은 이들의 몫이다. 

 

지난 시간의 삶을 담는 행위로서의 ‘기억’이란 다채로움으로 역동하던 삶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저장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기억하겠다”는 언명言明이란 돌이킴의 끝자락에서 직면하고 싶지 않은 고통에 기꺼이 가 닿는 여정을 품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6공화국 체제가 지속되는 동안 한 번을 끊이지 않고 반복되어왔던 이름 없는 희생들에 많은 비중을 두고 연재를 지속해 왔다. 명지대학교 앞, 거리에 놓여 있던 강경대 기념비가 교내로 이전했다. 강경대와 더불어 공권력의 과잉 진압으로 충무로에서 숨을 거뒀던 김귀정과 그녀의 어머니가 버텨내야 했던 세월을 담은 다큐멘터리 <왕십리 김종분>이 지난달 개봉했다. 그리고 1991년 당시 최초로 분신했던 전남대 학생 박승희의 부친 박심배 님께서 지난여름 영면에 드셨다. 

이 모두가 올해 있었던 일들이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91호) 월간참여사회 2021년 12월호 (통권 291호)

지난 시간의 삶을 담는 행위로서의 ‘기억’이란 다채로움으로 역동하던 삶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저장해낼 수 없다는 점에서 비극적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연재를 마치며

 

2016년 12월부터 격월로 송고해 왔던 이 지면에서 독자분들께 작별 인사를 드려야 할 시간에 비로소 이르렀다. 필자의 키보드 자판을 떠난 원고는 서너 차례를 제외하고 인쇄 직전에야 편집자의 메일함에 도착하곤 했다. 기억과 기록을 위해 어설픈 사관史官 흉내를 내었지만, 30년 전 웃픈 판타지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었을 뿐인 필자에게는 쉬이 써진 원고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뒤늦게나마 고백한다. 

 

편집진의 아량이 없었다면 <1991, 봄>이라는 제목의 영화 개봉도, 책의 출판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부끄러움이 쌓여가던 글꼬리를 자연스레 내릴 수 있도록 살펴주신 ‘참여사회’ 편집진과 미흡한 글들을 인내하고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마지막 문장에 새겨 둔다.

 

※ 권경원 감독의 〈역사〉 마칩니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을 연출했다.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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