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3년 06월 2023-05-30   937

[여는글] 농사를 지으며 삶의 진리를 깨닫는다

노랗게 익어가는 벼의 모습

요즘 산과 들의 수목과 채소는 한창 물이 올랐다. 3월에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었는데 어느새 상추·배추·고사리가 식탁에 오르고, 지난해 늦가을 파종한 마늘과 양파도 튼실하게 자라 수확을 앞두고 있다. 싹이 무성하게 오른 감자를 보며 하지1를 기다린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마침내 수확까지. 농작물의 생애 주기를 지켜보며 삶의 진리를 체득한다.

내가 사는 곳은 지리산 마을에 있는 절 실상사이다. 우리 절은 모든 존재와 생명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생명 평화를 지향한다. 그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스님들과 재가 불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데, 이 안에 실상사 농장도 있다.

우리는 1998년 이곳에 귀농학교를 만들었다. 귀농학교에서는 농사 기술만 가르치지 않았다. 먼저 삶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주목했다. 생태계를 파괴하며 자본의 무한 증식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대안이 아니라고 공감했다. 그래서 귀농학교를 통해 귀농한 사람은 농업을 소득의 논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평화와 자족의 삶을 지향한다.

그러나 생명이 주는 평화와 기쁨은 관념과 신념만으로는 얻을 수 없다. 안정적이고 지속가능하며 적절한 물질적 뒷받침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먹고 자고, 자식을 공부시키고, 병을 치료하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적정한 소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선대부터 농촌에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농군들, 그리고 큰 결심을 하고 도시 생활을 접고 귀농한 농군들의 고민이 여기에 있다.

지금 농업은 최소한의 물적 기반조차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온전히 농업만을 생업으로 하는 귀농인은 줄어들고, 다른 직업을 가진 귀촌인이 많아진다. 부실한 농업정책이 불러온 현상이다. 얼마 전 대통령이 “남는 쌀 강제 매수법”이라고 주장하며 거부권을 행사한 양곡관리법 사태는 농업이 국가정책의 뒷전인 현실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농업정책은 두 가지 측면을 바라보고 입안해야 할 것이다.

첫째, 농업은 생태적 삶을 회복하는 대안 문명의 가장 좋은 터전이라고 인식해야 한다. 다종다양한 삶의 기본 터전은 결국 먹을거리 생산에 있다. 쌀은 대형마트에서 생산되지 않는다. 사람은 반도체와 인공지능을 먹으며 살 수 없다. 반도체를 팔아 돈을 벌고 스마트폰을 클릭해 식량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나 근시안적이고 어리석은가? 또한 식량을 무기처럼 자원화한다는 생각은 얼마나 야만적인가?

농사는 농군의 철학만으로 되지 않는다. 흙과 비와 바람과 기후의 조화로운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농사는 생태적 삶을 실현하는 대안 문명이다. 자본의 효율성 논리로만 접근할 영역이 아니다.

둘째, 농업이 국민 모두의 행복하고 평화로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되어야 한다. 요즘은 평화로운 삶을 위해 귀농·귀촌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으로 농업정책에 접근한다면 답이 없다. ‘도시와 촌락의 생태계 균형’이라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농촌의 존립은 시급한 당면 과제이다.

우리는 많은 농군이 어울려 살아가는 농촌을 바라는 것이지, 스마트 기술 등으로 소수만 생존하는 농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농업마저 과학기술 생산도구가 지배하는 소수 자본가 산업으로 만들고자 하는가? 농업을 노동자나 자영업자의 논리로 접근해서 안 되는 이유를 깊이 통찰해야 한다. 농업정책은 단지 농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삶과 직결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농민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를 옮겨본다.

“김을 매니 벌써 한낮
땀방울이 곡식 밑 흙에 떨어지네
누가 알리 그릇에 담긴 밥이
한 알 한 알 농민의 땀인 것을”

이신?~846, ‘민농’憫農 2

“이월에 새 고치실을 미리 팔아먹고
오월이면 추수할 곡식을 담보로 돈을 빌리네
눈앞의 부스럼은 고칠 수 있겠지만
심장의 살을 도려내는 것과 같다네
나는 바라노라, 임금의 마음이
부디 밝게 비추는 촛불이 되시어
부자들 잔치 자리 비추지 마시고
흩어지는 농가를 두루 비추소서”

섭이중837~?, ‘상전가’傷田歌 3

세종대왕의 정치 철학은 《서경》書經에 나오는 ‘생생지락’生生之樂 4이다. 세종은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 ‘왕 노릇’을 하는 대통령이 부디 농가를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란다. 한 명의 농부가, 나아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기 일에 전념하면서 생업을 즐길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1  24절기의 하나. 북반구에서는 낮이 가장 길고 밤이 가장 짧으며 감자를 캐기 좋은 시기이기도 하다.
2  농부를 애틋해 함
3  농가를 애달파 함
4  살아가는 즐거움


법인 스님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에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대흥사 수련원장으로 ‘새벽숲길’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 참여연대 공동대표를 지냈다. 현재는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수행 중이며 지은 책으로 인문에세이 《검색의 시대 사유의 회복》, 《중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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