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글] 소나기 내리지 않는 곳 없다지만

지붕에비내리는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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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심심치 않게 이런 권유를 받는다. 

“스님도 이제 노년을 편하게 지내실 작은 암자 하나 마련하시지요?” 출가 경력 47년에 이르렀으니, 독립된 집 한 채라도 있어야 안락한 삶과 권위가 선다는 내심일 것이다. 상대방은 분명 진심 어린 권유인데, 내겐 달콤한 유혹으로 들린다. 그래서 이런 말에 잠시 솔깃하다가도, 지금 머무르는 8평 남짓 방도 과분하다는 생각으로 금세 마음을 다잡는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는 데 필수적 환경이 집이다. 집의 변천은 곧 인간 사회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선사시대에는 자연 발생한 동굴이 주거 공간이었다. 그러다가 점차 나무와 진흙, 풀 등을 이용하여 지상에 유용한 공간을 마련했다. 인구가 증가하고, 부락이 만들어지고, 계급이 형성되면서 집은 다양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집이 단순한 생활공간의 의미를 넘어서게 된 것이다. 역사시대에 이르러 집은 신분과 권력의 상징이 되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집은 재화 증식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마침내 집은 ‘주거신분사회’ 라는 용어를 탄생시켰고 인간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냈다.주거신분사회, 집으로 신분이 결정되는 사회를 말한다. 신분과 계급이 사라졌다고 하지만 문화적 계급은 존재한다. 2010년 출간된 책 《주거 신분 사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계층이 고정된 신분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여러 형태의 격차가 발생하면서 시작되었다. 소득 격차부터 시작해 교육 및 건강, 안전까지 삶의 다양한 측면에서 계층 간 격차가 심하다. 특히 주거 형태와 소유 여부, 주거가 위치한 지역적 특성 등의 주거 격차는 신분사회를 보여주는 대표적 현상이다.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사는 집의 평수와 지역, 아파트 브랜드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 책 속에서

이제 집은 더 이상 가족이 함께 따뜻한 밥을 먹고 안온한 잠을 자고 정다운 사랑을 나누는 공간이 아니다. 같은 평수에 살아도 임차인은 노골적인 시선을 받는다.  아이들조차 주거 형태나 지역에 따라 따로 논다는 말이 들린다. 참으로 서글프지 아니한가?

주거 격차의 극단적 형태가 ‘지하 셋방’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서울 지역 집중 호우에 지하에 살던 사람들이 큰 피해와 죽음을 당했다. 그야말로 “당했다”라고 말해야 적확한 진단이다. 소나기 내리지 않은 곳은 없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소나기는 곳곳에 평등하게 내리는데, 안전과 위험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주거 형태에 따라 어느 곳은 안전했고 어느 곳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주거신분사회의 위험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재난 불평등’이라는 누군가의 적시가 맞다. ‘지하’라는 주거 공간은 생명과 건강의 위험에 늘 노출돼 있다. 하늘이 내린 재앙도 결코 평등하지 않다. 여기에 주거 공간에 대한 차별적 시선과 문화는 인간이 가하는 재앙이다. 지하에 사는 사람들은 하늘과 인간 사회로부터 동시에 차별받고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인간이 내린 재앙은 정녕 해결할 수 없는가? 아니지 않는가?


법인 스님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에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새벽숲길’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현재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수행하고 있다. 쓴 책으로는 인문에세이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중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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