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 간 페미니즘] 야생의 꽃에서 대도시의 고층빌딩까지

꽃과 여성 생식기

‘매혹의 땅’이란 별명을 가진 미국의 뉴멕시코주는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 1887~1986가 사랑했던 땅이다. 오키프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산타페Santa Fe, 그곳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가면 오키프가 1929년부터 거주하던 타오스Taos가 있다. 척박한 땅의 뉴멕시코가 가진 ‘매혹’의 한 요소는 바로 오키프의 흔적이다. 1917년 여행 중 우연히 뉴멕시코의 매력적인 풍경을 발견한 적이 있던 오키프는 1929년 타오스에 머문다. 그때부터 뉴욕과 뉴멕시코 사이를 오가며 살아간다. 남편 스티글리츠가 사망한 1946년 이후로는 아예 뉴멕시코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그렇게 뉴멕시코의 모래 들판과 계곡은 오키프의 흔적을 품을 수 있었다.

오키프는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에서 태어나 시카고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1910년대 버지니아와 텍사스 등에서 교사 생활을 하던 오키프는 1918년부터 1920년대의 한복판을 뉴욕에서 보냈다. 당시 미국 미술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사진작가이며 기획자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와의 만남으로 뉴욕에 정착했다. 1920년대에 스티글리츠는 오키프의 사진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에서 오키프의 신체는 에로틱하게 드러나고, 오키프가 그린 그림은 여성성을 시각화한 작업으로 해석되었다. 다시 말해 오키프는 끊임없이 자신의 생물학적 성과 연결되어 관객과 비평가에게 해석되었다. 여성 예술가는 육체로 환원된다.

잘 알려진 그의 ‘꽃 그림’은 1920년대에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다. 오키프의 작품 세계는 당시 그가 머물던 뉴욕의 재즈 시대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으며 당시 유럽에서 활발하던 전위적인 예술운동과도 달랐다. 1930년대 들어 경제공황이 시작되자 오키프의 꽃 그림은 시대를 반영하지 못한 미술로 공격받기도 했다. 꽃에서 여성의 생식기를 연상하며 찬미하는 무리가 있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꽃은 사치의 상징이었다. 억압받는 민중을 외면한 한가한 예술이 되고 만다. 하지만 오키프는 이에 강하게 반박한다. 그는 ‘시대를 반영’한다는 개념 자체에 맞섰다. 잠시 멈춰서 꽃 한 송이를 바라보게 만드는 작업도 사회적 의미가 있음을 강조했다.

오키프가 주목받았던 1920년대 초의 사회적 배경에는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여성이 늘어나고 정치 사회적으로 여성 인권이 높아진 분위기가 있다. 실제로 1920년대 뉴욕의 대표적 ‘신여성’인 젤다 피츠제럴드Zelda Fitzgerald, 1900~1948는 당시 오키프의 그림을 보고 “추상이라는 무언의 웅변에 너무나 적절히 담긴 장엄한 열망에 마음을 잃었다. 깊은 감정적 경험이었다.”1라는 글을 남겼다. 전과 다르게 여성이 예술에서 생산자이며 관객, 비평가로서의 위치를 확대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Light of Iris ◀︎ 작품보기
오일, 캔버스, 101.6×76.2cm, 1924

여성은 고층빌딩을 그리기 어려울까
2013년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 1950~2016가 2022년 열린 카타르 월드컵 경기장 중 하나인 알 자누브 스타디움Al Janoub Stadium을 설계했을 때 그 모양을 두고 여성의 생식기를 닮았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이 논란에 대해 하디드는 “구멍만 있다면 여성 생식기를 연상”한다며 이런 연상 자체가 성차별적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건축의 모티브를 얻은 대상은 여성의 생식기가 아니라 아랍 지역 어부들과 진주 조개잡이들이 쓰는 ‘다우’Dhow라는 배의 돛이었다

꽃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오키프의 작품 반경은 훨씬 넓었다. 오키프가 꽃을 많이 그리던 1920년대에 그는 뉴욕의 고층빌딩도 많이 그렸다. 미국의 발광 건축The American Radiator Building이 대표적이다. 자연과 육체를 ‘여성적’ 주제로 분리하듯이 대도시의 마천루를 화면에 담는 것은 여성 화가가 ‘남성적’ 주제에 도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지금도 규모가 큰 작품은 남성적이고 여성은 섬세한 내용을 다룬다는 편견이 팽배하다.

Radiator Building – Night, New York ◀︎ 작품보기
오일, 캔버스, 121.9×76.2cm, 1927

오키프는 당시 남성 동료들이 자신을 ‘최고의 여성 화가’라 칭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스스로 ‘최고의 화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성은 항상 따로 분리된다. 무려 100년을 살며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음에도 오키프가 ‘여성 화가’로만 국한되지 않고 20세기 미국의 주요 미술가로서 공식적으로 ‘재발견’ 된 것은 1970년에 휘트니 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서다. 그의 나이 83세였다.

오키프는 자기 작품에 대한 프로이트적 해석을 거부했다. 해석이란 때로 작품의 이해를 확장하기보다 이해의 범주를 제한시킨다. 여성의 작품은 항상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과 관련지어 해석되고, 시대와의 관계에서는 배제된다.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여성적’ 이미지로 가두려는 관점에 오키프는 꾸준히 맞섰다. 생식기는 당연히 중요하지만, 여성의 시선과 목소리는 생식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생식기에 국한될 필요는 없다.

여성의 작품은 항상 생물학적 성과 관련지어
해석되고, 시대와의 관계에서는 배제된다
비평가들이 그의 작품을 ‘여성적’ 이미지로
가두려는 것에 오키프는 꾸준히 맞섰다

1 젤다 피츠제럴드, 『젤다』, 이재경 엮고 옮김, 에이치비프레스, 2019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예술과 정치, 그리고 먹을 것을 고민하는 글쓰기와 창작 활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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