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우리에게 여전히 공론장이 필요한 이유

전성원 계간 『황해문화』 편집장

탈진실Post Truth 시대, 문해력 논란이 보여주는 것

탈진실의 시대란 ‘사실fact’이 없거나 ‘진실truth’이 없는 시대를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정치적 신념·이해관계·감정을 기준으로 사실을 편파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며 이것만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탈진실의 시대에도 때로 진실 공방이 벌어지겠지만, 정보를 검증하고 입증하는 공론장이 사라진 사회는 결국 ‘알 수 없다. 너도 싫고, 저놈도 싫고,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 싫어진다.’는 정치혐오의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특정 진영·담론·후보가 무조건 옳다는 정치적 부족주의에 함몰된다. 진영논리의 사일로silo 1에 빠진 사람들끼리는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다.

최근 ‘심심한 사과’란 표현을 두고 문해력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요즘 젊은 세대의 어휘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문제가 아니다. 문해력의 사전적 의미는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지만, 보다 폭넓은 의미에서 보면 ‘매 순간 변화하는 사회·문화적 환경에서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현실 속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뜻한다. 만약 ‘심심한’이란 표현의 뜻을 알아보려 했다면 휴대폰 검색을 통해 10초면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칸트는 계몽정신을 한 마디로 “감히 알려고 하라!”라고 말했지만, 사람들은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대신 먼저 ‘화’부터 냈다.

여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디지털 뉴미디어 시대에는 하루에 접하게 되는 정보량이 과거와 비할 수 없이 압도적으로 늘어났다. 캘리포니아대UCLA 난독연구센터장 매리언 울프 교수는 『다시, 책으로』(어크로스, 2019)에서 미국인의 경우 하루 동안 디지털세계를 통해 읽어내야 하는 정보량이 하루 평균 34기가바이트에 이른다고 했다. 어쩌면 요즘 대중은 너무 읽지 않아서 문제가 아니라 읽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자신이 그런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검색하고 알아보아야 한다는 상황 자체에 분노가 치솟았던 것일지 모른다.

디지털 미디어 시대의 이상한 공론장, 신뢰의 아노미

대중이 당대의 사건이나 이슈를 접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언론을 비롯한 매스미디어를 통한 것이다. 의견의 자유로운 교환과 토론을 통한 공적 의지의 형성으로서 공론公論, public opinion은 오랫동안 민주주의의 이상으로 여겨져 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정보를 검증하고 시민의 합리적 의견을 모아 공론장으로 연결시키고, 시민들은 언론을 통해 검증된 정보를 얻고, 관계 속에서 서로 설득하고 타협한다.

서구 민주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 지식인과 시민들이 사회 현안을 두고 자유롭게 토론을 벌일 수 있었던 살롱과 카페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대중사회가 시작된 이후 매스미디어는 오랫동안 일방향적인 전달기능의 문제점을 비판받아 왔다. 많은 이들이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진정한 참여민주주의의 가능성을 점쳤다. 그러나 현실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를 맞이하여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공론장이 도리어 강화되는 추세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 탄핵에 이르는 과정에서 정의·평등·공정을 과거 어느 정부보다 앞세웠던 정부의 고위공직자들이 잇따라 도덕성, 부동산 등의 문제에서 이전 정치세력과 구분되지 않는 행태를 보이면서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 ‘가치’의 진정성이 훼손되었다. 대중의 분노와 실망을 땔감으로 삼은 온라인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대중은 중요한 가치가 무엇이며, 이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삶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인지 알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이르게 됐다.

더 이상 누가 옳은지 알 수 없으며, 여론의 전장에서 기준이 되어야 할 언론인들은 어느 순간 특정 정당의 정치인으로 탈바꿈하는 일들이 반복되었다. 대학 역시 신자유주의의 첨병으로 전락하면서 대학교수를 비롯한 지식인들 역시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의 명성과 지식을 활용해 진영의 대리자를 자임하며 뉴미디어 속 엔터테이너로 활동한다. 결과적으로 개인은 고도로 정치화되었지만, 공동체의 가치를 지향하는 대신 정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실용적 또는 이기적) 목표만을 추구(구입)하는 정치 소비자로 전락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지 편집장이던 찰스 스콧은 “논평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은 신성하다.”고 했지만, 뉴미디어의 시대에 ‘사실Fact’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는다.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면서 뉴미디어가 영향력을 확대하자 그동안 공론장을 지탱해오던 기성언론의 영향력이 점차 감소하고 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뉴미디어의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기성언론들도 덩달아 조회 수 장사에 나서며 이런 흐름에 편승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언론이 수익률 제고라는 자본의 압박에 굴복하며 정보검증이나 심층보도 보다 진영논리에 따른 편파적 의견을 제시하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면서 이상한 공론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마치 영화 〈해리 포터〉에 등장하는 ‘소망의 거울’처럼 대중이 보고 싶은 것만 무한 반복해서 보여주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최소한의 현실 인식도 공유할 수 없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공론장의 의미와 가치

공론장에서의 토론이란 상대방의 완전한 패배나 굴종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린 누구나 자신의 한계 속에서만 사실과 진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공론장에서 추구해야 할 진실은 절대적 진실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이다. 실체적 진실이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토론에 참여한 주체들이 서로의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합리적으로 추론해 찾아낸 진실에 가장 근접한 대안을 말한다. 결국 민주주의 사회의 공론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의 문제이다.

아마도 이런 비유가 가능할 것이다. 정말 서로 치열하게 사랑했다면 헤어져도 후회가 남지 않는다. 논란이 되는 사안을 두고, 시대적 한계 속에서 당대의 사람들이 더 나은 방법을 찾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서로의 논리를 전개하고,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우리가 어떤 사안을 두고 정말 치열하게 토론하고, 그 결과 대중의 여론에 의한 것이든, 선거의 표결에 의한 것이든 ‘실체적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그것에 승복할 수 있고, 승복해야 한다.

하버마스가 말하는 ‘공론장이 사회 통합에 기여한다’는 말의 의미도 거기에 있다. 통합이란 각자 개별적인 단위로 살지만 일관성 있는 체제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다원적이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차별당하지 않고 존재 그 자체로 인정받는 ‘따로 또 같이’ 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만나고 토론해야 한다.

1 원래 곡식이나 사료를 저장하는 굴뚝 모양의 높은 창고를 가리키는 말로, 조직 내 부서 간 높은 칸막이를 형성하고 내부 이익만을 추구하는 현상을 경제학에서는 사일로 효과Silo Effect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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