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편 가르기의 언어 : 왜 우리는 서로 알려고 하지 않게 됐나

김만권 참여사회연구소 소장, 경희대학교 학술연구교수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대통령이 해외에서 내뱉은 비속어 섞인 발언이다. 이 발언이 나라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모두가 함께 보고 들었는데, 대통령실이 13시간 만에 해명을 내면서부터 이 말을 전혀 다르게 듣는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 미국 의회를 뜻한다던 ‘이 XX’는 우리 국회가 됐다. 더 황당한 건 그 발언을 내뱉은 대통령의 태도다. 자신이 정확히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이 안 난다고 한다. 다 같이 보고 들었는데 말이다. 이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다. 바로 우리 정치에서 ‘공통적인 것’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공통적인 것’이 사라진 정치 

우리가 사는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는 다양한 이익, 가치, 발상이 존재하며 서로 경쟁한다. 정치는 그 다양한 이익, 가치, 발상 간의 갈등을 파악하고 조정한다. 그렇기에 20세기의 칸트로 불리는 정치철학자 존 롤스는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정의란 이런 갈등을 공정하게 조정해 내는 일이며 그것이 정치가 하는 일이라고 본다. 물론 이런 갈등을 파악하고 조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모두 내가 추구하는 이익, 가치, 발상이 우선이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롤스는 정의로운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원칙을 제시한다. 그것이 바로 정의의 두 원칙이다.

이 두 원칙은 정치적 원리와 사회경제적 원리로 이루어져 있다. 롤스는 첫 번째 정치적 원리에서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 자유와 권리, 정치 참여의 기회가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자유시장에서 생겨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다루는 두 번째 원리는 두 개의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모든 이에게 공직을 비롯한 더 나은 삶의 기회에 대한 접근이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둘째, 이런 기회 평등에서 밀려난 이들에게도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며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자원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차등원칙이라 불린다.

여기에 더해 롤스는 이 두 원칙 간에도 서열이 있다고 주장하는데, 정치적 원리와 사회경제적 원리가 갈등한다면 정치적 원리가 늘 우선한다고 말한다. 사회경제적 원리에서도 기회 평등이 차등원칙에 우선한다. 그리고 이런 관계를 ‘사전적 서열’이라고 표현하며 어떤 상황에서 바뀔 수 없다고 말한다. 롤스는 이런 정의의 두 원칙이 헌법에서 시작하는 모든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야 하며, 실제로 그렇게 작동될 때 질서정연하고 정의로운 사회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왜 사전적 서열인가?” 그 이유는 정치가 결국은 갈등 해결의 장치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우리 사회에서 생겨나는 갈등은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해결돼!’라는 발상을 공유하고 있다면 갈등 해결의 소임을 맡은 정치라는 영역에 최소한 공통적인 것이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가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통적인 것을 가지지 못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치는 더는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갈등을 증폭하는 장이 될 것이다. 터져 나오는 이익 추구에 대한 욕망을 제도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세력들은 교착상태에 빠진 채 자신들의 주장만 옳다고 외쳐댈 것이다. 이런 상황이 장기간 지속되면 정치에서 경쟁이 사라지고 오로지 적대만이 남는 최악의 상황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적대적 생존게임으로 전락한 정치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정치가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적대적 갈등만을 증폭시킬 때 사람들 사이에선 정치에 대한 혐오만 조장된다. 이런 정치혐오는 소위 엘리트 집단에 대한 경멸로 이어지고, 이러한 대중의 정서는 종종 반지성주의가 만들어지는 토대가 된다. 갈등의 해법과 그 해법의 (올바름을 판단할 수 있는) 규범적 토대를 제공하는 전문가와 지식인 집단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면, 정치는 오로지 갈등하는 집단 간에 벌어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생존 게임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런 적대적 생존 게임은 자연스럽게 소위 ‘정치적 부족’을 형성한다. 하나의 부족에 소속되기 시작한 사람들은 다른 부족 사람들과 이성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다. 각기 다른 부족에 소속된 사람들은 서로 간에 이성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를 결코 믿지 않는다. 아니 이성적 대화가 지닌 가치를 아예 믿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성적 대화가 아니라 ‘우리가 이겨서 생존하는 것’이다. 생존 게임에서 권력을 빼앗겨 본 자들은 안다. 권력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한없이 무력해지는 일인가를. 이런 이들에게 정보의 가치는 그 정보가 자신들의 생존과 승리에 얼마나 유리하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사실’은 중요치 않다. 아무리 ‘팩트 체크’가 이어져도 소용이 없다. 오히려 부족을 형성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팩트 체크’를 가짜라고 비난한다. 탈진실의 시대는 이렇게 열린다.

당연히 이런 생존 게임에는 정치에 좌절한 사람들을 비롯해 기존에 자신들이 실질적으로 혹은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던 권력을 잃거나 밀려나는 세력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치에는 이런 정치에 좌절한 자들, 밀려난 자들의 절망을 이용하는 포퓰리스트Populist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포퓰리스트들은 무능한 기존의 엘리트들을 비난하며, 자신이 동원하려는 세력이 지닌 절망을 극대화한다. 특히 21세기 우파 포퓰리스트들이 세력을 동원하기 위해 쓰는 ‘편가르기의 언어’는 부패한 엘리트와 선량한 대중이라는 기존의 구분을 넘어, 사회적 약자들 간에 편 가르기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준석 현상에서 볼 수 있듯 편 가르기와 혐오는 이들이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는 기본적 장치다. ‘탈진실’이란 배경과 맞물려 이들의 편 가르기의 언어는 날개를 단다.

편 가르기의 언어를 넘어 ‘공통적인 것’의 정치로

돌이켜 보면, 식민지 경험과 분단 모순을 끌어안고 있는 우리 사회는 이런 편 가르기의 언어가 늘 작동해 왔던 곳이다. 우리는 친일의 잔재를 청산하는 일에 실패했고 분단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그러다 보니 ‘친일’과 ‘종북’은 아직도 편 가르기의 단골 메뉴다. 여기에 IMF 사태를 기점으로 지구적 시장이 만들어낸 ‘생존 가치의 압도’와 이에 따른 ‘능력주의의 지배’가 편 가르기의 언어를 한층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더하여 소수자들이 권리를 찾는 운동을 시작하자 기존의 권력을 갖고 있던 사회 세력과의 갈등이 증폭되며 적대적 분열이 더 가속화되고 있다.

문제는 우리 정치가 이런 복합적인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공통적인 것’을 전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솔직해지자면,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임시적 해법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제도적 해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양당제 구도를 깨뜨리려는 모든 노력은 이 체제의 수혜자들인 두 정당의 결속 아래 무력화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면 이제 우리의 해법은 좀 더 장기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우리가 근본적인 변화를 원한다면, 이익 추구의 장으로 전락한 제도권 대신 상호 간 이해를 목적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는 시민사회가 최종적으로 그 공통적인 것을 만들어낼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다시 시민사회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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