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페미니즘] 역사를 ‘수놓은’ 익명의 여성들

70m짜리 자수로 기록한 헤이스팅스 전투

프랑스 북동쪽 노르망디의 해안가에 바이유Bayeux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이 작은 마을에는 오직 한 작품만을 위한 미술관이 있다. 50.8cm의 폭과 70m 가까운 길이의 거대한 태피스트리Tapestry다. 마 위에 견사로 자수를 놓은 이 태피스트리는 11세기에 제작된 작품이다. 인구가 1만 3천 명 정도 되는 작은 마을에 무려 70m나 되는 커다란 규모의 자수 작품이 어떤 연유로 홀로 박물관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지리적인 요충지 바이유는 크고 작은 전쟁의 기억을 품은 도시다. 2차 대전 당시 1940년부터 나치가 점령하던 이 마을은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해방된 프랑스의 첫 번째 도시였다. 또 다른 주요 전투는 백년전쟁이다. 영국과 가까운 지리상 위치 때문에 14~15세기 전후 끊임없이 전쟁에 시달리던 마을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다른 전쟁이 있다. 노르망디 공국이 9세기부터 프랑스를 점령했을 당시, 1066년 노르망디 공국의 왕 윌리엄과 잉글랜드의 해럴드 사이에 일어난 헤이스팅스 전투Battle of Hastings다. 이 전투에서 윌리엄은 승리했고 해럴드는 전사했다. 이를 계기로 노르망디 공국은 영국을 정복한다. 영국 정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헤이스팅스 전투 과정을 58개 장면으로 나눠 담은 작품이 바이유 태피스트리다.

바이유 태피스트리 Bayeux Tapestry
자수, 70mx50.8cm, 1082

70m 길이의 태피스트리에는 바다를 건너는 과정, 전쟁 준비, 윌리엄의 승리, 사용하던 무기 등이 시각적으로 잘 기록되어 있다. 서사가 있는 이 태피스트리에서 에드워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와 그 후계자 헤럴드, 노르망디의 윌리엄이 주인공이다. 해럴드가 윌리엄의 군사가 쏜 화살에 눈을 맞아 죽는 모습까지 묘사돼 있어 프랑스 입장에서는 영국을 상대로 승리한 역사적인 기록이다. 이 작품은 전투가 시작된 1066년부터 제작해서 1082년에 완성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담은 태피스트리는 중세의 군사 정보를 제공하는 기록유산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어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중세에는 흔히 종교미술을 떠올리기 쉽지만, 중세는 봉건 사회였기에 영주들이 세를 과시하기 위해 제작한 세속미술도 크게 한 축을 이룬다.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중세의 세속미술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게 남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세기에 복원 작업을 거쳐 바이유의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긴 길이 때문에 물리적으로 전시 공간을 확보하기 쉽지 않을 뿐더러 오래된 문화유산이라 쉽게 바이유를 떠나기 어려웠다. 1804년 나폴레옹이 잠시 루브르 박물관으로 가져온 적이 있을 뿐 거의 언제나 바이유에 있었다. 2018년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태피스트리를 영국에 대여하겠다고 했다.

바이유 태피스트리 일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바이유 주교가 윌리엄 군을 따라 서 있는 모습이 묘사돼 있다

기록되지 않았지만 기억해야 할 여성들의 실잣기

훗날 역사화에서 여성 화가를 배제한 사실을 고려하면 무훈시武勲詩1 형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표현한 바이유 태피스트리의 의미는 더욱 크다. 이 태피스트리의 작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수녀를 비롯한 ‘다수의 여성들’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에서 중세미술의 하나로서 바이유 태피스트리를 언급하지만 누가 만들었는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휘트니 채드윅은 《여성, 미술, 사회》에서 태피스트리의 내용 외에 누가 만들었는지도 짚어본다.

중세에 자수는 전적으로 여성이 담당했다. 태피스트리의 후원자 역시 여성이 많았다.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마틸드 여왕의 태피스트리로도 불리는데, 그는 윌리엄의 왕비였다. 그가 직접 이 거대한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아마도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작품을 주문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제프리 초서의 소설 《캔터베리 이야기》에서 배스의 부인이 “여성의 무기는 실잣기”라고 말하듯, 중세에 실 잣는 노동은 여성의 주요 경제활동이었다. 당시에는 길드 작업장에서 남녀가 함께 작업하기도 했으나 자수 분야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이 맡았다. 여성들은 실잣기 노동을 통해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여성의 가내 생산이 남성의 경영체제로 변모하면서 13세기 이후 여성들의 전문적인 자수 활동은 끊긴다.

중세에는 예술을 개인의 창작으로 여긴다거나 천재성의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익명의 집단으로 작업하는 방식이 보편적이었다. 예술과 노동, 혹은 예술과 기술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다. 오늘날 창작의 개념으로 중세의 작품을 해석하면 곤란하다. 대체로 ‘작가’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그 작가의 이름은 남기지 않았다. 게다가 중세의 많은 예술 작품은 ‘만든 사람’이 아니라, 주문한 사람이나 조직위원장인 성직자 등의 이름으로 남았다. 제작자의 이름을 적을지 여부도 수도사들이 정했는데 같은 교단 수도사들 이름을 중심으로 기록했다. 다시 말해 권력이 있는 교단의 남성 수도사일수록 이름을 남기기 쉬운 구조였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바이유 태피스트리는 오늘날 의미 있는 문화유산이지만, 자수에 참여한 많은 여성들의 이름은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익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지어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익명의 여성들이
그들의 손으로 한 땀 한 땀
지어간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1 봉건 제후나 기사의 무용담을 노래한 중세 프랑스 서사시를 이르는 말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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