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2년 06월 2022-06-01   943

[여는글] 공간은 의식을 지배하지 않는다

여는글

공간은 의식을
지배하지 않는다

 

월간 참여사회 2022년 6월호 (통권 296호)

ⓒPixabay

 

먼저, 널리 알려진 얘기부터 해야겠다.

 

신라의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 날이 저물고 앞을 볼 수 없는 밤에 이르러 잘 곳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다 어렵게 산속에서 움막집을 만났다. 종일 걸어 피곤했기에 그대로 깊은 잠이 들었다. 원효는 새벽녘에 목이 몹시 말랐다. 잠자리 주변을 더듬으니 바가지 같은 것이 손에 걸렸다. 물이 담겨 있는 듯해 급히 마셨다. 물맛이 그렇게 꿀맛일 수 없었다. 다음 날 잠에서 깨 새벽에 마신 물바가지를 보았더니, 아니! 바가지라고 생각한 것은 해골이 아닌가?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감로수甘露水처럼 마신 것이다. 그 순간, 그의 몸은 우주적 진동으로 흔들렸고 마음은 환하게 열렸다. 세상 이치에 대한 어떤 의심도 사라졌다. 심생즉종종법心生則種種法生 심멸즉종종법멸心滅則種種法滅. 하나의 생각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 온갖 작용과 현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이치를 확연히 깨우친 것이다.

 

그럼 생각해 보자. 원효의 의식을 송두리째 흔든 깨달음의 원인과 조건이 어디에 있는가? 사체가 자리한 움막이라는 ‘공간’인가, 아니면 해골바가지와 그 속에 담긴 물이라는 ‘사물’인가. 만약 움막이라는 공간과 해골물이라는 사물이 깨침의 ‘절대적 원인’이라면 누구든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럴 수가 없다. 왜 그런가? 공간과 사물은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절대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치가 그러하다. 

 

불교사에서 제2의 붓다로 칭송되는, 우리에겐 용수보살로 알려진 나가르주나는 그의 저서 『중론』에서 원인과 결과, 결과와 원인은 고정불변이 아님을 많은 비유를 통해 논증하고 있다. 그중 하나를 살펴보자. 

 

여기 알맞게 자른 통나무가 있다. 이 통나무는 불의 조건인 연료가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 통나무는 ‘반드시’ 불의 ‘절대적’ 조건인가? 그렇지 않다. 왜냐면 통나무는 집 기둥이나 도마로도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통나무는 불의 조건이 될 수 없는가. 그렇지 않다. 통나무에 불을 지피면 통나무는 불의 재료가 된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불(결과)과 연료(원인)는 서로 의존하여 존재한다/연료에 의하여 불이 있고 불에 의존하여 연료가 있는 것이다.” 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결과가 조건 속에 미리 존재했다거나/존재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은 모두 불가능하다” 부연하자면, 결과가 발생할 때 조건이라고 할 수 있으며, 결과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다. 

 

다시 생각해 보자. 어떤 공간과 사물은 반드시, 절대적으로, 결정적으로, 획일적으로 결과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렇다고 발생시키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단지 어떤 ‘의도’와 ‘행위’로 결과가 발생한다. 결과에 따라, 그 결과의 조건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움막이라는 공간과 해골물이라는 사물이 반드시 깨달음을 주는 원인이 되거나, 원인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물을 마신 자의 마음가짐과 해석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평생 진리 추구에 정진한 원효의 ‘의식’이 해골물을 깨달음의 원인으로 만든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겼다. 대통령 집무의 공간을 옮긴 일은 다양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그러나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제왕적 대통령, 권위주의 청산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했겠으나, 그의 명분과 발언은 철학의 빈곤이고 오류이다. 공간과 사물은 어떤 의식을 만들지 않는다. ‘청와대’와 ‘용산’이라는 명칭 또는 공간이 고정적이고 결정적인 이미지와 인식을 만들지 않는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행위와 문화가 인식을 만든다.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면, 그토록 욕을 먹는 검찰청을 명동성당이나 해인사로 옮기면 이미지가 쇄신될까? 탐욕에 사로잡혀 부당한 착취를 일삼는 사람이 소담한 집에서 거주하면 그 사람의 이미지는 좋아지는 걸까? 

 

거듭 말한다. 이미지와 인식은 공간을 이동하고 명칭을 바꿈으로써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직한 마음, 그에 부합한 규칙을 지키고 새로운 문화로 만들어갈 때 비로소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다. 공간은 의식을 지배하지 않는다. 규칙이 인식을 만들어간다. 문화가 이미지를 만든다. 

 


법인 스님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에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새벽숲길’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 한주, 실상사작은학교 이사장과 철학 선생님을 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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